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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96)화 (96/109)

96화

멈칫하던 그가 마찬가지로 짧게 인사하고는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럼 검술대회의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레와 같은 사람들의 환호성이 뒤섞이면서 동편과 서편에서 결승전에서 대결할 두 사람이 나왔다.

동편에서 나온 이는 아도니스 베트리체였고, 서편에서 나온 이는 사람들의 말처럼 몸집이 아도니스의 두 배나 되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같이 붙어 있다 보니 확연히 드러나는 몸집 차이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아도니스가 전략을 어떤 식으로 짰는지 궁금해지는군.”

제국민들 모두가 궁금해하는 결승전이었지만, 나는 이런 것에 흥미를 느끼는 편은 아니었다.

내가 참석한 이유는 우승할 아도니스에게 축하해 주고 싶어서, 그리고 그녀가 우승한 뒤 빌 소원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닥 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나와는 달리 리안은 아도니스가 참여하는 이 대회를 굉장히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보기엔 어떠세요? 아도니스 경이 우승을 할 것 같나요?”

“배팅에 500루크나 걸었으면서, 지금 와서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거냐?”

“그건 아니지만, 제가 보는 것과 검을 다루는 오라버니가 보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요.”

“아도니스가 이길 거다.”

리안이 확답처럼 한 말이었다.

옆에 있던 다른 누군가가 그의 말을 들었는지 슬쩍 시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도니스가 대회에 참여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죽을힘을 다한다는 뜻과 마찬가지니까.”

본격적으로 맞붙자, 챙!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본인이 우승하지 못한다면 태자 전하의 면도 함께 깎이는 일이니까.”

애초에 단순히 승리나 혹은 금전을 바라고 참가하는 인물들과 마음가짐이 다르다는 소리였다.

베트리체 백작은 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 리안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그를 슬쩍 바라봤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베트리체 백작은, 그래도 딸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이참에 아예 지고 검을 놓길 바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아도니스 본인이 가장 우승을 바라겠지.”

황태자의 근위대원이 참가한 것이라면, 강렬하게 바라는 게 있어서 그런 거겠지.

리안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시선을 경기장으로 옮겼다.

칼을 계속해서 주고받고, 아도니스가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지만, 그녀가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역시 여자가 남자를 이기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덩치가 거의 두 배나 차이 나는데 말이야.”

“올해 경기는 좀 결과가 빤하군.”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미간에 주름이 살짝 졌다.

그 말을 시작으로 상대의 검을 받아주고만 있던 아도니스가 빠르게 반응했다.

다들 아도니스가 힘으로 밀린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기점으로 대회장의 분위기가 단번에 바뀌었다.

이제 밀리고 있는 건 아도니스가 아니라 상대가 되었다.

“아도니스랑 처음 검을 붙으면 저래서 참 기분이 나쁘지.”

“무슨 말씀이세요?”

“아도니스는 초반에 꼭 본인이 질 것처럼 검을 받아주는 경향이 있으니까. 상대가 자신만만하게 이기겠다라는 그 타이밍에 자존심을 박살 내거든.”

리안의 말 그대로였다.

아도니스를 상대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던 상대의 얼굴에는 이제 미소는 볼 수 없었고, 검을 받는 것만으로도 벅찬 모양이었다.

쾅!!

마지막의 커다란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하나의 칼날이 날아가 바닥에 박혔다.

흙먼지 사이로 칼을 마지막까지 쥐고 있는 이가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아 손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런 대회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네.

[우승자는……!]

확성마법이 팔레스트라에서 스산하게 들리고 뿌옇던 흙먼지가 사라진 그 순간이었다.

[아도니스 베트리체!]

조금 지친 얼굴인 아도니스는 끝까지 칼을 놓지 않고 있었다.

박혀 있는 상대방의 칼과, 승리를 알리기라도 하듯 허공에 팔을 흔들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바짝 긴장했던 내 어깨가 아래로 늘어지면서 고개를 숙이자, 바짝 구겨진 배팅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라버니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으시겠네요.”

우승자를 향한 축하의 박수를 치고 있는데도 자리에 앉아 있는 베트리체 백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

땀을 닦는 아도니스의 모습과, 그리고 자신의 신하가 이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페르포네의 다정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아도니스 베트리체, 대회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어떤 마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너른 공간에서 페르포네의 온화한 목소리가 그대로 울렸다.

“검술대회의 우승자에게는 매년 그에 걸맞은 소원을 들어주곤 하지.”

그리고 어지간한 바람은 전부 들어주는 편이다.

작위를 원한다면 작위를, 영토와 집을 원한다면 영토와 집을, 부를 원한다면 부를.

우승한 이들의 소원은 엇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도니스가 바라는 소원이 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는 작위도 있었고, 부유한 집도 있었으며, 어느 정도의 명예도 가졌으니까.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환호성 때문에 시끄럽던 공간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도니스 베트리체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이다.

“제게 베트리체란 성을 버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 새로운 성을 하사하여 주십시오.”

열기로 가득했던 경기장 안은 순식간에 누군가가 차가운 물을 촤악 하고 뿌린 듯해졌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그건가?”

“예, 전하.”

이 파격적인 소원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페르포네였다.

흔들림 없이 성을 버리겠다고, 부모자식 간의 연을 끊고 저 스스로 일가를 이루겠다는 말에 모두가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나와 엇비슷한 자리에 있는 귀족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베트리체 백작에게로 향할 때였다.

“무슨……!”

그제야 상황 판단을 끝마친 베트리체 백작이 벌떡 일어났다.

평생 딸인 아도니스에게 제대로 된 시선 한 번 주지 않던 베트리체 백작이었는데, 딸이 가족들을 버리는 건 용납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행동에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러도록 하지.”

베트리체 백작이 반발하고 싶어 하는 것과 달리 페르포네는 짧게 일갈했다.

* * *

“축하해요, 아도니스 경!”

땀범벅이 된 그녀의 품에 풍성한 꽃다발을 안겨주자, 아도니스의 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내게서 이런 축하 꽃다발을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매번 처음 받을 때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시선을 살짝 내리깐 채 꽃잎을 만지작거리는 속눈썹이 길게 음영졌다.

그리고 새삼 그녀가 참 사랑스러운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공녀께 매번 받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축하하는 자리에 받는 건데요, 뭐.”

“그래도요.”

“그리고 저도 아도니스 경 덕분에 받은 거 있어요.”

“제 덕분에요?”

자기가 도움줄 만한 건 없었는데?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내가 가벼운 웃음을 흘릴 때였다.

“이것 보세요.”

꽃다발과 함께 들고 있던 종이를 당당하게 보이자 아도니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게 뭔데요?”

“경기장에서 누가 이길 건지 배팅하더군. 배팅한 종이.”

나랑 같이 왔던 리안이 웃으면서 말했다.

“경기장에 그런 것도 있었던 모양이네요. 라이즈 공녀께서도 배팅한 거예요?”

“예.”

아주 당연하다는 듯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500루크나 배팅했지.”

경악하는 아도니스 경의 시선을 모르는 체하며 웃었다.

베트리체 백작가가 재력이 부족한 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500루크란 돈이 리안처럼 아무렇지 않게 줄 수 있다는 듯이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금액이 너무 컸다, 어떻게 그렇게 배팅을 하느냐, 라고 걱정 어린 잔소리가 나올 것 같아 내가 먼저 말했다.

“경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걸어야지 돈도 쓸어 모아오는 거예요.”

“안 하셔도 될 배팅이었을 텐데요.”

귀족들은 이런 천박한 게임에 배팅을 하지는 않으니까.

아도니스의 말에 시치미를 뚝 떼었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다가온 리안의 목소리가 살짝 걱정스러웠다.

“그런 소원을 빌어도 괜찮겠나?”

“…….”

“그래도 경의 부모님…….”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경의 부모님인데.

그 말이 여태까지 결정 내리기 위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고민했을 아도니스 경을 걱정하는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래도 네가 참았어야 했다는 투의 말은 아도니스 경을 걱정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어쩌면 경의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용기를 줬을지도 몰라요.”

아도니스 베트리체가 검을 잡고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졸업했을 때, 그녀가 황실 기사단으로 입단하는 게 확정되었을 때, 아카데미에 검술을 진로로 정한 여학생들이 제법 늘었었다.

아마 세상 어딘가에 아도니스와 같은, 아도니스를 보고 용기를 낸 여성들이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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