69화
페르포네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거지.
그건 내가 에이프릴로 페르포네를 대하고 있기 때문인가?
그림같이 웃기만 하던, 내가 아는 그 어린 남자애가 아닌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얼굴도 할 줄 아는구나.”
그래, 페르포네가 늘 웃거나 울기만 하는 어린애는 아니겠지.
그런데도 데미안과 함께 있을 때 봤던 모습은 너무 낯설어서……. 내 옷깃을 잡으면서 ‘에이프릴 누나.’라고 말하던 그 남자애가 아닌 것 같아서 당혹스러웠다.
당혹감 때문인가. 가슴이 조금 빠른 박자로 뛰고 있었다. 막 뜀박질을 했을 때의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로지안을 경계하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일곱 살 적부터요.”
“일곱 살 적부터라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옛날 일을 되짚어볼 때, 페르포네가 일곱 살 적에 있었던 큰일이라면.
“황후마마가.”
돌아가셨었지. 장례를 치르셨고.
황후마마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컸던 건지 그 뒤로 그는 실어증에 걸렸었다.
하지만 로지안의 존재로 인해 실어증에 걸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로지안은 황후마마가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황제의 곁에 있었으니까.
확실한 건 일곱 살 때 로지안과 페르포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이만큼 흘렀음에도 페르포네는 그 점에 대해서, 그리고 로지안과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껄끄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공작가로 들어가자 “아가씨!”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고개를 들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앰버와 그 곁에 있는 리안이 날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눈가가 발개져서 히끅거리고 있는 앰버를 보자, 꼭 리안에게 혼이라도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앰버, 왜 울고 있어?”
“늦게까지, 아가씨가 안 돌아오셔서요.”
그게 아닌 거 같은데. 꽤 엄하고 피곤한 얼굴의 리안을 곁눈질했다. 아무래도 리안에게 크게 혼이라도 난 것처럼 보였다.
“무사히 들어왔으니까 그만 울고.”
이제 그만 방으로 들어가.
부드럽게 다독이는 말에 앰버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이 아직까지 자지 않고 홀을 왔다 갔다 하고 있던 걸 봐서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들어줄 생각은 없지만.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리는 앰버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걸음을 물렀다.
빗방울을 맞았던 로브를 툭툭 털어내고는 방으로 향하자 리안이 자연스럽게 내 뒤를 따랐다.
“어딜 다녀온 거야.”
“…….”
“네가 갈 만한 곳이라고는 크게 없을 텐데.”
“…….”
“호위도 없…….”
딱 달라붙어 잔소리를 해대는 그에 결국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춘 그에 내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진짜 내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
“이리나…….”
“걱정했다는 되도 않은 말이나 눈빛도 좀 집어치우고.”
역겹기 짝이 없다.
“……우리한테 용서할 기회조차도 주고 싶지 않은 거냐?”
계단을 몇 칸 밟아 올라갔을 때 ‘용서’라는 말이 리안의 입에서 다시금 흘러나왔다.
용서? 어디 관절이 부서진 인형처럼 몸이 삐그덕거리면서 움직였다.
지금 저 자식의 입에서 용서라는 말이 나온 건가? 뻔뻔함이 도가 넘쳤다.
내 시선보다 아래에 있는 리안을 보자, 문득 내가 계단에서 밀었다고 주장하던 에이프릴이 떠올랐다.
그때는 에이프릴이 되도 않은 거짓말을 내뱉은 거였지만, 지금은 기정사실로 만들고 싶었다.
공작가의 대역공녀가 불손하게도 공자의 몸을 밀어 계단에서 굴러 넘어뜨렸다고.
간절하게 날 올려다보는 청회색의 눈동자에 내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리나……?”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담는 리안을 보다 계단 손잡이를 꽉 잡았다.
이렇게 손잡이라도 잡고 있지 않으면 정말로, 정말로 리안의 몸을 밀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한마디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추호도 용서하고 싶은 마음 없어. 죽어도, 죽어서도.”
그 정도 자신들이 죽을죄를 지은 거냐고는 묻지 않기를 바랐다. 적어도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면 말이다.
“공작님께 이야기 들었어.”
일순 그의 어깨가 흠칫했다.
“내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죽은 사실을 안다며?”
입에 풀이라도 붙인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변명이라도 안 해서 다행이지.
변명이라도 했다면 정말로 뺨 한 대를 쳤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몰랐다, 어머니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약속을 지키고 있는 줄 알았다 따위의 말들 말이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이야기도 알리샤를 통해서 들었겠지?”
“이리나, 그게 그러니까.”
“네가 내 입장이었다면 용서하고 싶을지.”
폭우라도 내릴 모양인지, 바깥에서 우르릉, 하고 천둥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순식간에 컴컴해진 바깥과 번쩍하고 빛나는 번개에 리안의 표정이 유달리 선명하게 보였다.
“그 잘난 머리로 생각해 봐.”
리안 힐 라이즈가 내 입장이 되었다면,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부모를 죽인 놈들을 찢어 죽이려고 했겠지.
그들이 나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나 역시 공작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공작가에서 보낸 10년에 가까운 시간은 헛되지 않았으니까.
“정답은 이미 나온 모양이네.”
대답 대신 꽉 말아쥔 주먹을 보면서 짧게 말했다.
* * *
“로지안 님이 후사를 보지 못하는 몸이기에 황실에서 크게 경계를 하지 않는 점이 염려됩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에이프릴을 떠올린 페르포네가 테이블을 탁, 탁, 하고 가볍게 두드렸다.
로지안을 아는 귀족들은 종종 그런 말을 하고는 했다.
‘로지안은 여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내’라고.
여인들처럼 아름답게 꾸미는 외모도 그렇고, 황제의 애첩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도 그 이유에서 나온 것이라고.
“웃기지도 않지.”
그 되도 않은 소문에 흔들리지 않고 요요히 웃기만 하는 로지안 스타리유도 어지간한 인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헛소리만 해대는 인간들을 비웃고 싶을 텐데,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대꾸한 적 없었으니까.
“여자가 되고 싶다고?”
자신이 아는 로지안 스타리유는 여인이 되고 싶은 사내가 아니었다.
어마마마가 돌아가셨던 날, 장례가 치러지던 날, 자리를 비운 황제를 찾기 위해 황실을 돌아다니던 자신이 본 건 사람들이 하던 생각과 정반대의 것이었으니까.
사람들은 황제가 로지안을 안는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로지안이 제 아버지를, 제국의 황제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사내를 거칠게 안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밑에서 더 해달라며 애원하던 제 아버지도.
쾌락에 빠져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와 달리, 로지안은 자신을 똑똑히 쳐다본 인물이었다.
‘쉿.’
그리고 그런 자신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조용히 하라 신호를 보내던 여유까지.
제 아버지의 낯뜨거운 정사를 본 뒤로 페르포네는 황제를 아버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걸 떠올리면 그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불쾌했는데, 지금의 페르포네는 다른 점 때문에 불쾌했다.
자신의 등장에 어지간히 놀란 얼굴을 하던 에이프릴을 떠올렸다.
“도대체 언제…….”
언제부터 두 사람이 친밀해진 거지? 그런 전조증상도 느끼지 못했었는데.
같이 부티크로 갔던 그때부터였나? 왜 다시 친밀해진 거지?
요즘의 에이프릴이 뭔가 달라졌다는 걸 자신이 느꼈던 만큼,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불쾌해.”
그리고 불쾌했다.
1년 뒤 파혼하기만을 간절히 바랐었는데, 왜 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건지.
나중에 자신이 미쳐서 파혼하겠다는 말을 주워 담으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페르포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망할.”
눈을 감아도 계속해서 어른거리는 건 데미안과 다정하게 있던 집무실에서의 에이프릴의 모습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는 질투는 참 오랜만이었다.
이런 감정은 두 사람이 아카데미를 함께 다니던 시절에 끝난 건 줄 알았는데.
“젠장할.”
두 사람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몇 년이나 됐지만, 자신은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 * *
“또 내가 이겼네.”
“아.”
포커게임에서 이긴 에이프릴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앨런이 에이프릴과 포커게임을 한 지도 벌써 열다섯 번째였는데, 15전 0승 15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무슨 귀족가의 공녀께서 밥만 먹고 포커게임만 한 건지.
“무슨 속임수 쓴 거 아닙니까?”
“내가 그런 인간으로 보여?”
이리나의 명령대로 에이프릴의 몸을 보살피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귀족이라면 오만불손하다는 앨런의 선입견을 당당히 부숴준 인물이 에이프릴이기도 했다.
처음에 봤을 때 예민하고 날카롭던 모습은 다리를 다친 것 때문에 보인 예민함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