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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85)화 (85/109)

85화

아무리 찻잔에 자백제 같은 걸 넣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향을 이렇게 피워냈으니 약간의 효과라도 보일 법한데.

“고, 공녀. 차 맛은 괜찮나요?”

“예, 달달한 과일 향이네요. 부담 없이 마시기 좋네요.”

이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서 에이프릴은 차를 더 꼴깍꼴깍 마실 뿐이었다. 마치 차 안에 들어간 약 같은 건 제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이다.

“전하, 이렇게 갑자기 들어가시면……. 전하……!”

바깥에서 들리는 사용인들의 말리는 소리와 더불어 로지안 스타리유가 기거하는 별궁의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아까 전 로지안이 환복하던 에이프릴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문을 벌컥 열었던 것처럼.

그리고 이 황성에서 이렇게까지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페르포네 전하?”

서늘한 금안의 눈이 방 안을 훑으면서, 안에 있던 달콤한 공기가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제 약혼녀가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데리러 왔습니다.”

“……불화설은 정말, 가십거리에 불과했군요.”

불쾌감이 로지안의 얼굴 위로 짧게 스쳐 지나갔다.

페르포네가 그걸 빠르게 확인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황비도, 그렇다고 제2비도 아니고, 직위도, 직급도 없는 단순한 정부의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피, 자리에서 일어나요.”

그리고 꼬박꼬박 에이프릴 공녀라고 부르던 호칭은, 어린 시절 다정하게 부르던 애칭으로 돌아가 있었다.

일부러 제 앞이라 그렇게 부르는 건지, 아니면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돈독해진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로지안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기도 했다.

“제 궁으로 가죠.”

로지안에게 별다른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성큼 다가온 페르포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에이프릴이 따라나가고 문이 쿵! 닫혔다.

“……대체 뭐야.”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로지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에이프릴 같은 인물은 그에게 있어서 난생처음이었다.

아니, 난생처음이 아니라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다니엘…….”

어떤 독도 자백제도 통하지 않던, 신전을 도망친 그자와 똑같았다.

“말도 안 돼.”

그렇다는 건 라이즈 공작가의 에이프릴 힐 라이즈에게도 성력이 있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지금 제 곁에서 자신의 불로불사를 도와주고 있는 타미타르테보다 더한 성력이 있는 것일 수도 있었고.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그리고 이것이 자신에게 기회로 다가올지, 아니면 불운으로 다가올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 * *

“라이즈 공녀님께서 황실을 방문하셨습니다.”

레르비앙의 말에 싸늘한 표정으로 일만 하고 있던 페르포네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스스로가 생각해 봐도 표정이 너무 겉으로 드러났다 생각한 건지 페르포네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어째 부산스러운 페르포네의 행동에 레르비앙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난 3년간 에이프릴 힐 라이즈를 불편하게 여기던 이 같지가 않았다.

인간관계에서 밀고 당기기가 중요하다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들어오시라 하게.”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며 고개를 든 페르포네에 레르비앙이 미소를 살풋 지었다.

페르포네의 곁에 오래 있었기 때문일까, 어딘지 모르게 그의 미소가 페르포네와 많이 닮아 있었다.

“공녀께서 황실을 방문하셨다 했지, 전하를 보러 왔다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맨 처음 레르비앙이 했던 말을 되새긴 페르포네가 볼 안쪽을 세게 꾹 씹었다.

그래, 그랬지. 하지만 지난 시간 동안 에이프릴이 황실에 오는 건 오롯이 자신을 보기 위함이지 않았나.

페르포네는 일순 가슴 한 켠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왜 이렇게 에이프릴에게 휘둘리는 거지. 에이프릴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리고 그녀가 종종 짓는 미소가 지난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데미안의 저택에서 함께 있던 모습을 보고 난 뒤로는 더 울렁거리기도 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했는데.’

수도를 뒤흔들었던 소문에 대해서 데미안은 불쾌함을 종종 드러내고는 했었다.

그랬기에 당연히 두 사람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비 오던 날 밤, 데미안의 저택에서 함께 있던 에이프릴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데미안의 적색의 눈동자에는 애틋함이 가득 맴돌았었다.

“생각해 보면 부정은 하지 않았지.”

그래, 데미안은 불쾌함은 드러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째 라이즈 공녀님께 휘둘리시는 것 같습니다.”

어쩐지 얄미운 미소를 보이는 레르비앙에 페르포네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쉽사리 아니라는 부정의 말은 나오지가 않았다.

“저는 전하께서 공녀님에게 휘둘리셔도 괜찮다고 보는 사람이라,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이왕 그렇게 휘둘리다가 1년 뒤에도 파혼하지 않고 국혼을 치렀으면 하는 게 소신의 마음입니다.”

조금 오버스럽게 말하는 그에 페르포네가 쯧, 혀를 찼다.

“그럴 일은 없으니 마음부터 접는 게 좋겠어요, 경.”

어깨를 으쓱인 레르비앙이 페르포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엄하게도 황태자 전하를 조금 놀리기는 했지만, 그가 신기한 건 에이프릴에게 휘둘리는 페르포네가 아니라 그를 휘두르고 있는 에이프릴이었다.

확실히 마차 사고 이후로 에이프릴의 모습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다.

페르포네에게 종종 보이던 집착적인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애정을 갈구하던 눈빛 대신 동생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고작 한 달 반 만에 사람이 그렇게 바뀔 수가 있나……?

뭔가가 찜찜한 마음을 품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공녀는 뭐 때문에 황실로 온 것이지?”

달리 연락해 온 말도 없었는데. 페르포네의 벌꿀 색 눈동자에 일순 호기심이 맴돌았다.

“건국제 파티 때 입을 옷 때문에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원래라면 페트라샤가 공작저로 방문해야 하는 거 아닌가?”

“원래라면 그렇게 해야 하지만, 바라크 경 때문에 가기가 무섭다고 하더군요.”

“바라크 경?”

왜? 페르포네가 아리송한 얼굴을 하자 레르비앙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라크 경이 무서울 리가 없을 텐데. 자신이 보낸 궁정 디자이너라면 오히려 두 팔 벌려 맞이했을 인물이 바라크였다. 그 누구보다 에이프릴을 아끼는 인물이었으니까.

옛날에는 에이프릴을 그렇게 밀어내던 이가, 요 몇 년간은 에이프릴을 이 세상에 더없을 사랑스러운 동생처럼 대하고 있는 바라크가 영 신기하기는 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에이프릴을 밀어내던 시기와 바라크가 에이프릴을 귀하게 여기던 시기가 묘하게 겹쳐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군.”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페르포네에게 레르비앙이 눈을 몇 번 끔뻑였다.

“어디 가시려고요?”

일이 이렇게나 쌓여 있는데. 레르비앙이 짧게 서류 산을 곁눈질했다.

“약혼자가 방문했다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가보는 게 도리겠지.”

전에는 안 그러셨잖습니까, 라는 말이 입안에서 빙글빙글 맴돌았지만 딱히 내뱉지는 않았다.

괜한 말을 했다가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질 것도 저 때문에 망쳐지는 게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페르포네가 에이프릴 공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게 호재라면 호재였으니까.

“예, 그럼 한 번 가보시죠.”

자리에서 일어난 페르포네가 퍽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벗어났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황실의 복도를 걸으면서 페르포네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저가 에이프릴이 변했다― 라는 생각이 든다면, 데미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에이프릴은 데미안과 둘만 있었던 게 약혼자 된 입장으로 불쾌하셨다면 죄송하다는 말은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사이가 나빴던 인물들이 다시 사이가 좋아진 데는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요.”

뚜벅뚜벅 걸어가던 페르포네의 입에서 질문이 나오자 레르비앙이 물었다.

“데미안 님과 공녀님의 사이가 다시 괜찮아졌나 보군요.”

눈치 빠르긴. 자신을 향한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페르포네의 밑에서 몇 년을 일했었는데. 레르비앙은 짧게 나오려는 웃음을 목 뒤로 꿀꺽 삼키며 방긋 웃었다.

“원래 밑에서 일하는 자들은 눈치가 빨라야 합니다.”

“…….”

“뭐, 사이가 나빠진 원인이 해결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두 사람 사이의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모를 일이다.

페르포네는 일순 주위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제 머리를 거칠게 흐트러뜨리고 싶었다. 요 며칠 에이프릴이 계속해서 제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기 때문이다.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던 페르포네의 걸음이 멈춘 곳은 황궁의 의상실이었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자, 페르포네를 본 의상실 직원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페트라샤 님,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보이는 건 의상실에서 널브러진 옷들을 전부 정리하고 있는 페트라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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