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어디까지는 에이프릴 대역으로서야.”
“그렇게 말씀하시긴 하셨죠.”
“혹여나 전하에게 네 정체에 대해 말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예, 그럴 생각 없습니다, 추호도.”
단, 그쪽에서 먼저 날 눈치채는 건 또 다른 이야기지. 나는 끝까지 페르포네에게 내 정체를 숨길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어찌 됐든 간에 내가 먼저 말하지만 않으면 될 일 아닌가. 내가 방긋 웃고 있자 그가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런데 공작님께서는 정말, 절 대역이 필요해서 데려온 걸까요?”
“……뭐?”
“한 번 여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방 안내를 해주었던 집사가 했던 말을 똑똑하게 기억한다.
이 모든 일이 끝났을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건 대역 노릇을 하면서 주겠다는 일련의 보수와는 또 다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오라버니께선 그 입 좀 조심하셔야 될 것 같네요.”
“야!”
뒤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바라크를 뒤로한 채 응접실을 벗어났다.
잘은 모르지만, 확실한 건 에이프릴을 위해서 나를 데려온 건 아닌 눈치였다.
에이프릴의 부상에 대한 상황을 보고받았을 텐데 에이프릴의 다리가 완벽하게 낫지 않는 이상 영영 별장에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에이프릴의 몸은 부상 때문에 큰 상처가 남기도 했었고. 에이프릴이 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건가?
“아가씨?’
알렉시스 공작의 집무실로 향할 때, 집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몸을 돌리자 보이는 건 저번과 마찬가지로 작은 쟁반에 있는 물과 작은 꾸러미였다.
“공작님께 가나 보네.”
“예.”
집사와 그 손에 있는 쟁반을 물끄러미 보던 내가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내가 들고 갈 테니까.”
“예?”
얼빠진 집사의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차피 공작님께서 드실 것 아닌가?”
“아, 그렇긴 합니다만.”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어차피 들고 가는 거 내가 들고 가나 집사가 들고 가나 똑같은 것 아닌가.
“공작님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갖다 드리는 거라면 어려운 거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 살짝 망설인 기색을 보이던 집사가 조심스럽게 쟁반을 건네주었다.
“그럼, 집사는 일 보도록 해.”
산뜻하게 웃은 내가 몸을 돌리고는 천천히 공작의 집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쟁반 위에 있는 물이 내가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찰랑였다. 저번에 건넸던 그 약인 것 같은데.
오른손으로 작은 꾸러미를 살짝 헤집고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집사는 이걸 알렉시스가 먹는 건강보조제, 영양제 정도로만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영양제를 이렇게 시간에 맞춰서 꼬박꼬박 먹는다고……?
조금 의아했다. 약혼식 전날에 쓰러졌다는 걸 생각해 보면 건강보조제라기보다는 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을 건네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걸음을 멈춘 내가 몸을 뒤로 돌렸다.
집무실로 향하는 긴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꾸러미 안에 있는 약을 확인했다.
그 약이 아주 작은 물병인 것을 확인하고는 주머니에 있는 틴케이스를 꺼냈다.
틴케이스 내용물을 전부 비워내고는 물약의 반을 채워 넣은 뒤 다시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아무렇지 않게 집무실 앞으로 다가갔다.
“공작님, 들어가겠습니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을 열자 앉아 있던 알렉시스 공작이 제법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트릭이 아닌 왜 네가 들어오냐는 눈치였다.
시간에 맞춰 꼬박꼬박 약을 먹었기에 지금도 패트릭이 들어올 거라 생각했겠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공작의 몸이 안 좋은 게 맞다라고 생각되자, 꺼림칙한 게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보다 핼쑥해진 얼굴과 쉽사리 활동하지 않는 몸까지.
작은 트레이를 내려놓고는 물과 약 꾸러미를 내밀었다.
빛을 잃었던 청회색의 눈동자가 일순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 조소가 입술 사이로 비죽 흘러나오려고 했다.
“제가 여기에서 지내는 동안 부족한 것 없이 지내게 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혹 필요한 게 있기라도 하느냐?”
“둘째 도련님 때문에요. 매번 절 볼 때마다 날 선 반응을 보이셔서요. 제가 대역 노릇을 완벽하게 해봤자 공자님께서 협조하지 않으시면 금방 들키지 않을까요?”
“바라크가 그래?”
“예. 오늘도 태자 전하께서 보내주신 궁정 디자이너에게 어찌나 화를 내시는지.”
“…….”
“금방이라도 들키는 줄 알았거든요.”
알렉시스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바라크는 알렉시스 공작 본인도 통제하기 어려운 자식이었으니까.
마법과 연금술을 할 줄 알기 때문일까. 바라크는 종종 자기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바람 같았다.
좋게 표현해서 바람이고, 나쁘게 표현해서는 미친 망둥이이다.
“미안하다, 이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잡으마.”
너무나 쉽게 나온 미안하다는 말에 얼이 빠진 건 내가 됐다.
어디 귀족들이 함부로 사과의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던가. 특히 공작가처럼 뼈대 있는 가문이라면 더더욱 사과의 말 같은 건 듣기 어려웠다. 끽해야 하는 사과 역시 빙빙 돌려 말하는 말뿐이었으니까.
“……공작님이 저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저도 공작님을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집사는 1년이 지나고 나면 공작님께서 제게 합당한 보상을 해줄 것이라 했는데…….”
“…….”
“제가 여기에 온 것은 공작님이나 공작가에는 너무 큰 리스크가 아닌가 싶어서요.”
알렉시스 공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내기란 참 힘들었다.
정말 대역으로서 내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확실한 건 내가 아는 알렉시스 공작은 무작정 나를 데려오는 대책 없는 행동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내 물음에 대한 공작의 말은 침묵이었다. 딱히 대답해 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상관은 없었다.
그냥 이 침묵이 조금 불편해진 것뿐. 가족으로 지냈던 과거에는 이런 침묵이 어색하고 불편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죄다 옛말이기는 하지만, 종종 그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볼 때면 내가 책 한 권을 들고 와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기다렸던 적도 있었으니까.
소파와 집무실 책상의 거리는 멀었지만, 심적으로는 오히려 더 가까웠던 시기이고는 했다.
“대답을 듣고자 한 말은 아니니 그냥 무시하셔도 됩…….”
“……지난 시간에 대해서, 네게 배상하고 싶어서 그랬다.”
“배상이요?”
입술을 짓씹으면서 다문 그에게 내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네가 받았던 상처에 대해서도, 입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도 말이다.”
“…….”
“그에 대해서 전부 배상하고 싶어 부른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약간의 죄책감이 있었다?
에이프릴과 공작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는 말로밖에 안 들렸다. 그러니까 이런 타이밍에 이미 쫓아낸 나를 부른 거겠지.
정말 나한테 미안했으면,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이제 와서 배상이고, 죄책감이고, 미안함이고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책상 위에 있는 물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게 미안하신 거네요.”
“…….”
“근데, 지금 와서 배상해 준다면 뭔가가 달라지나요?”
이미 나는 많은 걸 잃었는데. 아버지와의 유대관계도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돌아갈 가족도 잃어버렸다.
알리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단 공작저 때문에 가족을 잃은 게 어디 나 하나뿐인가. 손끝으로 물잔의 테두리를 따라 그리다 툭, 가볍게 밀었다.
“이리나!”
물잔이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책상에 있는 종이들이 물에 잔뜩 젖어버렸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알렉시스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딱히 내 건방진 행동에 화가 난 모습은 아니었다.
“공작님께서는 이 엎지른 물을 과연 주워 담을 수 있을까요?”
“뭐?”
“운 좋게 마법으로 엎지른 물을 그대로 담았다고 해서…….”
“…….”
“그 물을 다시 마실 수 있을까요?”
빤하지. 못 마실 것이다. 이미 바닥에까지 뚝, 뚝, 떨어지는 물을 누가 마시려고 들겠나.
“공작가와 제 관계는 딱 거기까지예요.”
“…….”
“저한테 절대로 사과하려고 하지 마세요.”
마음 편해지는 꼴 같은 건 죽어도 보기 싫으니까.
* * *
“어쩐지 많이 언짢아 보이는 얼굴이네.”
나긋나긋하고 듣기 좋은 음성에 가만히 있던 내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차를 내주는 타미타르테는 조금 걱정 어린 모습이었다.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인간이 왜 로지안의 곁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일순 들었다.
약점이라도 단단히 잡혔던 건가? 로지안의 곁에서는 조금 냉랭해 보였는데 지금은 꼭 숙부처럼 다정다감했다.
저 친절함과 다정함은 내가 우리 부모님의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나오는 다정함이라는 게 새삼 체감이 됐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도 신기했다. 나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 부모님인데…… 나보다 우리 부모님을 더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