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진짜 속임수 쓴 거 아니죠?”
“글쎄. 확실한 건 내가 보고 배운 게 이런 거밖에 없어서 잘하는 거뿐이야.”
노름쟁이 양부를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운 게 이런 거다 보니 자연스럽게 습득한 능력이었다.
능력이라고 부를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었지만.
“하.”
“조금 더 노력해 봐. 아니면 다음 판엔 한 번 봐줄까?”
“필요 없습니다. 절대로 봐주지 마세요.”
“하하.”
시원하게 웃는 에이프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이리나와 에이프릴, 두 사람이 똑 닮았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부모가 다른데 이렇게 닮은 사람이 생길 수도 있는 걸까.
에이프릴과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건 그녀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내게 나쁘지 않다 한들, 이리나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리가 많이 나았기 때문에 까칠함이 가신 에이프릴 힐 라이즈는 제법 그 나이 또래의 소녀들처럼 보였다.
오히려 귀족이라기보다는…… 뭐랄까, 평범한 평민, 아니, 오히려 뒷골목에서 험하게 자란 이처럼 보였다.
“한 번 더 할까?”
“됐습니다. 또 질 텐데요.”
에이프릴에게 딱 한 번이라도 이기면 좋을 텐데
“에이, 알겠어. 이번에는 내가 패널티 갖고 게임할게.”
“그게 더 자존심 상해요.”
“자존심이 별건가. 그리고 좀 상하면 어때.”
봐라, 이런 말들이 보통의 귀족 같지가 않다는 거다.
자존심이나 자긍심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귀족들은 본인들의 대단하고 고고한 자존심을 꺾을 줄 모를 테니까.
“내일 다시 도전해 볼 겁니다.”
“그러시던가.”
킥킥, 에이프릴이 작게 웃음을 흘릴 때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프릴, 들어갈게.”
바로 바라크의 목소리였다. 에이프릴의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앨런이 바라크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려한 장신구가 따닥따닥 붙어 있는 문이 열리자, 바라크와 이리나가 함께 들어왔다.
“이…….”
무심결에 나오려는 이리나, 라는 이름을 목 뒤로 꿀꺽 삼켰다.
“버니스 님.”
오랜만에 보는 이리나의 얼굴이었다.
이불보 위에 흐트러진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카드게임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빤한 내 시선에 시선을 슥 피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앨런의 모습은 꼭 들키고 싶지 않은 장면을 들킨 사람 같아 보였다.
“카드게임이라도 하신 모양이군요.”
“방금 앨런을 상대로 15전 15승 0패의 기록을 세우고 있었지.”
에이프릴은 자신만만하게, 동시에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에이프릴이 저렇게도 웃을 수도 있는 애였나. 새삼 놀랍네.
맨 처음 봤을 때와는 확실하게 다른 낯이었다.
다시 만났을 때는 다친 다리 때문에 금방이라도 사람을 찌를 날카로운 송곳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꽤나 말랑해진 모습이었다.
에이프릴을 제법 오래 봐왔었는데, 과거 공작가에서 함께 지내던 그때 모습보다 지금 앨런과 방 안에 함께 있는 모습에서 더 안정감이 느껴졌다.
웃기지도 않지. 자기 본래의 자리를 되찾는 거라고 예민하게 굴 때는 언제고.
그리고 앨런은…….
“공녀님께서 카드게임에 재능이 있으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꼭 본인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에이프릴과 친해지라는 내 말을 착실히 수행 중이었다.
본인은 내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라고 당당하게 굴면 되는데.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건 꼭, 에이프릴에게 감정적으로 친근함을 느낀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좋지 않은 징조군. 혀를 꾹 씹었다.
“많이 괜찮아진 거 같아 다행이다.”
“오라버니 덕분이야.”
바라크 역시 공작가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고슴도치의 가시가 누그러지는 걸 직접 목도한 착각이 들었다.
“한 번 살펴볼게요.”
“이제는 통증도 안 느껴져.”
“그렇겠죠.”
다리에 크게 남은 흉터와 힘줄이 잘려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면 멀쩡해진 상태였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이라도 당장 공작가로 돌아가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어때?”
“진통제는 이제 안 드셔도 되겠어요.”
차분하게 나머지 말을 이었다.
“뼈는 완전히 붙었습니다. 다만, 끊어진 힘줄을 제 힘으로 붙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요.”
가만히 있던 앨런의 몸이 일순 흠칫했다.
“생활하기에는 무리가 없어서 이제 공작저로 돌아가셔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이 말을 하기 위함이었고.
에이프릴을 걱정스레 보고 있던 바라크가 놀란 듯이 나를 쳐다봤다.
혹여나 에이프릴의 입에서 ‘나머지 요양은 공작가에서 하고 싶어’라는 말 같은 게 나올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날 어떻게든 내쫓은 뒤에 에이프릴을 데려오고 싶어 했지만 나를 쫓아내지 못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만에 하나 에이프릴이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을 한다면 안 된다고 말할 변명거리도 없었다.
나를 쫓아내고 싶어도 알렉시스 공작과 리안이 반대할 테니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하지도 못하지. 비식비식 바람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서 빨리 이 애의 입에서 공작가로 돌아가고 싶어― 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릴 때였다.
“원래대로 걷는 건?”
화제 전환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크가 물었다.
“그래, 그건?”
살짝 말랑해 보이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본인의 다리가 점진적으로 괜찮아지는 걸 봐왔기 때문인지 아직도 희망에 찬 얼굴이었다.
“남은 흉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청회색의 눈동자가 불편하게 일렁였다. 그녀의 시선이 느리게 내가 아닌 침대 옆에 있는 지팡이로 향했다.
“저거 없이 걸을 수 있긴 해?”
“방금도 말씀드렸다시피 제 힘으로는 불가능해요.”
빤한 앨런의 시선을 부러 모르는 척했다.
“수도에 성력이 있는 신관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분께 한 번 보여 드리는 건 어떠세요?”
“안 돼.”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타미타르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단박에 떨어지는 거부는 바라크의 입이 아닌 에이프릴에게서 나왔다.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무는 모습에서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타미타르테가 안 된다는 이유는 한 가지겠지.
“……그러잖아도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로지안 때문이겠지.
페르포네는 파혼을 요구했고, 로지안은 공작가를 황태자비로 들이는 걸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까.
“신관에게 도움 청하는 건 싫어.”
“어째서요?”
“소문날 게 분명하니까.”
다친 다리의 상태가 제법 심각했음에도 공작가에서 신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거라 생각했는데, 에이프릴이 신관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끝까지 우겨댄 게 아닌가 싶었다.
“……사교계에서 내가 멀쩡하지 않다는 소문이 돌면 끝장이니까.”
변명처럼 나온 말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기는 했지만…….
글쎄, 과연 소문이 두려워서일까?
“감히 라이즈 가의 딸인 너를 욕할 이가 누가 있다고.”
노한 기색을 드러내는 바라크에 에이프릴이 어설프게 웃다 말았다.
에이프릴이 두려워한 건 사교계의 소문이 아니었다.
에이프릴 힐 라이즈는 어린 시절 로지안이 키우던 표범에게 물려서 등에 상처가 남았다― 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도는 마당에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바라크의 말처럼 앞에서 그녀를 욕보일 이는 없을뿐더러, 내가 알고 있는 에이프릴은 그런 비웃음을 그냥 넘길 이도 아니었다.
에이프릴이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페르포네 때문이겠지.
페르포네가 상처와 다리를 이유로 파혼을 요구하는 게 싫어서일 거고.
공작가에서는 페르포네가 파혼을 요구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손을 들었다.
자신들의 친딸을, 친동생을 찾았다면서 기뻐하던 라이즈 공작가를 떠올렸다.
원래의 가족이 되었다, 라고 기뻐했었지.
근데 어디 이게 진정한 가족의 모습인가? 황태자에게 파혼을 요구당했다는 말조차 못 하고 있는 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나?
서로가 서로를 정말로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한 걸까? 본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에이프릴을 보면 겉만 그럴듯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치돼서 돌아가고 싶어.”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쯧, 짧게 혀를 찼다.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에 불안감이 잔물결처럼 일렁였다.
“에이프릴…….”
바라크의 목소리가 참 절절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참 애틋한 모습이겠군.
에이프릴이 적어도 건국제 직후에는 공작가로 돌아오기를 바라는데.
“그래, 완치돼서 돌아가자. 내가 네 다리를 고칠 수 있는 이를 더 알아보마.”
“고마워, 오라버니.”
불안을 숨긴 채 웃고 있는 에이프릴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다, 바라크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게로 가 있어. 치료해 준 나머지 값을 지불하도록 하지.”
“그러도록 하죠. 앨런.”
따라 나오라는 고갯짓에 앨런이 근처에 벗어두었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에이프릴을 향해 짧게 묵례하자, 그녀가 제법 편한 미소를 보였다.
“앨런, 내일 봐.”
……제법 친해진 게 아니라, 많이 친해졌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