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앳된 모습을 손으로 쓸었다. 상자 안에 있는 건 어머니의 사진뿐이었다.
그렇게 숨기고 또 숨겨놓은 초상화인데도 액자에는 바램도 없고, 먼지도 없었다.
아주 잘 관리된 사진을 보다 슬쩍 타미타르테를 바라봤다.
애틋함과 그리움이 가득한 연하늘빛 눈동자가 품은 감정에 에이프릴을 떠올렸다.
왜 하필 에이프릴이냐면, 저런 감정을 띤 채 타인을 바라보던 이는 내 앞에서 에이프릴밖에 없었으니까.
초상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그가 다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나.”
에이프릴의 이름도, 부모님의 이름도 아닌, 내 이름이 그의 입술에서 비집고 흘러나왔다.
“두 사람에게 네 존재는 정말로 큰 용기였을 거다.”
어느 부모에게나 자식은 귀중한 보물이겠지만, 나는 더 특별하다는 것처럼 들렸다.
“두 사람에게 정말로 큰 보물이었을 거야.”
“…….”
“아이를 가진다면, 너도 함께 위험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야. ……큰 용기로 널 가진 거겠지.”
먹먹한 목소리에 내가 스르륵 눈을 내리깔았다. 슬픔은 없고 다정함만이 남은 저 목소리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행복하고 싶어서. 그리고 네 존재로 행복했을 거야.”
하지만 타미타르테가 눈물을 보이지 않는 만큼 나도 꾹 참았다.
타미타르테에게서 느껴지는 온유함이 누구를 그리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타미타르테 님.”
“응?”
그림에서 시선을 뗀 그가 나를 쳐다봤다.
페르포네를 바라보는 에이프릴의 눈빛과 똑 닮았던지라 오히려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어디 저 먼 나라에서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던데, 그 세 가지 중 하나가 사랑이라고 했던 것 같다.
“엄마를 좋아하셨어요?”
분홍빛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이내 그가 조금 부끄러운지 하하, 웃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긍정했다.
“……그래.”
역시.
“좋아했었어.”
“그럴 줄 알았어요.”
눈동자에서 아주 꿀이 뚝뚝, 흘러내렸으니까. 엄마의 역사를 한 편 엿본 기분이 들었다.
“아니지, 잘못 말했네.”
“네?”
아니라는 투에 내가 눈을 깜빡였다.
“좋아했었어가 아니라.”
미성이란 게 이런 걸까.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게 들려왔다.
“좋아해.”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말이었다.
무겁디무거운 감정에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인 나를 그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을 했는데도 아직까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세상엔 이런 사랑도 있구나. 타미타르테는 어머니가 비록 아버지와 결혼을 했어도 상관없는 건가?
죽어서 평생 볼 수 없는 것보다 끝까지 살아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살길 바랐을 것이다. 그저 내 추측이긴 했지만.
“두 분 다 살아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시간이 이만치나 흘렀고, 나는 스물이 넘은 나이인데 불구하고 나온 어리광 같은 투정이었다. 남에게서밖에 들을 수 없는 부모님의 이야기가 조금 아쉽다.
“어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건 오늘이 처음이거든요.”
“음.”
여태까지 어머니에 대해 모를 법도 하단 것처럼 묘한 반응이다.
“아버지가 진짜 어머니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안 하셨거든요.”
첫 질문을 한 건 타미타르테였지만, 정작 알게 된 게 많아진 건 나였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이야기를 해주신 건 없었어요.”
“……그래.”
타미타르테의 긍정이 조금 무겁다. 그 무거움에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 역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눈에 들어오는 건 분위기와 달리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의 초상화였다.
“어느 날 갑자기 저를 안고 어딘가로 데려가셨었는데, 거기가 어머니 묘라고 하시더라고요.”
“…….”
마른침을 삼켰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앞으로는 엄마를 볼 수 없다고, 그리고…….”
말을 하는데 숨이 막혀 잠깐 말을 멈추고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엄마 몫만큼 아버지가 절 사랑해 주고 지켜주겠다고.”
그 지켜줌의 방식이 공작가로 들여보내는 거였겠지. 과거에는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알게 된 것들이었다.
아버지를 위해, 나를 위해 공작가로 가달라는 그 말도 사실은 날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꺼내봤자 다 소용없는 이야기인가.
입안이 쓰다.
만약 로지안이 내가 아버지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리고 내가 성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똑같이 가둬둘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날 지켜줄 힘은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민가로 내려오지 않고 산속에서 틀어박혀 사는 자신보다, 대역이라 할지언정 공작가의 공녀로 사는 게 더 안전하다 생각했겠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고 그저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하니?”
내가 고개를 들자 타미타르테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내 손에 있는 어머니의 그림을 바라봤다.
“예.”
“두 사람이 도망친 뒤로도 신전에서는 끊임없이 두 사람을 찾았어.”
듣고 있다는 의미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로지안이 끝내 버니스 님을 찾아냈었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적막감이다. 끝내 버니스를 찾았다는 저 말이, 신전이, 그리고 로지안 스타리유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신관을 유혹해 함께 도망쳤다는 게 그 사람의 죄였지만 실상은.”
로지안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다니엘을 도망치게 만들었기 때문에 죽임당한 거야.”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 * *
엎어진 컵 때문에 알렉시스 공작의 무릎 위로 물이 뚝뚝, 떨어졌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망부석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알렉시스의 청색의 눈동자가 집무실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지금의 이리나가 아닌, 공작가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이리나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문이 빼꼼 열리고 자신을 향해 배시시 웃던 어린 이리나가 종종걸음으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집무실에 있는 회중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누군가가 아주 먼 과거로 되돌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버지, 여기서 책 읽어도 돼요?”
부끄러운 듯 자신을 향해 웃으면서 물어보는 이리나에 알렉시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였다.
“공작님.”
기억 속의 어린 이리나가 아닌 다 큰 이리나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주 먼 과거로 향했던 시간여행이 지금은 불과 몇 시간 전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공작님’이라는 딱딱한 호칭과 냉랭한 목소리, 그리고 경멸과 혐오가 비치는 눈동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공작가와 제 관계는 딱 거기까지예요.”
“하아…….”
기른 정이 낳은 정보다 무섭다고 하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공작가가 어둡고 슬픔에 잠겨 있던 그 시기를 따뜻하게 바꾸었던 이는 이리나였다.
이리나에게는 단순히 배상하고 싶다 말하였지만, 그 의미는 곧 사과를 하고 싶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배상하고 싶다는 말이 진심이기도 했고.
상처받았을 이리나에게 사과와 제대로 된 배상을 하고 싶었다. 원래의 관계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아도 말이다.
이리나와 공작가의 관계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걸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이리나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건 천지 차이였다.
“저한테 절대로 사과하려고 하지 마세요.”
사과라는 단어는 입에 안 담아서 다행이었던 걸까. 알렉시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마른세수를 했다.
자신이 그녀를 데리고 온 이유를 ‘대역이 필요해서’라고 말하긴 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공작가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라곤 집사 한 명뿐인 비밀 때문이었다. 알렉시스에게는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윽.”
그는 심장의 통증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짧으면 1년, 길면 1년 반. 알렉시스 힐 라이즈는 시한부다.
심장이 돌처럼 딱딱해지는 희귀병으로 인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뒤로 알렉시스가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은 라이즈 공작가의 재산 중 루벨라 광산의 소유권을 이리나 데빈에게 상속한다는 유서였다.
에이프릴도 피가 섞인 딸이니만큼 사랑하지만, 10년을 가까이 키운 이리나 역시 그에게는 딸이었다.
에이프릴을 찾으면서 이리나를 모질게 대했던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 제 말 좀 들어주세요!”
3년 전 공작가에서 쫓겨날 때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면서 어떻게든 제 발목을 잡으려고 했던 이리나를 못 본 체하는 것은 어려웠다.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아니, 변명이겠지만…… 이리나에게 모질게 굴지 않고 에이프릴과 똑같이 다정하게 대할 때마다 에이프릴이 싫어했고,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를 딸이라 생각하지 않으시잖아요.”
“공작가의 딸은 더 이상 제가 아니라, 그 애잖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공작가로 돌아오는 게 아니었어요.”
이리나와 똑같은 얼굴로 서운함과 서러움을 드러내던 에이프릴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