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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공녀에게 후회는 필요 없습니다 (106)화 (106/109)

106화

페르포네와의 관계도, 데미안, 아도니스와의 관계도. 그 어느 것도 에이프릴이 직접 만든 것은 없었다.

전부 다 내가 노력하고, 쌓아온 것들이다. 그리고 똑똑한 바라크가 그걸 모를 리도 없었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안타까울 일이네요.”

언짢은 기색을 보이면서 꿈틀거리는 눈썹을 모르는 체했다.

“공녀님은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걱정해 주는 오라버니도 있고.”

정작 공녀는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는데.

“공녀님께서 어서 빨리 쾌차하셔서 돌아오시면 좋겠네요.”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바라크의 얼굴이 이번에는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더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 모양인지 그가 내 어깨를 퍽 치고는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옆에 있던 앰버가 괜찮으시냐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 정도쯤이야.

그래도 공작과 리안에게 지속적으로 한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전처럼 아예 망아지처럼 행동하지는 않고 있었다.

에이프릴이 어서 빨리 공작가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내 말을, 바라크는 진심이 아니라 이죽임이라 생각했겠지만 나는 정말로 진심이었다.

어서 빨리 에이프릴이 내가 있는 이 저택으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공작가에 박힌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가 공녀로 행동하고 있는 걸 보고 있을 에이프릴의 얼굴이 눈앞에서 그려보았다.

나와 똑같은 얼굴이 비참함과 분노로 일그러질 게 눈에 선했다.

바라크가 떠나고 남은 2층 긴 복도에서 따르릉, 거리는 요란한 벨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크지는 않은 소리지만, 2층에 있는 사용인들이라면 전부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공작저에서 지내는 동안 이런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드물게 놀란 얼굴로 앰버를 쳐다보자 그녀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바라크 도련님께서 만드신 통신구 소리입니다.”

“통신구?”

“예. 공녀님께서 별장에서 지내시게 되면서 불편한 일 있음 언제든 연락하시라고 만드셨어요.”

“기존에 영상구랑 다른 게 있나?”

관심이 없어 시큰둥하게 물어볼 때 앰버가 내 궁금증을 해소할 만한 답변을 내놓았다.

“음성만 들려요.”

“음성만?”

2층 복도에 울리는 이 소리는 상대측이 통신을 걸어왔다는 걸로 보였다.

요란한 소리가 뚝 끊기자, 그제야 상대가 포기했나 보네 싶었는데 바라크가 통신을 받을 때까지 할 요량인지 또다시 소리가 복도를 꽉 채웠다.

공녀님께서 별장에서 지내게 되면서 만든 거라. 그럼 이 연락은 에이프릴에게서 왔다는 소리였다.

알람 소리를 무시하고 3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던 내가 걸음을 돌려 2층, 바라크의 침실로 향했다.

통신구가 연결될 때까지, 노골적으로 연결을 요청하는 주인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 아가씨. 들어가시면 안 돼요.”

“괜찮아.”

“하지만 바라크 도련님께서 화내실 거예요.”

그러잖아도 나를 싫어하고 호시탐탐 쫓아내려고 하는 바라크인데 이 상황을 안다면 불벼락이 떨어질 거라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걱정하는 앰버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한 번 저어주었다.

바라크가 화낼 거라는 말이 전에야 무서워서 발발 떨었었지만 지금 내게 그런 것들은 먹히지 않았다.

뚝 하고 끊겼던 통신구가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바라크가 만들었다는 통신구의 생김새는 영상구와 조금 달랐다. 영상구는 마녀들이 예언할 때처럼 쓰는 동그란 원형 구슬이었는데 통신구는 네모난 상자 모양이었다.

모양은 달랐지만 영상구와 사용하는 데 있어 별반 차이가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작은 보석의 보관함 정도 되는 원목 상자 뚜껑에 있는 버튼을 꾹 누르자, 상자 뚜껑이 벌컥 하고 열렸다.

[오라버니!]

상자가 열리면 통신구가 연결되는 원리인 듯했다.

열리자마자 들리는 에이프릴의 목소리에 앰버의 어깨가 일순 흠칫했다.

오랜만에 듣는 에이프릴의 목소리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새삼스레 느끼는 것이지만, 에이프릴과 내가 닮은 건 비단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생긴 게 닮으면 목소리까지 비슷한가?

[오라버니, 별장으로 언제 올 거야? 신문기사가 진짜야?]

그리고 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듣기 싫게 느껴졌다. 내가 이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면 좋겠는데.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일 때 날카로운 음성이 다시 귀에 내리꽂혔다.

[왜 말이 없어! 진짜 신문기사대로 그 계집애가 저택에 있는 거냐고!]

흐읍. 누군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바라크의 침실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나랑 앰버뿐이었고, 내가 낸 소리가 아니었으니 아마도 앰버가 긴장 때문에 낸 반응이겠지.

[뭐야……? 거기 누구야? 오라버니 아니지?]

한참 동안 답이 없는 이유가 바라크가 없음을 드디어 알아차린 모양이다.

작게 웃음을 흘리면서 내가 바라크의 침대에 털썩 앉았다.

“오랜만이에요, 공녀님.”

[…….]

비명 같은 욕설이 단박에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에이프릴은 침묵을 유지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해서 조용한 건지, 아니면 너무 놀라서 대답을 못 하는 건지.

사색이 되는 앰버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눈짓하자 그녀가 재빨리 침실에서 나갔다.

괜한 소리를 들어서 마음 불편하게 있는 것보다 대화 내용은 아예 모르는 편이 그녀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이리나, 데빈……?]

“이름까지 기억해 주시고, 큰 영광입니다.”

[네가 공작가에 왜 있어? 오라버니 방에는 또 왜 있고!]

“통신구가 계속 울리길래 제가 대신 들어왔어요. 오라버니는 안 계시고, 공녀님께서는 받을 때까지 계속 하실 것 같아서요.”

[오라버니? 누가 네 오라버니야?]

“일단은 바라크 오라버니죠. 바라크 오라버니는 싫으신 것 같지만.”

라이즈 공작가의 그 누구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내게 그 존재를 빼앗기는 건 더 싫은 모양이었다.

“우리 오랜만이죠? 3년만인 것 같은데.”

[너 같은 거랑 나눌 이야기 없어. 오라버니 불러와.]

“오라버니 방금 외출하셨어요. 아마 한동안 돌아오지 않으시던가, 별장으로 가실 것 같긴 하네요.”

통신구 너머로 거칠고 저급한 욕설이 들려왔다.

공작가에서 귀족 아가씨로 만들기 위해서 교육을 시키긴 했지만, 한 번씩 이렇게 궁지에 몰릴 때면 종종 본성이 나오고는 했다.

아니, 본성이라기보다는 익숙한 단어겠지. 도박쟁이 양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못 볼 꼴을 많이 보고 겪었다 했으니까.

[네가, 후우, 네가 왜 거기 있어. 누가 널 데리고 온 거야.]

그래도 몇 년간의 교육이 아예 헛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금세 침착함을 되찾은 에이프릴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물었다.

“절 여기로 데리고 올 사람은 한 명뿐이지 않나요?”

내가 이곳에 애정이 남아서 제 발로 걸어왔겠나, 아님 죽은 공작부인이 되살아나서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날 다시 끌고 왔겠나.

아직 후계에 불과한 리안이 독단적으로 행동할 리도 없고, 그렇다고 나를 싫어하는 바라크가 데려왔을 리는 없다.

[공작님…….]

에이프릴 역시 날 데리고 올 사람은 공작 하나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한데 몇 년이나 같이 지내왔는데 아직까지 친아버지를 공작님이라고 부르는구나.

“그래도 공녀님께서 잘 따르는 바라크 오라버니는 아니니 좀 낫죠?”

[좋은 말로 할 때 공작저에서 나가.]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아시다시피 공작님께서 직접 저를 부르신 거라.”

[대체, 대체 왜!!!!!]

찢어질 듯한 비명이었다. 아마 에이프릴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사용인들 모두가 이곳으로 뛰어왔겠지.

손버릇이 나쁜 바라크처럼 나를 때리거나, 물건을 던지려고 했을지도 모르고.

[대체 너 같은 게 뭐라고!!! 너 같은 게 뭐라고 널 다시 데리고 와!! 대체 왜!!!!!!!]

[내가 별장에 있는데 도대체 네가 뭐라고!!!!]

“궁금하세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눈물과 분노, 짜증, 서운함, 완전히 다 낫지 않은 다리에 대한 절망도 섞였겠지.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울음소리가 작게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동시에 바라크가 영상구가 아닌 통신구를 만들어 그녀에게 넘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에이프릴이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겠지.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했다면 보여줬을지도 모르겠지만, 움직이지 않은 다리를 뼈가 뒤틀려 손조차 댈 수 없는 다리를 보면서 동정과 걱정이 섞인 눈빛을 받기 싫었을 것이다.

에이프릴은 자존심은 센 여자애였으니까.

“공작님께서 다시 딸이 되어달라고 부르셨어요.”

시간의 신이 시간을 멈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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