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감히 황제의 티타임을 망친 히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황제 직속 호위 기사들은 경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문 앞에서 얌전히 대기하고 있어야 할 시녀가 문을 박차고 들어갈 줄은 생각지 못했다.
“됐으니 그만 물러나도록.”
루이스가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히나의 목에 드리워진 두 개의 날카로운 칼끝을 치우게 했다.
“그래, 무슨 일이지?”
루이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히나를 바라보았다.
어째 그녀는 독이 든 차를 앞에 두고 있는 자신보다 더 불안해 보였다. 마치 앞에 있는 독이라도 먹은 것 같았다.
칼날이 치워지자마자 히나가 앞으로 빠르게 다가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만 오래된 찻잎으로 차를 끓인 것 같아…….”
“오래된 찻잎?”
되묻는 루이스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과장되어 있었지만, 히나는 신경 쓰지 못했다.
“네! 그, 그래서 다시 차를 끓여 드리고 싶어서…….”
루이스가 힐끗, 카신을 쳐다보았다. 카신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러려무나.”
쪼르륵.
루이스가 히나의 앞에서 찻잔을 들어 바닥에 쏟았다. 긴 물줄기가 눈앞에서 일직선을 만들며 조르르 떨어졌다. 카펫이 진한 색을 띠며 젖어들어 가는 것을 보며 히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오래된 찻잎으로 끓인 차를 마실 순 없지.”
루이스의 느릿한 목소리가 어쩐지 위협적이었다.
“폐하, 제 시녀가 오늘 피곤한 듯하군요. 이만 돌려보내고 폐하의 시녀를 시켜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차는 내 하녀가 가져온 신선한 찻잎을 써도 되겠나?”
독을 탄 것을 무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문을 다시 열어젖힌 첩자라니.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황제가 되기까지 수많은 위협을 받았지만, 이런 첩자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폐하의 뜻대로 하죠. 히나, 그만 돌아가렴. 오늘은 이만 쉬어도 좋단다.”
“네, 네!”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히나는 벌떡 일어났다. 딱딱한 걸음걸이로 나온 히나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굳이 카신 님 앞에서 폐하를 죽이지 않아도 되잖아. 최소한 지금의 티타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황제가 천하의 독재자라고 해도, 카신이 못된 마법사라고 해도, 방법이 너무 잔혹했다.
‘꼭 황제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애초에 받은 임무는 대마법서를 훔치는 것이기도 했고.’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핑계 같았지만, 들어주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카신은 눈앞에서 유일한 친우가 죽는 장면을 봤어야 했다.
이제는 돌아가지도 못한다. 카신은 몰라도 황제는 눈치가 빠르다고 했으니, 다시는 이런 방법으로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아까 이상하게 쳐다보던 호위들을 떠올리더라도 더는 독을 타는 건 무리였다.
‘분명 연구실에 있었으니까…….’
히나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문 앞을 지키는 근위대의 기사들이 보이지 않을 때쯤에 그녀는 카신의 연구실을 향해 뛰고 있었다.
조용한 곳에 위치한 연구실에 다다르자마자 히나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 눈치채기 전에 어서…….”
눈앞에 보이는 긴 지팡이를 확인하며 히나가 카신의 커다란 책상을 뒤졌다. 서랍을 차례로 여는 손이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제발…….”
몇 번이고 손잡이를 놓치길 반복하다 마지막 서랍을 열었을 때였다.
텅 빈 서랍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붉은색의 두꺼운 책. 끝에 달린 고급스런 자물쇠까지 확인한 히나는 곧 두꺼운 서책을 품었다.
“참, 지팡이도…….”
구석에 있는 지팡이까지 집어 든 그녀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뛰었다.
별궁에 여러 사람을 들였지만, 그래도 많은 수는 아니었다. 특히나 그 누구도 가장 끝에 있는 카신의 연구실과 그 옆에 붙어 있는 그녀의 개인 숙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선택지가 없어. 두 분을 내 손으로 죽일 순 없는 일이잖아.”
아무리 좋은 사람 같아도 황제가, 그리고 카신이 독재 정치를 펼치고 있다면 그건 막아야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눈앞에서 카신이 친우가 죽는 끔찍한 기억을 갖게 하지 않는 것까지였다.
히나가 본 카신과 황제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카신은 천성이 악하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면 공작님께서도 카신 님을 살려주실지도 몰라.’
황제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카신에 대해서는 가서 부탁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고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이라도 어떻게든 찾고 싶었다.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우비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히나는 품속으로 대마법서와 지팡이를 꼭 안은 채 뛰기 시작했다.
“네가 나를 싫어하고 도망가려 한다면 상처받을 것도 같구나.”
별궁을 빠져나가기 전, 히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짧은 시간 별궁에 닿았다.
“전 카신 님을 싫어하지 않아요. 하지만 도망가서 죄송해요.”
별궁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히나는 풀토 공작이 알려준 지하 비밀 장소로 뛰기 시작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성 밖과 연결시킨 지하도였다. 평소에는 그 누구도 드나들지 않았고, 알고 있는 사람도 극소수라고 했다.
‘이 길로 곧장 가면 풀토 공작님이 계신 곳에 도착할 거야.’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한 번이라도 발걸음을 멈춘다면 다시 되돌아갈 것 같아서였다.
‘나라를 위해서야. 아픈 아빠를 위해서야. 그리고…….’
억수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카신 님을 살리기 위해서기도 해.’
하지만 살리지 못할 확률이 크리라.
빗속을 뛰어가는 히나의 눈앞이 흐릿했다. 하지만 빗물 때문만이 아니었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건 비 때문이야, 비.’
눈가에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애써 무시한 채 히나는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황궁의 지하도와 연결된 곳은 마을 시장의 끝자락이었다. 크게 숨을 몰아쉰 그녀가 낡은 문고리를 잡아 암호대로 두드렸다.
똑. 똑똑똑. 똑똑.
얼마 있지 않아 막 잠에서 깬 것 같은 남자가 나왔다. 우비 모자를 머리 위로 완전히 뒤집어쓴 히나를 잠시 쳐다보며 확인한 남자가 곧 옆으로 비켜주었다.
“감사합니다.”
히나는 다급히 주방을 통해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몇 번이고 넘어지려는 몸에 힘을 준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 다급했다.
줄줄이 이어진 계단 밑으로 내려가자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공작님을 뵙고 싶어요. 대마법서랑 지팡이를 훔쳐 왔어요.”
“정말이냐? 어서 가서 공작님을 모셔오거라!”
“앨버트 님도, 다른 마법사도 전부 데려와야 한다!”
히나의 한마디로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얼마 있지 않아 항상 고귀한 분위기를 무겁게 풍기던 풀토 공작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절대 뛰지 않을 것 같은 풀토 공작이 히나 앞까지 단숨에 뛰어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저, 정말 가져왔다고?”
“네! 여기 있습니다.”
풀토 공작과 같이 티타임을 즐기다가 달려온 리처드 백작 또한 거친 숨을 내쉬며 히나를 바라보았다.
히나가 내밀고 있는 길고 끝이 뭉툭한 지팡이와 붉은 가죽의 두꺼운 서적이 그토록 바라고 찾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게 바로 대마법서?”
확실히 뭔가 있을 것 같은 서적이었다. 특히나 세월의 때를 탄 붉은 가죽이 더 그렇게 느껴졌다.
“공작님, 자물쇠가 걸려 있습니다.”
“앨버트!”
리처드 백작의 말에 풀토 공작이 마법사 앨버트를 불렀다.
앨버트는 풀토 공작이 가장 아끼는 최고의 마법사였다. 당연히 실력은 대마법사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지만, 그 어렵다는 황궁 마법사단을 어린 나이에 한 번에 들어갔다.
본래 풀토 공작이 대마법서를 훔치기 위해 보내려던 첩자는 앨버트였다.
하지만 아무리 황궁 마법사라고 해도 별궁에서 나오지 않는 카신의 얼굴을 보는 건 힘들었다. 황궁 마법사단 소속이라고 해도 별궁엔 들어갈 수도 없었고, 대마법서 존재의 유무조차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네가 한번 보거라.”
앨버트가 가까이 다가와 서적 겉면과 자물쇠를 훑어봤다.
“자물쇠에서 마법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커다란 문도 아닌 이렇게 작은 자물쇠에 꽤나 강한 구속 마법을 걸어놨군요. 역시 대마법사의 마법은 다릅니다.”
자물쇠에 손을 댄 앨버트가 몇 번이고 감탄했다.
“풀 수 있겠나?”
풀토 공작은 대마법서를 찾으면 가장 먼저 앨버트를 대마법사로 만들 생각이었다.
또 하나의 위대한 대마법사가 된 앨버트에게 방심하고 있는 카신을 죽이게 하고 황제를 바꾸면, 그때부터는 풀토 공작의 세상이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풀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걸리지?”
“자물쇠를 풀기는 어렵지만, 부수는 건 가능합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앨버트, 그럼 이 지팡이는 어떻지? 정말 이 안에 엄청난 힘이 들어 있는 건가?”
풀토 공작은 히나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거의 뺏듯이 가져와 앨버트에게 건넸다.
대마법사의 지팡이에 대한 소문은 무궁무진했다. 본 적은 있어도 그 누구도 직접 만져 보지 못했다.
다른 것도 아닌 카신이 항상 들고 다니며 애지중지하는 지팡이를 직접 만져 보며 앨버트는 연신 감탄을 했다.
“이것도 기묘한 마법이 걸려 있군요. 이 마법은 당장 알아내긴 힘들 것 같습니다.”
겉보기엔 평범한 지팡이였다. 하지만 그 안에 기묘한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손을 갖다 댔을 뿐인데도 복잡한 마법이 여럿 느껴졌다.
“그래도 따로 구속 마법은 없습니다. 당장에 쓸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역시 이 지팡이에도 비밀이 있었군.”
격앙된 목소리로 풀토 공작이 외쳤다. 희열에 찬 그의 눈동자가 광기에 번뜩였다.
앨버트가 곧 대마법서의 자물쇠를 다른 마법으로 부수기 위해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눈에 띄게 기뻐하는 풀토 공작에게 히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공작님, 그럼 저는 이제 부모님을 뵈러 갈 수 있는 거죠? 어디 계시나요? 아버지는 괜찮나요?”
어서 부모님을 보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은 것도 모자라, 몸까지 좋지 않다는 부친이 걱정되었다.
“아버지?”
그제야 풀토 공작의 시선이 히나에게로 향했다. 여태 옆에 있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눈이었다.
“큭큭큭!”
기대에 부푼 히나의 눈을 보며 풀토 공작은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뒤이어 크게 웃어대는 풀토 공작을 따라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따라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