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아마 내가 선의를 가지고 하는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공작가에 온 저의가 뭐냐는 물음에도 두고 보라고 말까지 했으니까.
리안은 내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가 악의적으로 행동하는 걸 또 막고 싶은 얼굴이었다.
“네가 공작가를 떠나고 난다면, 에이프릴이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텐데.”
그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린 것 같았다.
때마침 마차가 덜커덩거리며 흔들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심리적인 것에 의한 흔들림인지 모르겠지만.
“네가 떠나고 나면, 그들이 에이프릴한테서 네 존재를 찾게 될 텐데.”
“에이프릴 아가씨는 상관없어하실 것 같은데요.”
“뭐?”
마차에 타고 나서 처음으로 제법 길게 이어지는 대화였다.
어리둥절해하는 리안을 보면, 그가 참 본인의 친동생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생각은 없이 그저 무작정 아끼기만 했던 건가?
“제가 아는 에이프릴 아가씨는 그래도 페르포네 전하와 함께하길 바라실 것 같아서요.”
“두 사람이 잘되게 해줄 생각은 네게 없지 않느냐.”
“…….”
“네가 네 입으로 말했지. 네가 왜 공작가로 왔는지 지켜보라고.”
그랬다.
“네가 악의를 가지고 그리 행동하는 걸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때마침 마차가 멈추었다. 우리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절 내쫓을 생각이신가요?”
“…….”
“마음에 들지 않고 불편하시면 이 자리에서 자르시면 됩니다. 제게 죄책감 같은 것도 느끼실 필요가 없고.”
딸처럼 대우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날 데려온 것이긴 하지만, 지금은 돈을 받고 딸로 일하는 고용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집에서 내보내면 될 일이었다. 고용주인 공작이 그렇게 행동하겠냐만은.
“그리고.”
마부석에서 내려온 마부가 문을 똑똑, 가볍게 두드렸다.
“제가 판을 깔아놨는데도 아가씨께서 연기를 잘 못 하시는 거라면…….”
도착했으니 이제 내려도 된다는 신호에 마차 문을 조금 열며 말했다.
“그건 아가씨가 감당해야 할 일 아니겠어요?”
물론, 그전에 페르포네가 내 정체를 알아차리겠지만 말이다.
내 행동에 선의가 없다는 걸 알아챈 리안을 향해 잘게 웃음을 흘리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에스코트 해주셔야죠, 오라버니.”
내 말에 그가 작은 한숨을 내뱉고는 먼저 마차에서 내린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내리자, 경기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부 검술대회를 보러 온 모양이네요.”
수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온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검술대회가 공식적으로 열리는 투기장, 팔레스트라에는 사람들이 많다 못해 이 공간이 비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메인으로 보고 싶은 건 아도니스 베트리체의 경기겠지.
사내들 틈에서 결승까지 올라온 인물이니만큼 새삼 베트리체 백작가의 검술에 감탄을 하는 사람도 많았고, 또 어지간히 독하다며 혀를 내두르는 이들도 많았다.
“자자, 여기 우승 예정자에게 돈을 걸어보세요!”
경마장 말들에게 배팅하듯이 사람에게 배팅하는 구경꾼들의 행태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도니스 베트리체에게 배팅하는 인물보다 상대편에게 돈을 거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아휴, 대단하긴 해도 오늘 맞붙는 이의 몸집이 베트리체 경의 두 배던걸.”
종이를 주면서 배팅을 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내 시선을 느꼈는지 종이를 건네던 이가 움찔했다.
“그, 아가씨께서도 하시렵니까?”
백조 문양이 있는 마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귀족가의 아가씨가 사행성 게임 같은 건 안 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혹시나 싶어 종이를 내미는 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에이프릴.”
날 부르는 리안의 목소리가 뭘 그런 걸 하냐는 듯했다.
내가 하겠다는 말에 배팅 종이를 나눠주던 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라이즈 공녀가 돈을 거니 판이 제법 커지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얼마를 거시려고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내게로 몰렸다.
귀족들 중 이런 식의 도박을 하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평민들이 지금 하는 배팅처럼 판이 작거나 이런 배팅은 천박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아도니스 베트리체에게 500루크.”
“헉!”
내가 공작가에 에이프릴의 대역으로 있으면서 월마다 받기로 한 돈의 전부를 거는 셈이었다.
평민 4인 가구의 1년 생활비에 여기저기서 헉!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커진 판에 사람들이 제법 수군거렸다. 내가 500루크나 걸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
그 말에 배팅 종이에 아도니스의 상대를 선택했던 이들 몇이 바꾸고 싶다는 듯 다시 체크했다.
액수가 미친 듯이 컸지만, 아도니스 경이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에이프릴, 이리로 오렴.”
날 부르는 리안의 목소리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배팅에 참여할 줄은 생각도 못 했구나.”
“아도니스 경이 질 거라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그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함께 올 거라고 미리 연락이 갔던 탓인지, 팔레스트라에서 일하는 사용인이 자연스럽게 고위 귀족들이 앉는 자리로 안내했다.
검술대회를 구경하러 온 귀족들은 제법 많았다.
건국제의 검술대회는 귀족, 평민을 나누지 않고, 남녀노소를 나누지 않고 인기가 많은 대회였기 때문이다.
하물며 출전하는 이가 단 한 번도 출전한 적 없던 아도니스 베트리체라 더더욱 궁금한 모양이었다.
상석을 차지한 귀족들 중에서는 주로 기사들을 많이 배출한 귀족가들이 많이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베트리체 가에서는 백작님만 오신 모양이네요.”
리안의 시선이 내가 향한 곳으로 옮겨졌다.
보통 이런 대회에 귀족가의 자제가 참석하면 가족 구성원이 전부 나와 응원하고는 했다.
아마 리안이 검술대회에 참석했다면, 지금 내가 대역으로 있다고 할지언정 바라크가 와서 자리를 지킬 것이고, 몸이 아플지언정 알렉시스 공작이 와서 자리를 지킬 것이었다.
내가 대역이고 진짜고를 떠나서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일종에 자식의 면을 세우는 것이었다.
만약 대회에 참여한 자식이 우승을 한다면 가족들의 면이 서는 것이고, 우승하지 못한다면 가족들끼리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백작이 온 것만으로도 놀랄 만한 일이다.”
“그래요?”
“베트리체 백작은 아도니스가 검을 더 이상 쥐지 않기를 바라니까.”
하긴, 황성 뒤편에서 뺨까지 내려친 분이었지.
참석해 줘서 고맙다고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하는 판인가. 참 나.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네가 걸기엔 너무 큰 금액 아니냐. 내가 대신…….”
“괜찮습니다. 아도니스 경이 이길 게 분명하니까요.”
확언에 가까운 말이었다. 아도니스 베트리체 경은 본인의 실력에 비해 타인들에게 받는 평가가 저평가된 이였다.
“이참에 오라버니도 놀이 삼아 한번 참여해 보는 건 어떠십니까?”
“네가 함께 즐기기 원한다면야.”
검술대회를 함께 보러 가자는 말에 승낙했을 때처럼 환해지는 낯이었다.
그 말에 바로 나보다 배로 배팅하는 리안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누가 돈 많은 귀족 아니랄까 봐. 금전 감각이 제대로 미쳐 버렸군.
제국민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역시나 검술대회였다.
맨 처음, 참가자들부터 시작할 때는 그렇게 관심이 없다가, 12강으로 추려지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었다.
드디어 시작하는 결승전에 사람들의 눈이 빠르게 빛났다.
귀족 자제들이 종종 나와 보여주는 검술 실력은 보통의 제국민들이 흥미를 가질 법한 일이었으니까.
“전하께서 오셨군.”
황족의 입장을 알리는 음악과 더불어 팔레스트라의 가장 중앙, 그리고 가장 상석으로 들어서는 페르포네에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 모두가 일어서 예를 갖추었다.
“폐하께서 편찮으신 지 제법 되셨으니, 공식 일정은 전부 페르포네 전하께서 하시는 모양이네요.”
“황실에 남은 유일무이한 후계자시니까.”
황후께서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보니 지금 황실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페르포네였다.
황위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황위를 물려받은 이처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지금도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하겠지. 며칠 전 황성 집무실로 갔을 때 봤던 편한 차림과는 다른 정복 차림이었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린 자리에서도, 페르포네의 모습만이 눈에 띄었다.
온 세상의 빛을 흡수한 듯한 찬란한 금발이, 그리고 조금 냉소적으로 보이는 금안이 스르륵 움직이면서 내게 짧게 닿았다.
서로 시선이 마주친 게 맞았던 것인지, 일순 그가 흠칫한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십시오.]
자리에 앉다 말고 베트리체 백작과 눈이 마주치자 내가 가볍게 눈인사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