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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105)화 (105/109)

105화

“역시 타미타르테 신관님이세요.”

여자아이를 내 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옮기면서 앰버가 짧게 감탄했다.

여자애의 몸에 남아 있던 상처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게 타미타르테의 성력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이네. 내가 속으로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력이 들킬까 봐 무서운 건 아니었다. 내가 성력을 갖고 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면 날 함부로 대하지 못할 이들이 오히려 많을 테니까.

로지안 스타리유가 날 붙잡고 새장 속의 새처럼 키우고 싶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말마따나 그가 불로불사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내 성력을 필요로 할 테니까 말이다.

실상 내가 두려운 건 이 능력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은 시기에, 능력에 대한 말이 나올까 봐 두려운 것뿐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 능력이 만천하에 드러날까 봐 겁이 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타미타르테 신관인 듯했다.

“눈을 뜨는 대로 저 애를 내 앞으로 데리고 와.”

“예, 아가씨.”

즐기기만 하면 좋은 축제 날인데 이렇게 신경 쓸 일이 많이 생기나.

아도니스가 베트리체 백작에게 뺨을 맞은 것도 그렇고, 페르포네가 정보 길드가 있는 골목에서 나온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리안의 말과 더불어서 날 찾아온 저 여자애까지……. 일은 늘 한 번에 폭풍처럼 몰아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습관적으로 세게 깨무는 입술에 손가락으로 가볍게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몸에 있는 성력 덕분에 자잘한 크기의 상처는 흔적도 남지 않은 채 늘 빠르게 없어지고는 했다. 로지안이 키우던 애완 표범에게 물렸을 때는 상처와 흔적이 제법 오래가기는 했었지만.

방으로 들어가서 눕고 싶다.

지저분한 계집애를 침실에 눕혔다면서 침구를 전부 새로 교체하겠다는 카나의 완고함 때문에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공작가의 서재 쪽으로 향했다.

앨런이 슬슬 말했겠지.

축제가 시작하고 나서 에이프릴에게 내 존재가 공작가에 있다는 걸 알리라고 했었으니까. 별장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 걸 보면 아직 말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언제쯤 말하려나. 바라크가 알게 된다면 왠지 내 쪽으로 불똥이 튈 것 같은데……. 그걸 생각해 보면 오늘은 말하는 날이 아니기를 바랄 때였다.

“아가씨.”

공작가 저택 내부에서 내 호칭은 이제 아가씨로 완전히 굳혀진 듯했다.

에이프릴은 공녀님으로, 공녀의 대역을 부르는 나는 아가씨로. 어디 예전처럼 그것, 저기, 저, 다락방의 걔, 라고 부르지 그러냐고 이죽거리고 싶은 마음을 꿀꺽 삼켰다.

“왜?”

날 부른 이는 다름 아닌 패트릭이었다. 알렉시스 공작과 있었던 저번의 일 때문에 요즘 들어 날 피하는 기색이더니만, 오늘은 또 아무렇지 않게 말을 붙이는 그에게 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가씨 앞으로 선물이 왔습니다.”

“선물? 내 앞으로?”

데미안인가?

“아.”

페르포네가 황실에서 보내겠다고 말했었지. 내일 오전에 올 줄 알았는데.

“황실에서?”

“아, 예.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 말을 마치면서 패트릭이 손을 가볍게 딱! 하고 튕기자, 뒤에 서 있던 하인 하나가 조르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상자를 앰버가 조심스럽게 열자 보이는 건 페트라샤가 직접 디자인한 드레스였다.

보랏빛과 금색이 뒤섞인 드레스였다.

“세상에, 너무 아름다워요.”

앰버가 드레스를 들여다보며 하는 말에 내가 “음.” 하고 짤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그래,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황실 수석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했으니 아름답고 화려하지 않을 리가 없지.

어깨와 등이 드러나는 옷이었다.

“편지도 함께 동봉되어 있는데,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래.”

드레스 위에 있는 서신을 펼쳤다.

글씨체에서도 페르포네의 성격이 참 잘 드러났다. 데미안은 각지고 딱딱한 글씨체였는데, 페르포네는 부드럽고 단정한 글씨체였다.

“아가씨, 뭐라고 적혀 있어요?”

눈으로 빠르게 훑어본 글의 시작은 ‘친애하는 나의 약혼자에게’로 서문을 열었다.

자신이 나를 위해 준비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드레스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페르포네에게 내가 웃음을 삼켰다.

―그대가 꼭 이 옷을 입고 와서 자리를 빛내주었으면 합니다.

―잘 어울리는 구두와 액세서리도 함께 보내니, 부담 가지지 말고 부디 착용하여 주길.

아무리 약혼자라고는 해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는 법인데.

드레스를 디자인하는 데 있어 페르포네가 직접으로 요구한 것이었을까.

서신을 다시 반으로 접어 사뿐히 드레스의 위에 올려두었다.

패트릭이 내게 가져다주긴 했지만, 잘 어울릴 것 같다, 보기 좋다, 따위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조금 난처한 입장이기도 하겠지. 에이프릴이 페르포네를 그렇게 좋아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고, 여태까지 선을 긋고 밀어내던 페르포네가 마음을 열어주기 시작했는데 그 상대가 진짜가 아닌 대역인 나였으니까.

참 말하기도 곤란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드레스는 방에 놔둬. 전하께서 보내주셨으니 그 성의는 보여야겠지.”

“예, 아가씨.”

“아가씨, 그리고 하녀장이 침구가 전부 교체되었다고 합니다.”

“잘됐네.”

침구가 전부 교체되었다는 소식도 패트릭이 알려주자 내가 방으로 향했다. 이제는 밤이 되다 못해 거의 새벽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축제라고 해도 곧 있으면 길거리에 걸린 불빛들도 하나둘씩 꺼질 시기이기도 했으니까.

앰버가 옆에서 드레스가 아름답다, 아가씨와 잘 어울릴 것 같다, 아가씨가 사교파티의 주인공이 되실 거다, 이런 말들을 종달새처럼 내뱉었다.

앰버는 착하고 순진한 아이였지만 동시에 눈치가 살짝 없는 아이이기도 했다.

대역이 그 사교파티의 주인공이 되어봤자 뭐 하겠나. 공작가에 있는 모두가 입을 꾹 다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점에서 살짝 난처한 상황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2층에서 3층으로 나선형 계단을 밟고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뭐야?”

외출이라도 할 것처럼 나오는 바라크의 모습에 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라버니, 나가시려고요?”

“……그런데, 왜.”

“오라버니께서 건국제 기간에 방에 있지 않고 나가는 게 너무 신기해서요.”

내가 봐온 오랜 시간 동안의 바라크는 죽어도 나오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바라크 본인의 의지도 있었고, 이 기간이 되면 공작부인의 정신이 완전히 미쳐 버린 상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바라크를 볼 때면 공작부인이 발작처럼 그를 원망하고는 했었다.

너 때문이라고, 네가 잃어버렸다고, 눈물과 원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그 시절의 바라크는 너무 어렸고, 연약했다.

“이번에도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줄 알았거든요. 하긴, 공작부인께서도 돌아가셨으니 이제 더 이상 숨어 계실 필요는 없죠.”

날카롭게 치켜올라 간 눈이, 그리고 폭력을 행사할 요량으로 습관적으로 뻗으려는 손을 뻔뻔하게 쳐다봤다.

날 공격하고 욕해봤자 입지가 좁아지는 건 바라크 쪽이었고, 알렉시스 공작에게 한 소리 듣는 것도 바라크였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눈짓에 그가 젠장! 짤막한 욕설을 내뱉으면서 고개를 홱 돌리다, 앰버의 손에 있는 상자를 확인했다.

“그건 뭐야.”

“드레스입니다, 공자님.”

“아주 대역 놀이에 푹 빠지셨군.”

비꼼이 가득한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전하께서 파티 때 꼭 입고 와달라며 준비해 주신 드레스입니다.”

“뭐?”

“약혼자에게 보내는 서신과 드레스라고요. 원래라면 공녀님께서 받으셨어야 할 거였는데…… 아쉽네요.”

“…….”

“참 신기하죠. 하필이면 제가 공작저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전하께서 공녀님께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게요.”

“…….”

“공녀님이 전부 받아야 할 대접인데.”

이런 드레스도, 다정함이 담긴 서신도. 그리고 동시에 에이프릴이 평생을 받지 못할 것들이기도 했다.

당연하지, 페르포네는 나와 에이프릴을 구분하고 있으니까. 지금 내게 보여주는 다정함이 에이프릴에게도 보여줄 리가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너.”

비죽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할 때, 바라크가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욕심내지 마.”

의외라면 의외인 차분한 그의 모습에 내가 눈을 갸름하게 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내가 그의 뒷말을 차분히 기다릴 때, 그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네가 지금 즐기고 있는 것들, 전부 에이프릴 거니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바라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원래라면 에이프릴이 마땅히 누렸어야 했을 것이었으니 에이프릴의 것이긴 했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그 어느 것도 에이프릴의 것이 아니기도 했다.

동시에 이곳에서 에이프릴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에이프릴이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 무엇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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