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지트로 활용되는 이곳에서 히나가 이용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그들에게 히나는 버릴 패였다. 그녀에게 기대감조차 가진 적이 없었다.
필요 없으면 언제든지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게 내버려 두었을 아이. 이곳에서 히나는 웃음거리에 불과한 존재였다.
기대도 없던 어린 여자가 대마법서는 물론 지팡이까지 훔쳐왔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그렇다고 버릴 패가 쓸모 있게 되는 건 아니었다.
“입을 막아야겠지.”
한참을 웃던 풀토 공작은 곧바로 얼굴에 미소를 지웠다. 싸늘한 눈으로 히나를 향해 고갯짓을 하자 공작을 따라 비웃고 있던 이들 중 몇 명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고, 공작님!”
불길한 위험을 감지한 히나가 본능적으로 도망을 가려고 했지만, 상대는 풀토 공작이 아끼는 실력 좋은 기사들이었다. 발을 떼어 도망가기도 전에 히나는 기사들에게 양팔을 붙잡혔다.
“히나, 넌 참 잘해주었단다.”
히나의 턱을 잡고 올린 풀토 공작은 과장된 목소리로 칭찬을 건넸다.
“고, 공작님, 제 부모님은…….”
“네 부모? 네 부모를 왜 내게 찾는 거지?”
“공작님께서 제 부모님을…… 읏!”
턱이 부러질 것처럼 꽉 잡은 풀토 공작의 힘에 히나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잘해주었지만, 이제 더는 쓸모가 없어. 그러니 그만 사라져 줘야겠구나.”
“고, 공작님?”
“어차피 목숨을 걸고 한 임무가 아니더냐? 여기서 목숨을 끊으면 되겠군.”
“그, 그게 도대체 무슨…….”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히나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천한 네게 부모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분명 제게 부모님이 계시다고 했잖아요!”
히나에게 풀토 공작은 항상 나라와 가난한 백성을 생각하는 참된 귀족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히나의 눈에 보이는 건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였다.
“네 부모라면 여기 있지 않니? 태어나자마자 비 오는 날 부모에게 버려진 널 키운 건 바로 나다.”
“버, 버려졌다니…….”
풀토 공작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세상을 다 가졌다는 오만에 휩싸인 눈이었다.
“내게 키워준 은혜도 갚았으니, 이제 편히 죽으려구나.”
“공작님! 공작님!”
그만 데리고 가라는 듯 풀토 공작은 손을 휙휙 저었다.
히나의 눈이 절망으로 뒤덮였다. 다리 끝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소용없었다. 질질 끌려가는 히나가 간절히 풀토 공작에게 외쳤다.
“마법사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잘못된 명령을 내리긴 해도, 폐하도 나쁘게 보이진 않았어요! 공작님, 제 말을 더 들어주세요!”
자물쇠를 풀고 있는 앨버트에게 가던 풀토 공작이 히나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히나를 끌고 가던 기사들을 손짓으로 멈추게 한 그가 그녀를 한껏 비웃었다.
“대마법사는 황제의 부탁으로도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어.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일도 당연히 없지. 현 황제 루이스도 명군이라 소문이 자자하고 말이다.”
“그럼 왜……?”
“왜 대마법사를 없애고 황제를 바꾸려 했냐고?”
현 황제, 루이스 사이어 카를로스는 제국을 사랑하고 백성을 깊이 생각했다. 그는 귀족이 아닌 백성을 위해 손수 법을 뜯어고쳤다.
귀족에겐 단호하면서도 백성들에겐 넓은 아량을 보여줬다. 풀토 공작이 새 황제로 세우려고 하는 제이스 사이어 카를로스와 다르게 말이다.
“귀족들의 돈을 뜯어내어 백성을 살피면 우리는? 나는 어떻게 살라는 거지?”
귀족이 군법과 규율을 피해 돈을 버는 건 다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물며 영지의 세금을 과도하게 올릴 때마다 제재를 가하며 재산을 몰수했다. 덕분에 루이스가 황제가 된 후로는 들키지 않게 찔끔찔끔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황제가 된 지 고작 얼마 되지도 않은 애송이다! 그딴 애송이를 갈아치우려고 해도 뒤에 대마법사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여태껏 대마법사와 정기적으로 교류를 하는 황제는 없었다. 별궁에만 있는 카신은 천재지변으로 세상이 흉흉할 때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나라가 심각한 상황에 도래하여 황제가 몇 번이고 부탁을 해야만이 겨우 밖에 나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하지만 루이스가 황제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아니었다. 수십 번을 부탁해야 귀찮다는 얼굴로 처리를 해주는 건 같았지만, 일을 해결해 주는 횟수는 몇 배로 늘었다.
과거에 카신이 황제를 몇 번이나 도와주고 어느 정도 교류를 했는지 잘 모르는 귀족들은 그 모습에도 무례하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대마법사에 대해 오랫동안 조사를 해왔던 풀토 공작은 그 관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폭우를 막은 일도 마찬가지였다. 루이스가 직접 찾아가 부탁을 하자마자 카신은 잘 나오지도 않았던 별궁에서 친히 나와 일을 해결해 주었다.
덕분에 상황은 큰 피해 없이 끝이 났고, 또다시 루이스는 백성들에게 명군이라 칭송받았다.
“그놈이 오랫동안 황제를 한다면 내 가문은 피가 말라 죽을 거야!”
오래전부터 더러운 수를 써서 돈을 모으던 풀토 공작은 루이스가 즉위를 하자마자 눈 밖에 나 있었다.
루이스는 풀토 공작이 하는 모든 사업을 살피며 조금만 이상하면 즉각 중지시키고 철저히 조사했다. 얼마 전 영지민들에게 세금을 올려 받던 것도 들켜 벌금으로 큰돈을 물어야 했다.
말을 하면서 분노가 치밀었는지 풀토 공작의 얼굴이 벌게졌다. 큰 보폭으로 다가온 풀토 공작은 마치 히나가 황제라도 된다는 듯 쏘아보았다.
“천것들은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죽는 것이 마땅한 것이야. 너처럼 말이다.”
“공, 공작님……. 공작님께서는 가난하고 살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귀족…… 아!”
짝!
뺨에 불이 난 것 같았다. 고개가 끝까지 돌아가고, 몸이 휘청거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힘에 못 이겨 쓰러지려는 히나의 몸을 풀토의 기사들이 양쪽에서 꽉 잡았다.
“너 같은 것들과 태생부터가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우월한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이 너 같은 것들의 천명이란 말이다.”
충격에 빠진 히나를 본 척도 하지 않으며 풀토 공작은 손을 휙휙 저었다. 그만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내게 은혜를 갚아줬으니, 상으로 죽을 때는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여주거라.”
“예, 공작님!”
“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시신을 태우는 걸 잊지 말거라.”
“예!”
풀토 공작이 자신을 어떻게 죽일지에 대해 명령을 해도, 히나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도대체 난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그녀는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에 대한 죄책감과 그로 인해 앞으로 바뀌게 될 미래에 절망했다.
* * *
“참으로 어리숙해.”
차를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새로 차를 내렸지만, 방금 전까지 독이 든 차를 본 참이었다. 처음부터 히나가 준 차에 독이 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꺼림칙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믿을 만한 직속 시녀가 직접 차를 타주었지만, 루이스는 찻잔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식어가는 찻잔을 응시한 채 루이스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아직도 어리숙한 시녀가 차를 마시지 말라 외치고 간 것이 믿기지 않았다.
“설마 찻잎 핑계를 대며 못 먹게 할 줄이야.”
“재밌지 않습니까?”
카신이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최근 자주 보게 된 카신의 미소를 보며 루이스는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래서, 흥미가 도나?”
루이스가 카신에게 가끔 찾아오는 건 어떻게든 잘 보여 이득을 취하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보다는 매일 같이 무료하다는 카신 때문이었다.
“모든 게 지루합니다. 하물며 전쟁을 지켜보는 것도,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갈라지는 것도.”
태자 시절, 어째서 별궁에만 있냐는 어린 루이스의 질문에 카신이 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널 지루하지 않게 도와주마! 그럼 너도 내가 명군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거야!”
어린 루이스는 호기롭게 외쳤다. 무표정했던 카신의 얼굴에 잠시 표정이 깃들었을 때만 해도 자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의 자신감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도록 하지요. 전하께서 얼마나 절 지루하지 않게 만들지 기대하겠습니다.”
그건 카신의 거짓말이었다. 잠시나마 흥미를 주었던 태자에 대한 배려였다. 그는 기대를 하지도 않았고, 기다리지도 않았다.
카신이 자신을 꽤나 편하게 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순간의 흥미를 보였던 그때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시녀는 지루하지 않아?”
루이스는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생생한 카신의 대답을 떠올리며 물었다.
“지루하지 않습니다.”
미소를 띤 얼굴로 대답하는 카신을 보자마자 루이스는 말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태 본 표정 중에서도 가장 생기로웠다.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다.
“그거 잘됐군.”
카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스가 그 모습을 보며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카신의 행동은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히나와 관련된 일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일단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것들을 처리하고 오도록 하죠.”
카신의 눈이 빗방울이 거세게 두드려 대는 창문으로 향했다. 세찬 빗줄기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그는 창밖, 어느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산 채로 데려오게.”
묻지 않아도 카신이 어디로 갈지 알고 있다는 듯 루이스는 태연했다.
“원하신다면.”
“흐음, 말 잘 들으니 좋구만.”
루이스의 얼굴이 한껏 펴졌다. 평소라면 능글맞게 거절하고도 남았을 텐데.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하는 카신을 보니 앞으로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어차피 제가 데리고 있겠다고 하면 주변 먼저 다 치우게 할 셈 아니었습니까?”
“물론이지. 그런데 그 시녀는 방으로 돌아간 게 아닌가?”
“아무리 서툴러도 자기가 폐하 앞에서 실수한 건 알고 있습니다.”
대마법서라 속인 책 안에는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다. 히나가 나간 순간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가짜 대마법서의 행방은 당연히 카신도 아는 곳이었다.
“오호, 그런가? 첩자로는 영 쓸 만한 구석이 없는 줄 알았더니…….”
“저도 그 말에는 동감합니다만……. 쏜살같이 도망간 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는 뜻이겠지요.”
도망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건만.
카신은 빠르게 이동하는 가짜 대마법서의 움직임에 혀를 찼다. 별궁을 나갈 때만 해도 망설이는 것 같더니, 지금은 그것도 아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처럼 그의 기분이 점차 가라앉았다.
“꽤 소란스러울 겁니다. 살려두시라고 했으니, 시끄러운 곳으로 병사들을 보내주십시오.”
“자네 위치를 어떻게 알고? 폭발이라도 일으킬 셈인가?”
“못 할 것도 없지요. 물론, 구석에 있는 곳이었으니 민가에 피해는 없을 겁니다.”
“뭐, 그렇게 말한다면 허락하지. 그럼 잘 다녀오게.”
카신의 몸 전체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은회색의 연기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볼 때마다 카신이 마법을 쓰는 모습은 신비로웠다. 그는 황궁 마법사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마법을 구사했다.
계속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카신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여간 신출귀몰하기는.”
루이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카신이 출발했으니, 어서 병사들을 대기시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