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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72)화 (72/109)

72화

“……저에 대해서요?”

본인에 대해 물어볼 거라 생각하지 못한 눈치였다.

얼떨떨한 눈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버니스에게 바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력은 여자는 가질 수 없다고 들었는데.”

“그렇죠. 저도 원래는 없었습니다.”

“없었다고?”

“예.”

자기 자신에 대해 알려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버니스에 대해 아는 건 또 궁금했던지라, 바라크가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 자리를 잡았다.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는 바라크에 버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한 잔 그에게 내밀었다.

“성력이 뒤늦게 발현되는 경우도 있나?”

“발현된 건 아닙니다.”

여자치고는 조금 낮은 목소리였다. 바라크는 새삼 생김새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버니스를 통해 배웠다.

호쾌한 생김새였던지라 잘 웃고, 사교적인 성격일 줄 알았는데 마냥 그런 것도 아니었다.

바라크가 본 버니스는 차분하고 동시에 냉소적인 인물이었다.

“물려받았어요, 성력을.”

“누구에게?”

누군가가 가게 안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조용한 분위기에 가게에 달려 있는 전등이 끼그덕거리면서 움직였다.

그러자 버니스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늘이 졌다.

길어지는 침묵에 바라크는 더 묻지 않았다. 물려준 이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는 말하기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억지로 캐물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아버지에게서요.”

끝까지 말해주지 않을 줄 알았던 버니스가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가 성력이 있는 분이셨어요.”

유전인가? 성력에 유전성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하지만 발현된 건 아니라고 했으니 유전적인 것도 아닐 텐데.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데 돈이 많은 집안에서 절 입양하겠다고 하셔서, 집안의 걱정 좀 덜어볼 요량으로 그 집에 가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제가 걱정되셨던 모양인지 성력을 제게 물려주셨어요.”

유전으로 물려준 게 아니라, 그 능력을 이어받은 셈이었다.

성력도 그런 게 가능한가?

게다가 사람을 입양한 거였다면 입양한 집안에서 제법 경제력이 있었다는 건데.

왜 버니스는 제국 내에서 불법인 이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걸까.

그리고 왜 저자의 친부란 자는 본인이 가진 성력으로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머릿속을 꿰뚫는 두 가지의 질문이 있었지만 차마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럼, 지금 가족은?”

“없어요, 가족.”

“없다고?”

“하하.”

웃을 이야기가 아닌데도 버니스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흘렀다.

“친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어?”

“절 입양한 집안에서, 아버지를 보살펴 주겠단 약속을 지키지 않았거든요.”

생각보다 무거운 과거에 바라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럼 입양한 가족들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입양했다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공작가의 이야기와 겹쳐 들렸기 때문이다.

듣고 싶지 않아 더는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버니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절 입양한 집안은 피가 섞인 진짜 아이가 태어나니까, 제가 필요 없다고.”

“…….”

“버리더라고요.”

분노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할 이야기였는데, 버니스는 끝까지 옅은 미소와 함께였다.

눈은 웃지 않은, 입꼬리만 올라간 미소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미소가 이리나 데빈과 닮아 있었다.

* * *

마을을 어떻게서든 벗어나기에 성공한 알리샤가 작게 숨을 헐떡였다.

북부와 인접한 곳에 있는 마을에 도착한 알리샤가 마을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나의 흔적을 찾지 못할 것들만 챙기다 보니 일단 가장 필요한 것들만 챙겨서 들고 오기는 했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돈이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노숙해야 하나. 그러잖아도 수인에 대한 차별이 아직 남아 있는 곳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고, 구한다고 한들 신관에서 저를 찾기 위해 제국을 이 잡듯 뒤질 것이다.

일단 수도와 가장 먼 곳인 북부로 계속해서 가는 수밖에 없었고, 이 사실을 이리나에게 알려야만 했다.

이리나가 공작가로 간 걸 좋아하거나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행이었다.

공녀와 똑같이 생긴 이리나를 동일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저기, 서신 하나를 보내려고 하는데 좀 도와줄 수 있습니까?”

알리샤가 여관의 주인장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한창 가게 장부를 보고 있던 주인장이 방긋 웃는 얼굴로 물었다.

“예, 무슨 일이십…….”

흥분과 긴장 때문에 아직 제대로 숨기지 못한 귀와 날카로운 이빨 때문에 알리샤가 수인이라는 걸 눈치챈 가게 주인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종종 수인을 향해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잘 알았기에 알리샤가 못 본 척하면서 물었다.

지금 중요한 건 자신을 향한 혐오가 아니라 이리나의 안위였으니까.

“서신 한 장을 수도로 보내고 싶습니다. 가능할…….”

“시간 없고 바쁘니까 딴 데 가서 알아봐요!”

“……그럼 일단 방이라도 빌리고 싶은…….”

“방은 다 찼습니다. 없어요.”

차별이다. 알리샤가 후, 이를 잘근잘근 물었다.

수도에서 멀수록, 그리고 외지일수록 차별은 만연하게 남아 있었다.

그나마 일평생을 살아왔던 마을에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내온 데다, 마을의 궂은일을 알리샤가 모두 나서서 했기 때문이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차별은 느끼지 못했지만, 역시 마을을 벗어난 이상 이런 일은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버럭 화라도 내면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본능만 남아 있는 수인이라서 저러는 거라고 하겠지.

“아까 전에 방이 많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

“아, 없다고! 너 같은 수인한테 내줄 방 따위 없다고!”

망할.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세게 치고 싶었다.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일반인이었으니까.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하나. 그나마 이 마을에서 큰 여관으로 온 건데 이보다 작은 곳이라면 더할 거고.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건 괜찮아도 수도로 연락은 해야 했다.

“아직까지 수인을 차별하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때 뒤에서 스윽 다가오는 이에 알리샤가 멈칫했다.

“제국법은 수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걸 모르나?”

갑옷을 입고 있고, 머리를 짧게 자른 여성 기사였다. 얼떨떨해하는 알리샤가 눈을 끔뻑이면서 바라볼 때였다.

“그리고 이건 신고감이고, 차별은 신고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벌금이 어디 보자…….”

“아, 아니. 기사님, 그게 아니고요……!”

“벌금이 제법 셌었지.”

“차별 같은 건 안 했습니다!”

“자네 노망이라도 났나? 방금 전에 ‘수인 따위한테 내어줄 방은 없다.’고 자네가 말했을 텐데.”

날 선 목소리에 가게 주인장이 움찔했다. 차갑게 보던 시선이 알리샤로 향했다.

저를 도와주려는 걸 알았기에 알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가 말이 헛나온 모양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 말을 들은 게 아니니 저한테 죄송하실 건 없는 듯한데.”

여자의 시선이 알리샤 쪽으로 곁눈질했다.

사과해야 할 상대는 알리샤가 아니냐는 여자의 눈짓에 가게 주인이 입술을 꾹 물었다.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예.”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주목적은 이곳에서 묵는 것이니 사과는 상관없었다.

기사가 쯧쯧, 혀를 차고는 알리샤에게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여기서 이 사람이 묵을 방은 없는 건가요?”

엄한 갈색의 눈동자가 알리샤에게 닿을 때는 봄처럼 다정하고 따뜻했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있습니다!”

“그럼 이분 방이랑, 2인실 방 하나 부탁드립니다.”

“2인, 실이요?”

혼자처럼 보이는데 2인실을 찾고 있으니 살짝 당황한 듯했다.

“밖에 제 일행이 있거든요.”

“아, 이, 일단 위에 남은 방 정리하고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여관의 주인장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걸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긴 한데…….

알리샤가 슬쩍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곁눈질로 살폈다.

수인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는 상황이기에 누군가의 친절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생김새로만 보면……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알리샤의 경계심을 읽었는지 기사가 “아.” 짧은 감탄과 함께 다정하게 웃다 입을 열었다.

“내 동료가 수인이어서 오지랖을 부렸네요.”

“동료분이 수인이시라고요?”

“예.”

기사로 보이는데 그럼 수인도 기사라는 의미였다. 수인이 보통의 인간들보다 오감이 발달하고, 체격이 크고 힘이 셌지만 쉽사리 고용하는 이들은 없었다.

인간이 아니라 본능이 더 강한 수인이라는 점에 빗대어 거리를 두려는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료가 수인이라고 말을 하니 경계심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래도 못 믿으면, 잠깐만요. 어디 보자.”

그러면서 제 소지품을 여기저기 뒤적거리는 모양새에 알리샤가 그녀의 움직임을 살폈다.

“아, 여기 있다. 신분패.”

신분패. 그러면서 몸 안쪽에서 나온 신분패를 보여주자 기사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그 밑에는 소속된 곳이 적혀 있었다.

“발……슈타인?”

발슈타인,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신분패에 붙어 있는 화려한 장식들을 보니 어디 대단한 가문인 듯했다.

작은 마을에서만 지내왔던 자신이 발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면, 제게 그런 말을 해줄 만한 사람은 수도에서 지내왔던 이리나 한 사람뿐인데.

한참을 골몰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헉!”

알리샤의 중얼거림에 기겁한 반응이 나온 쪽은 다름 아닌 여관의 주인이었다.

“대, 대공가의 기사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그,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밖에 제 일행이 있어서. 일단 이분 방부터 먼저 안내하시죠.”

“예, 예.”

발슈타인 대공가. 발슈타인이라는 성을 들었을 때는 익숙하지 않았는데 뒤따라오는 ‘대공가’라는 단어는 익숙했다. 이리나에게서 들었던 이름이었으니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데리러 나가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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