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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101)화 (101/109)

101화

그런 모습을 봤다고 해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에이프릴이 내가 계단에서 자기를 밀었다고 말했을 때조차 그는 화를 내지 않았고, 공작가에서 쫓겨날 당시에도 슬픈 얼굴이면 얼굴이었지,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공작가로 돌아왔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고. 미친 망둥이인 바라크를 혼낼 때조차도 화가 났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는데…….

화났군.

“리안 오라버니.”

내 부름에 그의 시선이 내게 와 닿았다.

“오라버니? 아, 진짜 동생이셨구나.”

웃음기라고는 없는 리안의 말에 남자가 움찔하다가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오, 오라버니랑 같이 있었으면 말을 하지. 아쉽네, 아쉬워.”

내가 놓으라고 말했을 때와는 달리 순순히 놔주는 꼴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당장 본인들을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살벌한 기운 때문에 지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남자가 손을 놓자마자, 빠르게 날 향해 다가온 리안이 나를 보호하는 것처럼 내 앞을 막아섰다.

싸늘하게 식은 리안의 눈빛이 남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큼! 남자가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하고는 냅다 줄행랑을 쳤다.

“가자.”

내 손목을 잡고 골목길 바깥쪽으로 이끄는 리안의 손을 내쳤다.

“싫어요.”

“위험해. 방금 같은 일이 발생하면 어쩌려고. 내가 안 왔으면 무슨 일이 생기고도 남았다.”

“…….”

“찾아다닌다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내 안위를 꼼꼼하게 살피는 눈동자가 날 걱정했음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걱정하신 건 알겠는데, 전하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이 부근에 계실 겁니다.”

“전하께서?”

“수도에 경비병들이 돌아다니고 있지 않던가요?”

“그렇긴 한데…….”

“이쪽 골목길만 둘러보고 바로 나갈 거니 괜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나도 괜히 이곳에 있다가 방금 같은 시정잡배와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나갈 생각 없이 더욱 골목길 깊숙이 들어가니,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날 따라왔다.

“이쪽은 정보길드가 모여 있는 곳인데 전하께서 이곳에 있을 이유가 뭐가 있다고.”

“그러게요. 전하께서 뭐 때문에 여기 계실지는 모르겠네요. 어쩜 안 계실 수도 있고요.”

그냥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안쪽으로 들어가는 거였으니까.

골목길이 그렇게 크지도, 복잡하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페르포네의 금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모습까지 바꾸고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에이프…….”

“다음에 다시 오지.”

날 채근하는 리안의 말 뒤로 선명하게 꽂히는 목소리에 몸을 홱 돌렸다.

방금 지나쳐 온 가게에서 나오는 페르포네의 목소리에 빠르게 달음박질했다.

골목길로 빠져나가려는 그에게 팔을 뻗어 덥석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로브로 얼굴과 머리카락을 가린, 금빛 눈동자가 날 발견하자 놀란 듯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에이프릴 공녀?”

“전…… 웁.”

“몰래 나왔는데 들키겠습니다.”

전하, 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올까 싶어 그가 빠르게 내 입을 막고는 다정하게 눈을 휘었다.

내게 이렇게 붙잡힐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텐데, 페르포네는 여유로운 듯했다.

다만, 그 눈부신 미모에 피곤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한창 바빴던 게 맞았군. 이럴 시간에 돌아가서 차라리 휴식이라도 취하지.

“그런데 공녀는 어째서 혼자 있습니까?”

본인이 여기에 혼자 있었던 것만큼 내가 여기 혼자 있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호기심 많은 고양이가 고개를 기울이듯 살짝 갸우뚱하는 모습에 나는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아.”

내 쪽으로 달려오는 리안을 확인한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스르륵 떼어냈다.

“다행이네요. 공녀 혼자 있기에는 조금 위험한 곳이니까요.”

“그대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페르포네 님 혼자 계시기에도 위험한 곳입니다.”

본인은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처럼 여유로운 듯 잘게 웃었다.

“에이프릴! 아…….”

뒤따라온 리안이 페르포네를 발견하곤 곧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왜 여기에 있습니까?”

“레르비앙 경이 전하를 열심히 찾고 계셔서 도와주고 있는 중입니다.”

“아아. 이렇게 레르비앙 경의 도우미가 있을 줄은.”

“그런데 페르포네 님께서 정보길드가 있는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뭐, 정보길드가 있는 곳에 있는 이유는 정보를 찾으러 온 거죠.”

말을 끝내면서 걸음을 돌리는 게, 무슨 정보를 찾기 위해서 왔느냐는 쓸데없는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의미인 듯했다.

우연치 않게 이런 만남이 생기긴 했지만, 당신들과 내가 공유할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라는 듯, 자신의 영역 안으로 침범하지 말라는 듯 선을 딱 긋는 행동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만난 페르포네는 여전히 다정한 이였던 게 아니라, 다정함으로 위장한 채 냉정해진 인물이었다.

황태자라는 자리가, 제국의 유일무이한 후계자라는 점이 그를 냉정하게 만들기는 했을 테지만, 정말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 모양이다.

그의 수족이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레르비앙 경에게조차도.

……페르포네가 찾을 만한 정보라.

자의식 과잉 같은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그가 찾는 게 내 흔적인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이 그랬던 것처럼.

나보다 키가 훨씬 커진 페르포네를 올려다보다, 눈이 허공에서 딱 마주치자 시선을 돌렸다.

“참, 내 선물이 곧 완성되는 모양입니다.”

“아, 드레스요?”

“예. 아마 내일쯤이면 받을 수 있을 테니 공녀께서 꼭 그 드레스를 입어주면 좋겠네요.”

목소리가 유혹하는 것처럼 은근하고 낮았다. 눈을 갸름하게 뜬 채로 그가 손을 뻗어, 아까 전 그를 붙잡았던 내 손을 잡아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내 약혼자를 위한, 내가 직접 생각한 드레스니까요.”

여성을 대하는 게 아주 능숙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살짝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르포네에게서 이런 식의 대우를 받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페르포네가 이런 식으로, 내가 모르는 남자의 얼굴을 할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에이프릴은 그토록 염원하던 대우였겠지만. 나는 몸이 바짝 긴장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끼어든 건 리안이었다. 잡혔던 손을 부드럽게 끌어내렸다.

“제 동생이 남성들에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벼운 스킨십이었는걸요.”

그 말과 함께 양손을 든 페르포네가 싱긋 웃었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미소였는데, 꼭 사과를 한입 베어 문 느낌이었다.

어두운 골목길인데도 페르포네의 주변만 반짝이고 있었다.

“라이즈 공작가에서 공녀를 정말 아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빨리 레르비앙 경에게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골목길을 빠져나왔을 때는 해가 완전히 져버린 상태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제법 시간을 소요한 모양이었다.

레르비앙 경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겠네.

“엄청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어서 가보라는 말에 페르포네가 짧게 감탄했다.

“왜, 그러세요?”

꼭 내 얼굴에 뭔가 묻은 것처럼 빤히 보는 시선에, 묻은 게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손을 들어 얼굴을 지분거렸다.

“나랑 같이 있지 않으려고 하는 공녀가 제법 신선하고, 신기해서요.”

아, 조금 더 질척거렸어야 했나? 그 애가 전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공녀라는 직위도 그리고 자존심도 버리고 매달렸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내 예상을 전부 비껴 나간 모양이었다. 지금 가보라고 했는데, 다시 가지 말고 함께 있어 달라고 말을 바꾸기에도 애매했다.

“전하께서 제 집착을 받고 싶어 하실 줄은 몰랐네요. 해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난처해질 것 같네요. 그런데 공녀…….”

“저기 계신다!!”

말이 싹둑 잘리고, 빠르게 다가온 황실 근위대원 몇이 단박에 우리를 에워쌌다.

“전하.”

그리고 음울하게 깔린 목소리까지.

그 음산한 얼굴과 목소리에 페르포네가 ‘하하’ 하고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내가 무슨 아이도 아니고, 수도에서 길이라도 잃겠습니까.”

“달랑 쪽지 하나만 남겨두고 가시니까 당연히 걱정을 하지요! 그리고, 길은 안 잃어도 무슨 일은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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