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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84)화 (84/109)

84화

하녀가 껄끄러운 얼굴을 할 법했다. 안으로 들어온 인물은 다름 아닌 로지안 스타리유였으니까.

여성들만 있는 공간에, 남자가 냉큼 들어온다는 건 조금 불편한 이야기였다.

“로, 로지안 님!”

내가 환복 중이었기에 페트라샤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날 가린 것이었다.

드레스로 내 몸을 칭칭 감았는데, 조금 웃긴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로지안에게 날 보호하기 위함이었던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팔도 꺼내지 못해서 조금 불편하기만 했지.

“환복 중이신데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로지안이 다 죽어가는 황제의 애첩이라고는 해도 사내는 사내였다. 나랑 붙어 있어봤자 좋을 이야기도 못 들을 텐데.

페트라샤가 질겁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로지안은 꽃잎 같은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스륵 넘기면서 빙긋 웃을 뿐이었다.

“공녀와 이야기 좀 나누고 싶어 왔는데, 환복은 언제 끝나지?”

나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예기치 못한 말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제법 있었지만, 로지안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쉽사리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설마하니 정체를 들켰나? 그것도 아니면 타미타르테랑 연관이 있다는 걸 들켰나?

만약 내가 타미타르테 신관과 연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면 내 부모님이 누군지도 알게 되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사실 로지안과 이야기를 길게 섞어봤자 이득이 될 건 하나도 없었기에 피하는 게 맞지만…….

날 향하는 녹색의 눈동자에 가볍게 대답했다.

“환복이 끝나면 제가 응접실로 가겠습니다.”

드래곤을 잡으려면 드래곤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도 있고, 드래곤을 잡으러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잠깐만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 * *

에이프릴 공녀가 황실로 와서 궁정 디자이너를 만났다는 말은 로지안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궁정 디자이너가 약혼녀인 에이프릴의 옷까지 만든다는 건 그녀가 곧 황성의 일원이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만약 로지안, 자신이 제2비의 지위를 받은 여인이라면 페르포네의 약혼이나 국혼을 어떻게 해서든 뒤로 미룰 수 있었겠지만, 로지안이 사내이고, 비의 직위도 없는 일개 정부인 이상 황족의 혼례라는 국가적 행사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망할.’

차라리 황제가 정신이 멀쩡했다면 황제를 구슬러 약혼을 뒤로 미뤘겠지만, 그 늙은 영감이 침대 위에 누워서 사람 노릇 못 한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황제와 있을 때면 미향을 너무 오래 피워왔던 탓이다.

타미타르테가 신력으로 미향의 기운을 없앤다면 정신이 조금 또렷해질 텐데.

하지만 정신이 또렷해진 황제가 어떤 말을 지껄일지 몰라 그러지도 못했다.

다 늙어빠진 황제가 안아달라고 요구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역겨웠다.

차라리 지금, 산송장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쪽이 오히려 도움이 되면 되었지.

“그래서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로지안의 응접실에서는 황제가 맡는 향과 마찬가지로 은은한 미향이 나고 있었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 때문에 살짝 넋이 나가고,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그런 향이었다.

신전 고아원에서 지내는 동안 로지안이 지독스레 오래 맡아왔던 향이기도 했다.

내성이 생긴 로지안에게는 먹히지 않는 향이지만, 처음 맡는 이에게는 잘 통하는 향이기도 했다.

“로지안 님?”

자신을 부르는 에이프릴을 로지안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 사용인 하나가 소량의 자백제를 섞은 티를 내온다면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로지안은 인생의 반은 황실에서, 그리고 또 반은 신전의 고아원에서 지내는 동안 배운 것들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고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페트라샤까지 찾아온 걸 보면 두 사람의 국혼이 정말 코앞으로 진행될 모양인가 보네요.”

로지안은 지금의 에이프릴이 약간 신기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에이프릴 힐 라이즈는 조금 어린애 같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나이 또래의 귀족 아가씨 느낌이 강했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인의 가벼운 노크와 함께 티세트가 응접실 테이블에 하나둘 놓아졌다.

달달한 과일향이 나는 차에, 쌉싸름한 맛이 나는 디저트까지. 찻잔에 손을 댄 에이프릴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왜 그러죠?”

차에 무언가를 넣은 걸 들키기라도 했나 싶어 로지안의 심장이 일순 철렁였다.

청회색의 눈동자가 빤히 찻잔을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그리고는 찻잔에 입을 댔고, 에이프릴의 목울대가 부드럽게 일렁였다.

차를 두어 모금 마시고 나서야 로지안의 입가가 슬쩍, 부드럽게 올라갔다.

약을 탄 차에 사람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미향까지 피워놨으니 로지안이 조금 여유로워진 상태로 다리를 한 번 꼬았다.

마물에게서 피어나는 꽃으로 만든 향은, 일종의 마취제와 더불어 환각제 노릇을 하고는 했다.

향을 처음 맡았을 때는 그저 단순히 몽롱해지는 기분만을 느끼겠지만 주기적으로, 지속적으로 향을 맡는다면 환각은 물론이거니와 세뇌가 된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

일종의 정신착란제였다.

“그래서 저한테 따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실까요?”

“다름이 아니라 페르포네 전하와 정말 국혼을 올리실 생각인가 싶어서요.”

“…….”

“사실, 공녀가 마차 사고를 겪고 난 뒤에 황태자께서는 공녀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잖습니까?”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미향과 다정다감한 목소리였다.

로지안이 사르르 눈매를 접으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오히려 달리 좋아하는 분이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고요.”

“아…….”

청회색의 눈동자가 일순 잿빛으로 탁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국혼을 공녀께서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 염려가 되네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차를 또 한 모금 마시는 에이프릴을 슬쩍 쳐다보았다.

“공녀께서는 전하와 달리 이야기를 나누신 게 없으십니까?”

두 사람이 몇 번 만남을 가졌다고 하니, 주고받은 이야기가 있었겠지.

욕심 같아서는 세뇌를 걸어 전하에게 파혼해 달라고 말해라― 고 명령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에이프릴이 이 향을 맡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니만큼, 속이 조금 울렁거려도 며칠 내로는 바로 정신을 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세뇌와 압박은 야금야금, 좀 먹듯이 조금조금 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황제에게 여태까지 한 것처럼 말이다.

“전하와 함께하면서 힘든 일이 있었다면 언제든지 저한테 편하게 말해주세요.”

“…….”

“공녀.”

“로지안 님…….”

홀린 듯이 중얼거리는 에이프릴의 목소리에 로지안의 연녹색 눈동자에 짧게 이채가 서렸다.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미향과 차에 넣은 자백제가 슬슬 효과를 나타낼 모양이었다.

무엇이든, 얼마든지 말하라는 의미로 로지안이 포근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걱정해 주신 점은 감사하나,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똑 부러지는 목소리였다.

보통 미향을 처음 맡은 인간들은 대체로 눈동자가 탁해지면서 말하는 게 조금 어눌해지고는 했다.

여태까지 봐왔던 이들이 그랬으니까. 그런데 에이프릴은 로지안이 여태까지 보아온 사람들과는 영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차를 또다시 한 모금 마신 에이프릴이 여유롭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런데 로지안 님께서 이런 걸 여쭤보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미향과 소량의 자백제가 섞인 약은 통하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당황한 건 오히려 로지안이 되었다.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알고 싶었던 거였는데, 정작 이런 식으로 되물음당할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아, 그저 공녀를 도와드리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지나가는 쥐새끼도 믿지 않을 말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한 선의였고요. 두 분 사이가 좋아졌다는 건 알고 있지만…….”

“…….”

“그래도 전하께서 한 번도 별장으로 찾아가지 않은 게 영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로지안은 차에 손 하나 대지 않았다.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혹 차에 넣으라고 했던 소량의 자백제를 넣지 않았던 건가? 머리 위로 크게 물음표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한 달간 요양 생활을 한 거라면 몸 상태도 많이 나빴을 듯했고요.”

“괜찮습니다, 로지안 님.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고, 전하께선 용무가 바쁘시니만큼 그러실 수도 있죠.”

“……그런가요?”

“제가 앞으로 앉을 자리가, 그런 거에 일희일비하면 안 되는 자리잖습니까.”

갓 피어난 봄꽃처럼 산뜻하게 웃는 에이프릴의 모습에 로지안이 결국 차를 벌컥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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