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15화 (15/128)

#15.

“여기에 있었구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히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성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다.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마치 빛이 나는 것처럼, 아니 빛이라도 된 듯이 카신은 고운 빛깔을 내며 서 있었다.

“다리가 아파서 그러니?”

카신이 구석에 그대로 쪼그려 앉아 있는 히나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카신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배어 나왔다.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그에게서 표정이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히나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착한데.’

평소 표정을 숨기는 것에 능수능란한 카신이 대놓고 미안한 기색을 보이자 마음이 더 콕콕 쑤셔왔다.

“이런. 울었구나.”

무릎을 굽히며 시선을 맞춘 카신은 고개를 숙이려는 히나의 턱을 잡아 올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하고 있지만 뽀얀 뺨에 선명한 눈물 자국을 보는 순간 카신은 자신의 이성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히나가 혼자 이곳에서 울고 있다. 그 생각을 하자 얼음물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카신 님은 제가 좋으신가요?”

히나는 멀뚱히 카신을 바라보았다.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나중에 배신당한 걸 안다면 얼마나 충격이 클까? 제발 카신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줬으면.

“아주. 아주 많이 좋아한단다.”

절대 말하지 않았으면 했던 대답이 카신의 입에서 나왔다. 슬펐지만 좋기도 했다. 이렇게 누군가가 좋다고 표현해 준 적은 처음이었다.

아이러니한 자신의 마음에 히나는 오묘한 얼굴로 카신을 쳐다봤다.

“너는 내가 싫으니?”

“저도 좋아요.”

“그렇구나.”

카신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 손을 바라보던 히나가 카신의 손을 잡았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익숙하지 않은 장소이니 그럴 수도 있지.”

몸이 다시금 붕 뜬 것처럼 가벼워졌다. 아팠던 다리는 당장에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마음껏 받아줄 터이니 내게 어리광을 부려보렴.”

생각보다도 말이 먼저 나왔다. 카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말에 뒤늦게 놀랐다.

“네?”

그의 작은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인지 히나가 되물었다.

“……아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벌써 가도 되나요?”

“형식상 얼굴을 보였으니 이제 됐다.”

카신은 픽 웃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힘든 건 본인일 텐데. 남부터 걱정하는 히나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어리광이 너무 귀여워.’

첩자로 왔으면서 상대에게 마음을 내보이다니. 가끔은 히나가 힘든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남에 의해 우는 건 안 되겠지만.

“카신 님.”

고요했던 정적이 한순간에 깨졌다.

마차를 타고 별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히나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만약에 제가 카신 님을 다치게 한다면 카신 님께서 많이 슬플까요?”

서툴다. 첩자로 쓰기엔 히나는 너무 순수했다.

그녀의 여린 마음이 차갑게 식은 그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난 강하니까 다칠 일이 없단다.”

심각한 히나에겐 미안했지만,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슬퍼하는 모습이 보기 싫은 건 아니었다.

“만약 내가 다친다고 해도 아주 작은 상처가 나는 정도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걱정하는 그녀를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약하고 조그만 것이 그 누구보다도 강한 대마법사를 걱정하는 게 웃기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이 시녀는 나를 참 많이도 즐겁게 해주는군.’

방금 전까지 누군가를 만나 무슨 얘기를 들었나 보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전에 시장에서 귀찮다는 이유로 장소만 대충 알아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이렇게까지 히나를 힘들게 할 줄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뿌리를 뽑았어야 했다.

“하지만 말이다.”

카신의 입가에 쓴 미소가 살포시 걸렸다.

“네가 나를 싫어하고 도망가려 한다면 상처받을 것도 같구나.”

“전 카신 님을 싫어하지 않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히나가 부정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듯 답한 것이 부끄러운지 히나가 곧 고개를 바닥으로 푹 숙였다.

“정말이에요. 카신 님을 싫어하지 않아요.”

히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작은 목소리도 그에겐 크고 선명하게 들렸지만,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정말 좋아해요.”

점점 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럼에도 그 목소리는 그에게 선명하게 닿았다.

아주 소소하면서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내가 찾던 것이 이런 거였나.’

카신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 * *

카신이 막은 폭우 이후로 처음으로 내리는 비였다. 오랜만에 내린 비는 억수처럼 쏟아졌다.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루이스로 인해 히나는 긴장을 해야 했다.

한동안 그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히나는 파티가 끝나고 하루하루를 맞을 때마다 루이스가 오질 않길 기도했다.

하지만 오늘 정오, 루이스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비구름에 가려 불길할 정도로 캄캄한 하늘이 그녀의 불안한 심정을 더 증폭시켰다.

“산책하다 우리 대마법사님이 생각나서 말이야.”

빙긋 웃는 루이스의 얼굴을 보며 히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폭우가 내리는 날에 산책이라니, 참으로 이상한 취미가 있으시군요.”

루이스의 방문이 달갑지 않은지 카신은 시종일관 뚱한 얼굴이었다.

“차, 차를 내오겠습니다!”

딱딱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카신의 시선이 머물렀다.

오늘따라 히나가 유독 긴장을 하고 있었다.

“자네는 저 시녀가 퍽이나 좋은가 보군.”

“마음에 듭니다.”

“오늘따라 더 이상하게 구는데도?”

역시나 루이스도 히나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치 빠른 황제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귀엽지 않습니까?”

루이스는 태연하게 받아치는 카신을 가만히 응시했다. 농담인가 싶었지만 카신은 진지하기만 했다.

“흠흠, 자네가 좋다면 뭐…….”

곧이어 들어온 히나가 조용히 찻잔에 홍차를 따랐다. 찻잔에 담겨지는 고운 색의 홍차가 오늘따라 유독 진했다.

히나가 조심스레 찻잔을 루이스의 앞에, 그리고 카신의 앞에 차례로 두었다. 파르르 떨리는 히나의 손끝을 루이스가 유심히 관찰했다.

“잠시 할 얘기가 있으니 그만 나가보도록 하거라.”

덜덜 떨리는 손이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루이스는 자연스레 명령했다.

“예, 폐하.”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히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카신도, 황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며 앉아 있었다.

‘역시 들키지 않은 거겠지?’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상황을 봐선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 슬프게도 말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을 다짐했지만, 막상 황제를 죽이려니 덜컥 겁이 났다. 소매에 숨겨둔 약을 몰래 꺼내 차에 독을 타면서 몇 번이고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아야 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천하의 나쁜 놈이라고 해도 누군가가 죽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걸 마시면 폐하는 죽어.’

히나가 고개를 숙인 채로 카신을 힐끗 살폈다.

심드렁하니 앉아 귀찮은 티를 부러 내고 있지만,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히나가 아는 카신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카신 님께는 폐하가 유일한 친우겠지?’

카신은 항상 별궁에만 있다. 그리고 시녀는 자주 바뀌었다. 그에겐 딱히 교류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를 제외하곤.

문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면서도 히나의 시선은 카신에게 향해 있었다. 황제를 죽이는 것도 슬펐지만, 카신의 유일한 친우를 없앤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걸렸다. 그것도 눈앞에서.

‘황제 폐하가 갑자기 눈앞에서 쓰러지시면 많이 슬퍼하시겠지?’

카신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서 유일한 벗을 죽게 하는 건 너무 가혹했다.

“자네 시녀 말일세.”

문이 닫히고 히나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루이스는 크게 감흥 없는 눈으로 찻잔을 바라보았다.

“이 차에 뭘 탄 모양인 것 같네만.”

카신의 눈도 찻잔을 향했다.

“그렇군요.”

카신은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히나가 바들바들 떨고 있던 손으로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을 때부터 차에 무언가를 탔다는 걸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신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찻잔에 입술을 갖다 댔다.

“미숙해서 속아줄 수도 없겠군.”

루이스는 은근히 카신을 압박하며 여태 첩자인 히나를 그대로 둔 것을 탓했다.

불쾌감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황태자 시절부터 숱하게 목숨을 위협당해 봤지만, 이렇게 어리숙한 첩자에게 목숨을 대놓고 내어준 적은 없다.

“차가 씁니다. 드시지 않길 권해 드리죠.”

태연하게 마시지 말라 이르는 카신의 얼굴에도 표정이 사라졌다.

독이 든 차를 앞에 둔 황제에게 히나의 행동을 용서해 달라며 설득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아쉬운 건 황제이니 원하는 것을 조금 내어주고 휘둘려 주면 그만이었다.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히나였다. 파티가 있던 날부터 히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특히나 방금 전 그녀의 얼굴은 무척 불안했다.

독을 만지는 것조차 손을 떠는 히나는 첩자를 하며 누군가를 속이기엔 마음이 너무 여렸다. 앞으로 상처를 받을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그게 끝인가?”

카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묵직한 숨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자마자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뭘 원하시죠?”

황제는 기회를 잘 잡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이 빚을 쉽게 넘기지 않으리라.

지금은 일단 황제의 휘둘림에 이용당해 줘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 히나가 무엇을 하든 루이스가 그녀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자네는 내게 뭘 해줄 수 있지?”

카신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질문을 교묘하게 넘기는 황제가 오늘따라 더 얄미워 보인 탓이었다.

탁.

찻잔을 소리 내어 탁자에 올린 카신은 마음에 들지 않은 얼굴을 하며 시큰둥하니 말했다.

“당분간 말을 잘 들어드리지요.”

루이스의 입가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역시나 그는 벌써 머리를 굴리며 카신을 어디다 써먹을지 생각하는 듯했다.

벌컥!

“잠깐만요!”

“감히 티타임 중에!”

“무엄하다!”

문이 벌컥 열렸다. 카신과 루이스가 답지 않게들 놀란 눈으로 문을 다급히 열고 갑자기 들어온 히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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