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루이스 앞에서는 여유로운 것처럼 굴었지만, 카신은 다급했다. 카신의 눈이 방금 전에 히나가 들어갔을 것이라 예상되는 허름하고 낡은 주점의 문을 보며 깊게 가라앉았다.
“여긴가.”
바로 아래에서 가짜로 만든 대마법서의 기운이 느껴졌다. 히나도 분명 이곳 지하에 있으리라.
마법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서 가장 간단한 위치 추적 마법을 걸어놨다. 좌표가 가리키는 곳은 지금 있는 자리의 아래였다. 여기서는 스스로 걸어가야 했다.
카신은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 같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생각 외로 튼튼한 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암호가 있다는 건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이런 것으로 그를 막을 순 없었다.
톡톡.
그가 문고리를 손끝으로 두 번 건드리자 찰칵, 하며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누, 누구냐!”
텅 빈 가게 안에서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다리를 올린 채 홀로 졸고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열린 문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계속 잠들어 있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 같군.”
“뭐? 어떻게 들어…….”
탁.
두 손가락을 튕기자 남자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카신은 그 남자를 지나쳐 느긋하게,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꽤 잘 만들었어.”
주방을 통해 비밀 문이 있었다. 카신은 한없이 차가운 얼굴로 지하로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가짜 대마법서와 꽤 가까워졌을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많은 기척이 문 건너편에서 느껴졌다.
“그래도 내게 은혜를 갚아줬으니, 상으로 죽을 때는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여주거라.”
“예, 공작님!”
“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시신을 태우는 걸 잊지 말거라.”
“예!”
문손잡이를 잡고 열려던 카신의 손이 우뚝 멈췄다. 오래된 나무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벌컥.
손잡이를 잡지도 않았건만 문이 바로 앞에서 알아서 열렸다. 히나를 양쪽에서 잡고 문을 연 기사 둘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런, 내가 열 생각이었다만…….”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두 기사와 달리 카신은 태연했다.
자포자기라도 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히나가 눈앞을 가로막는 그림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신 님……?”
눈이 마주치고도 믿기지 않는 듯 히나는 작은 목소리로 카신을 불렀다. 히나를 잡고 있던 기사들이 재빨리 그녀를 바닥에 밀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푸, 풀토 공작님! 대마법사가……!”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카신을 향해 다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풀토 공작은 놀란 눈으로 문 앞에 멀뚱히 서 있는 카신을 쳐다보았다.
별궁이 홍수에 잠긴다고 해도, 벼락이 친다고 해도, 지진이 나서 완전히 무너진다고 해도, 나오지 않을 사람이었다. 풀토 공작은 믿기지 않은 눈으로 얼마 전 파티장에서 본 카신의 얼굴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아야…….”
카신의 시선은 요란하게 칼을 꺼내 겨누는 기사들 사이로 바닥에 넘어진 히나에게 향해져 있었다. 그가 그들 사이를 제치고 큰 보폭으로 히나에게 걸음을 옮겼다.
온갖 소문으로 인해 쉽사리 다가가지 못한 기사들은 카신이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뗄 때마다 두어 발씩 물러나며 경계를 했다. 몇몇 검 끝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어, 어서 피하세요, 카신 님!”
칼을 겨누는 기사들 사이에서 제 발로 들어온 카신을 보며 히나가 다급히 외쳤다.
“카신 님?”
도망가라는 다급한 목소리에도 카신은 태연히 무릎을 굽히며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어서 피해…….”
“다쳤구나.”
카신의 시선이 터진 입술로 향했다.
이건 분노였다. 자신의 것을 누군가가 함부로 손을 대고, 상처를 입혔다. 히나와 마주한 채 카신은 차분한 얼굴로 분노했다.
“앨버트!”
풀토 공작은 다급히 앨버트를 불렀다.
내로라하는 기사들이 검을 겨누고 있다고 해도 상대는 대마법사였다. 검을 쓰는 기사들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대마법사를 처리할 수 있는 건 같은 마법사였다.
“푸, 풀었습니다!”
앨버트가 자물쇠가 풀린 붉은 가죽의 대마법서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카신에겐 지금 지팡이가 없었다. 거기다 대마법서는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 사실에 풀토 공작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도, 도망가세요, 카신 님!”
엉덩방아를 찧은 채 널브러져 있던 히나가 벌떡 일어나며 카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작은 체구로 양팔을 쭉 펼치며 어떻게든 그를 보호하려는 히나의 뒷모습이 참으로 듬직했다.
카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한순간 피었다가 사라졌다.
“제, 제가 막을 터이니, 어서 도망치세요!”
감히 그 누가 자신을 보호하려 몸을 내던질까.
카신은 시야를 가로막는 작은 체구의 여자를 뒤에서 천천히 감상했다.
히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겁은 많으면서도 당돌하게 막아서는 그녀를 보니 그나마 솟아오른 분노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순 없지.’
자신을 향하는 칼날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카신은 무릎을 펴며 느긋하게 일어났다. 신비로운 연노란 눈동자가 리처드 백작을 지나 풀토 공작에게 향했다.
“리처드 백작이 내게 너를 보낸 거라 여겼는데. 배후는 풀토 공작이었나.”
카신은 픽 웃었다.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로 왔고, 이제 자신의 것이 되었다.
“앨버트! 저놈을 죽여! 목숨이 질긴 놈이니 단번에 죽여야 한다!”
앨버트가 지팡이를 든 채 대마법서를 펼쳤다. 그리고 그 안에 새겨진 신비로운 진의 모양에 눈을 크게 떴다.
“고, 공작님!”
“그래, 어서 대마법서에 적혀 있는 마법으로 저놈을 죽이거라!”
“이, 이건…….”
앨버트의 얼굴에 절망이 피었다.
“이건 위치 추적 마법입니다!”
앨버트가 알고 있는 보통의 위치 추적 마법진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하게 달랐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앞에 있는 마법진은 위치를 나타내는 마법이었다.
“위치 추적?”
“분명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법 서적을 받자마자 앨버트는 위치 추적 마법의 기운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대마법서 자체에는 마법을 건 흔적조차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서적 안에 빛나고 있는 마법진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위치 추적 마법의 흔적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황궁 마법사가 된 건가? 실력이 알 만하군.”
한참 하류 취급을 하는 카신의 목소리에 앨버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릴 때부터 엄청난 인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남들보다도 더 강한 마력을 갖게 되었고, 최고만이 모인다는 황궁 마법사단에 들어가서도 칭찬을 끊임없이 들었다.
“당신도 대마법서에 의지한 주제에!”
카신에겐 지팡이가 없었다. 앨버트는 자신 있었다.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지는 당장 알 수 없었지만, 대마법서가 없어도 지팡이가 있으면 어느 정도 카신과 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공작님! 비키십시오!”
앨버트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큰 마력을 집어넣었다. 카신에게 칼을 겨누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슈우웅.
지팡이 주위로 푸른색의 빛이 일어나고, 곧 그 푸른 기운이 모이며 카신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카신에게로 도달하기도 전에 그 빛은 허공에서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래, 그 대마법사의 지팡이로 어서……!”
앨버트만 믿고 있던 풀토 공작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사라진 마력처럼 뚝 끊겼다. 앨버트가 눈을 크게 뜨며 지팡이와 카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어?”
양팔을 벌려 카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히나가 마법이 시행되자마자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카신이 뒤에서 한 손으로 히나의 어깨를 감싸며 보호하듯 꼭 끌어안았다.
“그건 꽤 강한 마력 억제 마법이 걸려 있단다. 애송이의 마력으로는 지팡이로 마법을 구현할 수 없지.”
무거운 정적을 깨며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카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리 없다. 이건 대마법사가 애지중지 갖고 다니는 지팡이였다. 저 말은 자신을 속이고 다시 지팡이를 빼앗으려는 계략이리라.
당황한 앨버트가 곧 허둥대며 몇 번이고 지팡이에 마력을 부어 넣었다.
슈우욱.
물을 먹는 스펀지처럼 지팡이가 마력을 흡수했다. 지팡이를 쥐고 있는 손에 제대로 된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앨버트, 뭐 하는 게냐! 그 지팡이는 대마법사의 지팡이잖아!”
“그, 그게…….”
카신이 거짓말을 한 거라 여긴 풀토 공작이 성을 내며 소리쳤다.
앨버트는 몇 번이고 마력을 이끌어냈지만, 하면 할수록 푸른빛의 마력은 힘을 잃고 사라졌다. 이제는 푸른빛이 나오지도 않았다.
“카, 카신 님…… 도대체 어떻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히나가 입술을 뻐끔거리며 이곳 모두가 하고 싶은 질문을 했다.
“저건 과도하게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용도지. 저게 아니면 가끔 나도 모르게 과하게 큰 마법을 쓰거든.”
친절한 설명에도 전혀 알아듣지 못한 얼굴로 히나는 무작정 고개만 끄덕였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카신의 시선이 멍한 얼굴로 계속해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히나에게서 다시 앨버트에게 향했다.
“내 손에 저것이 없으니 힘을 주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군.”
연노란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