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아아아악!!”
신문을 구긴 채 집어 던진 에이프릴이 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바라크가 제게 수도 이야기를, 전하와 집안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비명을 왁왁 지르던 에이프릴이 거친 숨을 내뱉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당장 오라버니한테 연락해.”
짓씹듯이 또박또박 나오는 말이었다.
“바라크 오라버니 불러.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해! 당장!”
진정시키기엔 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 바라크가 와도 흥분 상태가 더 연장될 뿐이지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해!!”
에이프릴은 지금 당장이라도 수도로 가고 싶었다.
* * *
뒤따라오지 않는 리안을 놔두고는 여유롭게 축제를 구경했다.
제대로 된 축제 구경이 얼마만이더라. 공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그 흔한 축제 구경 한 번 하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축제가 시작됐는데 앨런은 지금 어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건국제가 시작되고 난 뒤, 에이프릴에게 건네준 기사를 보이라고 했는데 보여줬을까 싶기도 하고.
바라크가 없는 지금이야말로 보여주기 딱 적합한 시기였다.
신문기사를 본 에이프릴이 온갖 난리를 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반쯤 돌아버린 눈을 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뱃속이 조금 즐거워졌다.
게다가 앨런의 성격이라면 에이프릴이 아무리 행패를 부린다고 해도 평소처럼 꿈쩍도 하지 않겠지.
곧 공작가로 돌아올 에이프릴을 상상하니,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을 볼 에이프릴을 생각하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즐거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상상만으로도 참을 수 없어 웃음이 비죽 흘러나왔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을 때, 뭔가 신기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신년행사 다음으로 가장 큰 행사가 건국제이니만큼 타국의 사람들이 있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는데…… 전보다 외국인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신기하네. 아무 생각 없이 노상에서 파는 음식 하나를 사서 입에 물었다.
알리샤나 앨런과 같이 왔었으면 좋았을걸.
신전 때문에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혼자서 한참 동안 축제를 즐기고 있을 때, 소란스러움과는 다른 약간의 부산스러움이 느껴졌다.
제복을 입은 이들 몇몇이 조를 이루어 돌아다니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평상시라면 축제 기간이니 치안을 더 강화하는 건가? 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리 생각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레르비앙 경?”
지시하고 있는 중간에 레르비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술대회도 끝난 마당에 황실로 돌아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 축제 한가운데서 조급한 표정으로 서 있자 아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녀님?”
“경께서 어째서 여기 계십니까? 전하께 휴가라도 받으셨어요?”
“그렇게 보이십니까?”
되물음에 레르비앙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사색이 된 얼굴과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은 모습을 보니 휴가는 확실히 아니었다.
내가 아는 그라면 페르포네에게 휴가를 받으면 축제 구경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인물이었다. 황태자의 오른팔은 이래저래 할 일이 많으니까.
“휴식이나 휴가는 아니신 것 같네요.”
“정답입니다. 그런데 공녀님께선 왜 호위도 없이 혼자 계십니까?”
“오라버니랑 같이 나왔었는데 길이 엇갈렸어요. 그래서…….”
그의 주위를 둘러봤다. 레르비앙이 나왔다면 옆에 페르포네도 같이 있어야 할 텐데.
“경께서는 왜 혼자입니까? 전하는요?”
물어보자마자 레르비앙의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터졌다.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것처럼 바지런히 움직이는 황실 경비병들, 혼자 있는 레르비앙 경, 그리고 내 질문에 터진 한숨까지.
빠르게 정답을 알 수 있었다.
“전하께서 사라지신 거군요.”
“……말도 없이 사라지신 건 아니고, 쪽지 한 장은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레르비앙 경은 걱정이 많으시겠네요, 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다가 꿀꺽 삼켜졌다.
페르포네가 알아서 돌아갈 텐데……. 그리고 이런 식으로 몰래 빠져나와서 돌아다니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 것 같았고.
“쪽지엔 뭐라고 써져 있었는데요?”
“확인할 게 있다고, 그것만 확인하고 돌아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보심이…….”
어떠세요? 하자, 레르비앙의 눈매가 살짝 올라갔다.
뭐, 불안한 마음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황실의 유일한 적통 후계자라고 할 이는 페르포네 한 사람뿐이었고, 아직까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로지안까지 있었으니까.
괜한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만에 하나라도 건국제 기간에 페르포네가 다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큰 문제였다.
다우스 제국의 황실은 제대로 된 이가 하나 없다고 떠들겠지. 뻔히 예상가는 뒷말들이다.
“그렇게 걱정되시는 거면 저도 찾는 데 조금 도움이라도 드릴까요?”
“공녀님께서요? 괜찮습니다, 공녀님도 같이 위험해지면 어쩌려고요. 큰일 납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닐 것 같은데.”
레르비앙의 말이 겉으로 보기엔 걱정 같았는데, 꼭 생략된 뒷말이 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바쁜데, 공녀까지 합세해서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는 뒷말 말이다.
“그리고 축제 구경하시는 거 아니셨습니까?”
“대충 다 했으니까요. 그리고 축제보단 전하가 더 걱정이지요.”
“……그럼,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레르비앙과 내가 정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페르포네가 갈만한 곳이라.
황실이라면 자주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알지만, 바깥에서는 그가 갈 만한 곳이라고는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바깥에서 만난 기억이라면……. 축제를 둘러보고 있던 내가 광장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대릴 마을에서 집으로 다시 돌아가던 중 페르포네와 마주쳤던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가 광장의 골목길에서 나오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뛰어갔다. 다만…… 조금은 찜찜한 게, 그때 페르포네가 나왔던 골목길은 정보길드가 주르륵 모여 있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그 애가 정보길드에서 찾을 만한 게 뭐가 있다고. 로지안에 대한 일이라면 레르비앙과 정보 공유가 가능할 텐데.
정보길드의 어둡고 캄캄한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자 새삼 골목길이 지저분하다는 걸 떠올렸다.
해가 완전히 지고 밤이 되자 하나둘씩 켜지는 불빛과 벽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는 남자들의 시선이 죄다 내게로 향했다. 보이는 여자라고는 나 하나뿐이었다.
……불안한데. 그냥 돌아서 나갈까.
“휘유.”
별다른 희롱 섞인 말도 아니고 휘파람만 부는 건데도 불구하고 불쾌감이 오소소 몸을 휘감았다.
휘파람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팩 돌리자 히죽히죽 웃는 사내가 손으로 희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런 곳에 아가씨가 무슨 일이야? 혼자야?”
불쾌감에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도 모르고 다가와서는 말을 붙이는 남자에 볼 안쪽을 세게 씹었다. 괜히 말이라도 섞으면 더 달라붙을 놈들이라는 건 뻔한 일이었다.
이런 놈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대릴 마을에서는 더 심했다. 그도 그럴 게 아버지 없이 여자들끼리 산다고 희롱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놈들은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살짝 드러났던 불쾌감을 얼굴에서 지워내고는 페르포네를 찾기 위해 걸음을 내디디려고 한 찰나였다.
“아이, 사람이 말은 하는데 대답 좀 해주지? 누구 찾아? 내가 수도 안내라도 해줘?”
“필요 없으니까 이거 놔.”
“와, 아가씨가 앙칼진 맛이 있네.”
“…….”
“난 좀 까칠한 여자가 내 취향이더라. 이런 골목길에서 혼자 다니는 건 좀 위험한데 내가 안내해 줄…….”
본인이 제일 위험한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하진 않는 모양이다. 이 골목길에서 소란을 일으켜 봤자 하나같이 눈앞의 남자를 두둔하거나 아니면 편을 먹고 똑같이 나를 희롱할 게 분명했다.
손목을 빼내려고 힘을 줬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성력이 사람을 위협하는 데 특화된 능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돈을 주고 꺼지라고 말할까 싶을 때였다.
내게 위협할 수 있는 건 많지가 않았다. 바닥에 있는 다 먹고 놔둔 술병이 있긴 했지만 줍기 위해서는 잡힌 손을 빼내야 했다.
적어도 차림새가 화려한 드레스 차림이었다면 이따위 일은 없었을 텐데. 움직이기 편하려고 수수한 차림을 했더니 이런 불상사가 생길 줄이야.
“나중에 후회하기 싫으면 좋은 말 할 때 이 손 놓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할 후회는 지금 만난 아가씨를 놓치는 것뿐일 텐데.”
머리 아프네, 진짜. 냅다 발로 정강이를 걷어차고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게 좋겠단 생각에,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그 손 놔.”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남자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엇!”
몸을 팩 돌린 남자의 어깨 너머로 눈에 익은 옷이 들어왔다.
오늘 함께 나왔을 때 리안이 입었던 조금 단출하지만 가벼운 옷.
“당장 내 동생한테서 손 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험악한 리안의 목소리였다.
낯설다면 낯선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게 리안이 화를 내는 모습은 거의 본 적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