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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73)화 (73/109)

73화

“저, 저기!”

알리샤의 부름에 먼저 걸어가던 기사가 뒤를 돌아봤다.

왜 자신을 따라 나왔는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방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드리려고요.”

“아. 고맙다는 인사까지 받을 일은 아니었는데.”

신분패로 거들먹거리는 기사들이 재수 없어 보여서 꺼내지 않으려고 했던 신분패였다.

그럼에도 꺼낸 이유는 수인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이지만, 또 한편으로 은근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 여관 주인이 방에 질 나쁜 장난을 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꺼낼 줄 알았으면 진작 보여줄 걸 그랬었나.

“그래도요. 감사합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알리샤를 보며 기사가 멋쩍게 웃었다.

“지낼 곳을 찾는 거예요? 아니면 뭐 다른 볼일이 있는 거예요?”

“숙박할 곳도 필요하고, 편지를 보내야 해서요.”

“편지?”

기사의 되물음에 알리샤가 고개를 주억였다.

“어디에 보내려고요?”

“수도에 편지를 보낼 곳이 있어서요.”

“아하……. 그럼 일단 우리랑 같이 다닐래요? 수인 혼자 다니는 것보다 같이 다니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녀가 일행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전에 기사가 “여기!” 하면서 손을 번쩍 들었다.

마찬가지로 정복 차림의, 기사로 보이는 이의 모습에 알리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키, 딱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체격. 듬성듬성 나 있는 짐승의 털까지.

눈앞에 보이는 저 이가 기사의 동료라는 걸 눈치챌 수가 있었다.

정말로, 기사구나. 수인인데도.

대단하단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신기하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자신은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무언가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야?”

상대 역시 알리샤가 수인인 걸 눈치챘는지 일순 흠칫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여관에서 잠깐 도와준 사람.”

“아아.”

그제야 이해가 됐는지 상대가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대공가랑 조금 멀어서 아직 차별이 남아 있나 보네.”

“일단 저기서 묵으면 될 것 같아. 들어가자.”

차별과 혐오가 새삼스럽지 않다는 듯 픽 웃으며 대꾸하는 상대에게서는 퍽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 여유로움이 대공가 소속의 기사라는 직함과 경제적인 여유로움에서 나온다는 걸 알리샤는 단박에 눈치챘다.

수인을 기사로 두고 있는 주인이라면 어느 정도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기.”

두 사람이 짧게 나누던 대화에 알리샤가 끼어들었다.

“제 이름은 알리샤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알리샤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혹시 저도 대공가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녀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경비가 필요했다.

“단기로라도 상관없어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두 기사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알리샤를 바라봤다.

* * *

마찰음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에 황실 수석 디자이너인 페트라샤의 눈에 들어오는 이는 페르포네였다.

“전하, 페트라샤 님을 모셔왔습니다.”

레르비앙의 말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페르포네의 몸이 느리게 자신 쪽으로 향했다.

태양을 등진 채 서 있는 페르포네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태양 그 자체로 보였다.

화려한 금발과 금안 때문인가, 아니면 서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다정한 위압감 때문인가.

무감각한 금빛 눈동자가 자신에게 콕, 하고 화살촉처럼 박히자 페트라샤가 빠르게 머리를 숙였다.

“황실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황실의 수석 디자이너로 몇 번이고 봐왔지만 볼 때마다 사람의 넋을 쏙 빼놓게 만드는 미모였다.

신께서 정성 들여 한 땀 한 땀 빚어놓은 걸작이었다.

그랬기에 페트라샤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황실의 국보는 초대 황제가 건국할 때 썼다는 검이 아니라, 페르포네 그 자체여야 한다고 말이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편하게 앉아요.”

게다가 이런 다정다감한 성품까지.

황실에서 자주 봐왔던 몇 싹바가지 없는 귀족들과는 천지 차이의 성품이었다.

황태자와 독대까지 하는 상황에 페트라샤가 바짝 긴장하며 페르포네가 가리키는 소파에 조심스레 앉았다.

건국제 때 입을 정복 때문에 부르신 건가? 하지만 정복 때문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혼자서 페르포네를 만난 적은 없었기에 절로 긴장이 되었다.

마른침을 꼴깍꼴깍 몇 번 삼키고 있을 때, 레르비앙이 자연스럽게 페르포네의 뒤에 섰다.

“곧 있으면 건국제라 그대를 불렀습니다.”

“아, 예. 그러잖아도 전하께서 건국제에 입으실 복장이라면 제가 이미 몇 벌 디자인을 해보았는데 한 번 보시고…….”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면서 페트라샤가 품 안에 있는 서류철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건국제 옷차림을 신경 쓰지는 않으셨는데.

따로 입고 싶은 디자인이 있으신 걸까? 하긴 옷걸이가 완벽하니 어떤 옷을 입어도 태가 나실 분이다.

넘긴 서류를 팔락거리며 한 장, 두 장 넘기던 페르포네가 탁 덮고는 활짝 웃었다.

“수석 디자이너셔서 그런지 옷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 그중 전하께서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주시면 제가 성심성의껏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제 옷은 늘 그랬던 것처럼 페트라샤 님이 제게 잘 어울릴 법한 것으로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아, 예.”

동시에 그녀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이렇게 부르신 걸 봐서는 뭔가 입고 싶어 하시는 게 있는 줄 알았건만.

페트라샤의 영감의 주체인 페르포네는 늘 본인이 입을 옷에 대해서는 그리 큰 흥미가 없는 눈치였다.

서류철을 받아 든 페트라샤가 시무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렇다면 뭐 때문에 부르신 거지.

황실의 큰 행사가 아닌 이상 이렇게 만날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그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여럿 떠오를 때였다.

“페트라샤 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 제게요?”

“네. 페트라샤 님이 바쁜 건 알지만 고생 좀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요.”

“예, 무엇이든지.”

황태자 전하께서 명하는 일인데 감히 싫다고 말할 이가 몇이나 되겠나.

페트라샤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다리를 꼰 채 자신을 보고 있던 페르포네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어쩐지 늘 보기 좋다 생각한 페르포네의 미소가 지금은 조금 불길하게 다가왔다.

뭔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내 팔자를 내가 꼰 느낌? 굳이 나서서 일을 만든 것 같은 느낌? 아마 건국제가 열리기까지 이 한 달 반의 시간 동안 밤을 꼬박 새워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에이프릴 공녀가 건국제 때 입을 드레스를 경이 만들었으면 합니다.”

“……예?”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러잖아도 지금 한창 바쁜 시기인데 갑자기 늘어난 일에 페트라샤가 어벙벙한 얼굴을 하다, 페르포네의 뒤에 서 있는 레르비앙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나한테 말하기 전에 네가 말렸어야지, 나더러 죽으란 말이냐?

온갖 의미를 담고 있는 눈동자로 바라봤으나 레르비앙은 그의 편을 들어주는커녕 고개를 살짝 숙이며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 공녀께서는 따로 부티크에서 옷을 구매하시는 게 아닌가요?”

“약혼녀가 다친 뒤에 참석하는 파티이다 보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많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번엔 제가 그 옷을 직접 선물하고 싶어져서.”

“…….”

“그러잖아도 공녀와 저 사이에 별 이상한 소문들도 다 도는데.”

아, 그 불화설. 수도에서 파다하게 퍼져 있는 이야기에 페트라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그 소문도 잠재우고 싶고.”

허어……. 입에 침 하나 바르지 않고 말을 하는 페르포네에 레르비앙은 살짝 기가 막혔다.

소문을 잠재우고 싶다고 말했지만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파혼을 원한 이는 황태자였지 않나.

게다가 1년 뒤에 하게 될 파혼이기도 했고. 두 사람이 파혼하지 않는 건 레르비앙이 원하는 쪽이긴 했지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페르포네를 보아하니 그가 어쩌면 연극배우가 적성에 맞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셨군요.”

아무렇지 않은 척 보였지만, 전하께서도 그 불화설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불화설 잠식됐다는 황색신문의 기사도 영 틀린 기사는 아니었다.

일이 늘어나는 건 싫은데……. 안 그래도 요 며칠 과로했던 생각이 들었다.

자신 말고, 제 밑에 있는 다른 디자이너에게 한 번 말해보겠다며 돌려 거절하려는 찰나였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물기가 촉촉하게 있는 금안은, 마치 불에 황금을 녹였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페르포네가 저런 얼굴로 부탁을 해도 거절을…….

“……알겠습니다.”

무리였다. 역시 무리다.

페르포네는 페트라샤의 취향에 백 퍼센트 딱 맞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황태자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키면 사지가 찢어지겠지만 말이다.

“전하께서 말씀하시는데 제가 힘내보겠습니다!”

활짝 웃는 얼굴과는 달리 페트라샤의 속은 눈물이 한 바가지로 흐르고 있는 상태였다.

멍청이, 멍청이! 사서 고생하는 멍청이……!

그렇지만 기쁘다는 듯이 환하게 웃는 페르포네를 보니 또 할 만한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두신 드레스는 있으십니까?”

“공녀가 어떤 옷이든 완벽하게 소화해 낼 것이라 자신하지만…….”

“자신하지만?”

팔불출 같은 페르포네의 모습이라니 신선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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