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20화 (20/128)

#20.

화아악―

주변에 형형한 색의 빛이 일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형형하게 일어난 빛이 두 사람을 덮쳤다.

별궁 안, 익숙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카신은 히나의 눈을 가린 천 자락을 풀러주었다.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는 히나의 눈이 처음 본 곳이라도 되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 생각했던 히나의 두 눈에 곧 눈물이 맺혔다.

“폭발음이 여기까지 들리더군. 그래, 자네 시녀는 무사한가?”

“보시다시피.”

히나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루이스는 식어버린 찻잔을 앞에 둔 채 소파에 다리를 꼬고 편히 앉아 있었다.

마치 아까 카신과 루이스에게 차를 내어주고 응접실 앞에 대기를 하고 있을 때로 돌아온 것 같았다.

“배후는 누구던가?”

“풀토 공작입니다.”

“살려뒀나?”

“한 명을 제외하곤 잔챙이들까지 모두 살려두었습니다.”

루이스는 그 한 명을 어째서 죽였는지, 왜 죽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애초에 전부 살려두라 했지만, 기대도 하지 않고 한 명령이었다.

명령도, 부탁도 없이, 카신을 직접 움직이게 했다. 어찌 보면 풀토 공작은 다른 의미로 대단한 일을 해냈다. 그 안에서 사상자가 한 명이 나왔다는 건 다행인 일이었다.

“그럼 그들을 통해 리처드 백작까지 줄줄이 잡아내면 되겠군.”

히나를 카신의 시녀로 잠입시킨 건 리처드 백작이었다. 아마 풀토 공작과 리처드 백작을 제외하고서라도 여러 귀족들이 얽혀 있을 것이다.

루이스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쯧, 그러게 왜 나가서 맞고 오고 그러나?”

루이스는 붉은 뺨과 터진 히나의 입술을 보며 혀를 찼다. 카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아이라 그런지 괜히 신경이 쓰였다.

“폐, 폐하!”

히나가 다급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카신, 자네 시녀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것들을 전부 회수해 가고 싶은데……. 증거 자료가 필요해서 말이야.”

“이미 히나의 숙소를 뒤지고 있지 않습니까.”

“뭐, 자네가 허락할 것 같아서 명령을 미리 해뒀을 뿐이라네.”

능청스럽게 빙긋 웃은 루이스는 일어나 히나의 앞까지 다가왔다. 푹 젖은 몸은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비에 젖은 생쥐 꼴로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 카신을 만났을 때처럼 루이스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본래 모반을 계획한 것만으로도 네 목숨은 물론, 네 주변까지 샅샅이 찾아 숙청을 해야 하지.”

마음처럼 순한 눈망울을 하고 있는 히나는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그걸 모를 정도로 루이스는 어리석고 눈치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용서되는 건 아니었다.

“목숨까지 걸고 대마법사의 시녀로 들어온 이유가 뭐지?”

“폐하, 히나는…….”

“자네는 가만있게. 난 자네의 시녀이기 전에 내 백성이기도 한 이 아이에게 묻는 것이야.”

카신의 눈썹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하지만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부, 부모님이 힘들고 아프시다고 해서…….”

명군.

풀토 공작은 황제가 명군이라고 해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잘못된 황제가 아니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히나의 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폐, 폐하께서 제, 제가 사는 마을에 세금도 마구 올리고 못살게 괴롭히는 폭군…… 그, 그러니까 나쁜 사람인 줄 알고……. 저, 저는 정말로 그런 줄 알고…….”

두서없는 문장이었지만 히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풀토 공작이 세금을 올리고 영주민들을 괴롭힌다는 말을 자주 듣긴 했네. 나를 사칭하여 벌인 일은 빨리 알아채지 못한 나의 잘못이 크지.”

“그, 그렇지 않아요! 폐하께서는 명군이시고, 또 제가 그걸 모르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더듬는 히나의 모습은 볼만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비는 것 같았다. 분명 여인이건만, 그의 눈에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루이스는 여자의 눈물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아이가 흘리는 눈물은 꽤 좋아했다. 황태자 시절, 한참 어린 누이를 놀릴 때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취향이 이런 건가?’

루이스의 시선이 힐끗, 카신에게 향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카신을 보며 루이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이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루이스는 다시 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명군이라. 다른 건 몰라도 그 말은 참 듣기 좋구나.”

“소, 송구합니, 딸꾹!”

이제는 딸꾹질까지 하는 히나는 영락없이 몸만 큰 아이였다.

항상 목적을 숨기고 다가오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루이스는 보기 드물게 아이처럼 순수함을 지닌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어리숙한 시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눈앞에 있는 히나는 조만간 시녀라고 불리기 애매해질 것이다. 그를 황제까지 만들어준 예리한 감이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비록 모반을 꾸민 것은 죽어 마땅하지만, 그 덕에 카신이 직접 나서서 배후를 찾아내 주었다. 뿌리를 뽑아내는 귀찮은 일이 생기긴 하겠지만, 그로 인해 향후 몇 년은 편해질 것이다. 오히려 더 이득을 불러온 셈이었다.

“그래서, 네 부모는?”

“어, 없었습니다!”

“그것 참 안됐군.”

히나의 얼굴에 깊은 슬픔이 드러나자마자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루이스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히나 양, 그대는 내 첩자로 하지.”

“네, 저는 나쁜 첩자였…… 네?”

“이번 일은 그냥 넘기지 않을 거네. 카신의 곁에 있다가 이용을 당했단 걸 깨닫고, 내게 밀고를 해서 이중첩자 역할을 했다고 치지.”

정치적인 문제는 복잡했다. 아무리 어리고, 착하고 순해도, 그 이유만으로 죄를 용서받을 순 없었다. 갓난아기라도 역적의 가족이라면 죗값으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히나에게 부모가 없어 다행이었다. 부모로 인해 협박을 당하거나 이용을 당했다고 하면 빼내기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 루이스는 귀찮은 건 질색이었다.

“그럼 전…….”

“표면적으로 죄는 묻지 않겠다. 표면적으로는 말이지.”

싫고 말고를 떠나 히나를 잡아두면 카신을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능구렁이 같은 카신이 쉽게 이용당할 상대는 아니었지만, 히나로 인해 더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그녀와 친목을 쌓아야 한다.

“하지만 날 배신한 죄는 개인적으로 묻고 싶네만.”

“주, 죽여주십시오!”

바닥에 머리를 쿵 찧으며 히나가 용서를 구했다.

“죽이는 건 좀 그렇고.”

루이스는 옆에서 죽자고 노려보는 무언의 압박을 무시했다. 시선이 따갑게 날아왔지만, 그는 다행히 얼굴이 두꺼운 편이었다.

“죄를 묻는 대신.”

앞으로 히나와 주고받을 대화는 카신이 원치 않는 말일 것이 분명했다. 카신이 그 기회를 끊기 전에 루이스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나와 말벗이 되어주지 않겠나?”

“마, 말벗이요? 제가 어찌…….”

살며시 고개를 드는 히나를 앞에 두고 루이스는 한탄 어린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내 주변은 풀토 공작처럼 날 이용해 먹으려는 교활하고, 악독한 사람들이 넘쳐 나지.”

사람을 이용해 먹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선천적으로도, 후천적으로도 그 능력에 무척이나 특화되어 있었다.

“벗 하나 없는 내게 아무런 목적도 없이 말동무를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네.”

슬픔을 억누르는 묵직한 목소리였다. 히나의 두 눈에 곧 안쓰러움이 드리웠다. 루이스는 기쁜 내색을 철저히 숨기며 힘없이 말했다.

“이제는 가족으로 협박을 당할 리도 없고,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알지 않느냐. 그러니 순수한 의도로 가끔 내게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주지 않으련?”

비록 상대는 순수한 의도가 아니지만 말이다.

루이스는 속말을 삼키며 최대한 애처로운 목소리를 냈다. 황태자 때를 제외하곤 이 목소리를 내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저라도 필요하시다면 불러주십시오, 폐하!”

옆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끝까지 그 시선을 무시했다.

앞으로 히나가 가는 길에는 항상 카신이 있으리라. 루이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히나를 옆에 두면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순진한 얼굴로 다른 목적이 뚜렷하게 숨겨진 제의를 확 물어버리는 히나를 보며 루이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부모는 없었다. 당연히 형제도 없다. 비 오는 날 집 앞에 버려진 갓난아기라고 했다.

가족을 만날 생각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만큼 슬픔은 배가되어 되돌아왔다.

“히나 님. 대마법사님께서 부르십니다.”

“네, 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시녀들은 히나에게 존칭을 하고 있었다.

“마법사님께서는 연구실에 계십니다.”

히나는 익숙한 방향으로 뛰다시피 빠르게 걸었다. 차라리 일이라도 잔뜩 하고 싶었다.

똑똑.

작게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평소보다도 더 어질러진 책상 위에서 카신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병에 그의 눈동자처럼 예쁜 보랏빛의 액체를 담고서 흔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왔구나.”

아직 사과도 하지 못했다. 너무 정신이 없었다. 그만 돌아가서 쉬라는 카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신을 잃었다. 고개를 들 면목도 없었다.

카신의 마법으로 잠이 들었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히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모든 것이 그녀의 불찰이었다. 어리석은 판단으로 성군을, 대마법사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했다. 다행히 모든 일은 카신이 다 해결해 주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한 손에 보랏빛 액체가 든 병을 든 채 카신이 돌아보았다. 왠지 평소보다도 그 모습이 더 멋있게 느껴졌다.

눈을 가리고 있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바로 옆에서 어제 그 끔찍했던 힘을 느꼈음에도 그가 무섭지 않았다.

“내 허락도 없이 궁을 빠져나간 것 말이냐.”

“그건…….”

“다음부터는 허락 없이 빠져나가면 안 된다. 너는 내 사람이지 않느냐.”

잘못은 그게 아닌데. 중요한 것은 다른 건데.

하지만 카신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앞까지 걸어와 보랏빛 액체가 들어 있는 병을 내밀었다.

“……이건 뭔가요?”

아름다운 꽃에 독성이 있듯이, 예쁜 빛깔의 약물은 뭔가 위험해 보였다. 차마 잡지 못한 채 가만히 보고만 있자 카신이 빙긋 웃었다.

“먹어볼래?”

병이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꿀꺽.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보랏빛 액체가 반짝반짝 빛났다.

갑자기 유리병 안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액체가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카신의 신비로운 마법을 보고 있는 것처럼 정신이 멍해지며 홀리는 기분이었다.

“먹어도 되는 건가요?”

어느새 히나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 걸 보며 카신은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병에는 식욕을 돋게 하는 마법을 걸어두었다. 들고 있는 것이 독약이라고 해도 이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진 못하리라.

“물론.”

대답과 함께 카신은 유리병을 히나에게 내밀었다. 홀린 눈을 한 채로 쫄래쫄래 다가온 히나가 두 손으로 유리병을 받았다.

“너무 예뻐요.”

향긋한 꽃내음이 나는 것도 같았다. 병을 받자마자 히나는 유리병을 입에 갖다 대며 입술을 축였다.

잠시 카신의 눈치를 한 번 보는 것도 같았지만, 히나는 곧 망설임 없이 전부 마셨다.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런데 이건 뭐예요?”

순식간에 다 마셔 버린 것이 아쉬운 것인지 히나가 손끝으로 병의 표면을 몇 번이고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보니 심술궂은 마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아무리 마법에 걸렸다고 해도, 대상이 물건이라고 해도, 그녀가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아아, 사랑의 묘약. 그건 사랑의 묘약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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