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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21화 (21/128)

#21.

“아, 이게 바로 사랑의 묘약이…… 네? 사랑의 묘약이라고요?”

익숙한 약물의 이름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히나가 뒤늦게 약효가 뭔지 상기하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척 놀란 모양인지 손에서 힘이 빠지며 유리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병을 떨어뜨리면 안 되지.”

바닥에 닿기 직전에 병은 허공에서 멈췄다. 카신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허공에 머물러 있던 병이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평소라면 신기함에 박수를 치며 놀라워했을 테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그의 기묘한 마법은 들어오지 않았다.

“서, 설마…… 이걸 마신 사람은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던가, 그런 건 아니죠?”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는구나.”

질끈. 히나가 다급히 눈을 감았다.

가볍게 대답하는 카신과 달리 히나는 온갖 시름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참 늦은 걸 알면서도 뒤늦게 눈을 감으려는 그녀의 부단한 노력을 보며 카신이 소리 내어 웃었다.

“방금 전까지 나와 눈을 마주친 걸로 아는데. 이미 늦었다고 생각되지 않니?”

상대는 대마법사다. 아마 마시자마자 약효가 진행됐을 것이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히나는 질끈 감은 눈을 살며시 떴다.

“저,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혹시 벌?

황제가 벌을 내린 것과 달리 카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장 피해를 입은 건 그임에도 불구하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려면 날 사랑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카신이 무척 얄미워 보였다. 히나는 잠시 새초롬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다 곧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어떤 벌을 받아도 쌌다.

“아, 아무리 제가 잘못했다고 해도…….”

정말 사랑의 묘약 효능이 오는 걸까?

햇빛에 비치는 카신이 잘생겨 보이기도 했다.

카신을 사랑하게 됐다고 깨닫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쿵쾅쿵쾅 뛰어댔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지는 것도 같았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순진해도 너무 순진한 게 아닐까?

눈물까지 매달며 원망스런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는 히나를 보며 카신은 웃음을 삼켰다.

“네가 타준 차를 마시고 싶구나.”

말을 딱 잘라 끊어버리자 히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하러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유리병을 책상 위에 탁 올려놓았다.

“순진하기는.”

묘약이라고 한 건 거짓말이었다. 일종의 벌이기도 했다.

큰 걱정을 시킨 것도 모자라 다치기까지 한 것에 대한 벌. 얼떨결에 튀어나온 말이긴 하나, 이런 심술 정도는 부려도 되지 않나 싶었다.

“정말 사랑의 묘약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마법이나 약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를 극복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그녀에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자신의 힘으로 얻고 싶었다.

“이러니 놀리지 않을 수가 있나.”

히나가 마신 건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약이었다. 어서 나았으면 하는 마음에 오랜만에 정성들여 만든 약이니, 상처는 금방 나으리라.

히나의 부어오른 뺨과 터져 버린 입술이 계속 거슬렸다. 계속 두었다가는 다시 분노가 치솟아 기껏 살려두었던 풀토 공작 일행을 전부 말살시킬지도 모른다.

“차, 차를 가지고 왔어요.”

히나의 얼굴에 보이는 깊은 그늘에 카신은 픽 웃었다. 생각보다 과한 반응에 심술이 더 솟아올랐다.

이건 벌이니까, 결코 알려주지 않으리라.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알게 될 테지만, 그는 히나가 직접 깨달을 때까지 말할 생각이 절대 없었다. 이 반응을 최대한 오래 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폐하께서 오고 계시다고…….”

차를 준비하면서 기별을 들은 모양이었다. 아직도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의 반응을 티 나지 않게 살피며 카신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알고 있단다.”

별궁 안에 들어오는 기운은 진작 알 수 있었다. 어제 왔으면서도 또 오는 루이스가 탐탁지 않았지만, 지금은 별수 없었다.

“저기…….”

아까부터 밖으로 나가지 않은 히나가 안절부절못한 채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카신은 모른 척 차를 마시다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니?”

“약효를 없애는 방법은 없나요?”

“무슨 약효?”

히나는 울상을 지었다. 힘겹게 꺼낸 말을 허탈하게 받아치는 카신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그가 얄미웠다. 하지만 지금 아쉬운 사람은 그녀였다.

“사랑의 묘약이요!”

의식하기 시작하니, 끊임없이 그에게 시선이 갔다. 원래도 수려한 얼굴이었지만,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고, 심장이 뛰었다.

‘그러고 보니 전부터 자주 이랬지.’

히나는 전에도 그가 자신의 음식에 뭘 탄 것이 확실하다고 단정 지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계속 이렇게 시선이 가고, 보고 싶을 이유가 없었다.

“아하, 사랑의 묘약 말이지.”

카신은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심각한 히나의 얼굴이 참으로 재미있었다.

“의지가 강하면 그 약효를 떨쳐 낼 수도 있단다. 어디 한번 떨쳐 내보지 그러니.”

“그, 그런……!”

낭패 어린 얼굴에 카신은 너무 심한 장난은 그만두기로 했다. 계속 장난치면 히나의 성격상 몇 날 며칠을 끙끙 앓고 고민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고민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게 되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그 약은 네가 도망갈 때만 효능이 나타나지. 왜? 아직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니?”

“아, 아니에요!”

차라리 벌을 주지!

히나는 그런 어마어마한 약을 먹여놓고서 태연히 말을 하는 카신이 미웠다. 하지만 도망이란 단어 하나에 더 원망할 수도 없었다.

‘정말 아직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 걸까? 이제 돌아갈 곳도 없는데? 그 마음이 정말 없어지면 사랑에 빠지지 않게 되는 건가?’

원래 사랑의 묘약이란 것이 이렇게 까다롭고 조건이 많나 싶었지만, 히나는 차마 카신이 만든 약을 의심하지 못했다.

“네가 도망가지 않는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단다. 그러니 어서 마음을 다잡으렴.”

“네, 네! 죄송합니다, 카신 님!”

긴 손가락으로 우아하게 찻잔을 드는 카신을 보며 히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딘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숨기기 위해.

“폐하께서 성 안으로 들어오셨구나. 응접실로 내오는 차는 다른 시녀를 시켜주련?”

루이스와 히나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그녀를 루이스와 떨어뜨리기 위해 카신은 다른 시녀를 불렀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능구렁이 같은 루이스를 볼 생각에 벌써부터 피곤함이 몰려왔다.

* * *

“어째서 제 시녀가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거지요?”

카신은 셋이서 갖게 된 티타임에 언짢은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일부러 다른 시녀에게 차를 내어달라 시켰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루이스는 히나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직접 불렀다.

“뭘 그런 걸 따지고 그러나. 자네는 이런 것에 관심이 없질 않나?”

미묘한 신경전에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히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째서 이렇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신의 말대로 다른 시녀에게 차를 내달라 시키고 시무룩한 얼굴로 숙소에 돌아갔다.

하지만 루이스의 시녀가 직접 그녀를 부르러 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다.

“당연히 자네 시녀가 이곳에 있어야지. 나는 자네가 아니라 히나 양을 보러 온 것이니까.”

“절 말씀입니까?”

“그렇지. 나와 벗이 되어준다고 하질 않았나?”

“네, 네!”

항상 차를 타주기만 했지,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히나는 자신의 몫으로 놓인 찻잔을 차마 들지도 못한 채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오늘은 할 얘기가 있어서 왔네만……. 내 고민을 들어주지 않겠나?”

“무, 물론이죠! 저라도 괜찮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절대 어디에 누설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갖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루이스는 앞에 있는 순진한 아가씨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카신의 반응 또한 흥미로웠다.

“사실 어제 내가 히나 양을 직접 보낸 첩자라고 하니까 주변에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네. 그래서 결국 히나 양이 내 말벗이라고 털어놓게 됐지. 그렇지 않으면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네에? 그, 그래도 되나요? 감히 제가 폐하의 말벗이라니……. 혹시라도 저 때문에 책이라도 잡힌다면…….”

“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카신은 일부러 짧은 웃음을 내뱉으며 대화를 끊었다. 아주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루이스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하지만 한 가지 날 위해 해줘야 할 게 생겼는데 말이다.”

“뭐, 뭐든 시키셔도 됩니다!”

아무리 상대가 황제라고 해도 뭔지도 모를 청을 저리 쉽게 받다니!

카신은 황당한 얼굴로 히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순수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좋아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영악해지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선뜻 받아준다니 다행이네. 고민이 많았거든.”

“폐하께는 큰 은혜를 입었는걸요!”

루이스는 큰 은혜를 준 척하는 거였다.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가증스런 얼굴로 연극을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황제의 영악함을 당장에 내뱉으려는 걸 참으며 카신은 이를 꽉 물었다. 루이스에게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으며.

“그럼 말이 빠르겠군. 부탁은 내일 말해줘도 되겠나?”

“그, 그럼요!”

부탁을 내일 알려준다는 말에 히나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곧바로 의심을 거두며 그녀는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럼 내일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같이 식사를 하지.”

“폐하가 계신 곳이요?”

히나는 그곳이 본궁이란 걸 깨닫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그곳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긴장이 됐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히나 양.”

바쁜 것인지, 아니면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속셈인지 루이스는 바로 일어났다.

약속을 했다. 당분간 말을 잘 들어주겠다고.

카신은 멀어지는 루이스의 기척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앞날이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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