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와아, 진짜 수업을 받긴 받는구나.”
“나, 어제 잠 한숨도 못 잤어!”
“나도, 나도! 어떤 수업을 하실까?”
오늘부터 정식으로 카신에게 마법 수업을 받는 날이었다. 루터도 당연히 기대하고 있었다.
카신에게 보복을 당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그날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이 수그러들며 설렘이 증폭됐다. 과연 대마법사의 수업에서 무엇을 배울지에 대한 기대감에 루터의 눈도 반짝였다.
“루터, 너는 좀 긴장해야 되지 않냐?”
어깨를 툭 치며 카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너…… 그때 그 눈 기억 안 나?”
“야, 그 말은 꺼내지 마. 지금도 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살기 가득한 카신의 눈동자를 떠올릴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그 후, 며칠은 잠도 제대로 못 잤었다.
루터의 시선이 이제는 다른 아이들과 차분히 잘도 얘기하는 히나에게 닿았다. 그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히나가 옆에 있으면 괜찮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히나, 넌 카신 교수님하고 자주 얘기하잖아. 무슨 수업을 받거나 한 적은 없어?”
“그런 건 없는데…….”
낙하산으로만 봤던 히나를 보는 시선이 사뭇 달라졌다. 이제는 그녀에게 친근히 말을 붙이는 학생들도 제법 늘었다.
“그럼 그때 한창 불려갈 때 무슨 얘기 했어?”
“차를 타달라고 하셨어. 개인 상담도 해주시고…….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라 그냥 아는 체를 하신 것뿐이야.”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정말? 교수님을? 어떻게?”
“으응, 그게……. 우연히 교수님과 마주쳤는데 말을 걸어주셨어.”
시녀로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하라 했으니…….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었다. 카신과 만나게 된 계기도, 리베리아 백작의 영애가 된 사연도, 전부 비밀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곧 대신전에서 축복 기도를 하러 오겠다.”
“축복 기도?”
처음 듣는 소리에 히나가 되물었다.
“아, 히나는 모르겠구나? 일 년에 한 번씩, 대신전에서 대신녀님이 우리한테 기도를 해주러 오신다고. 대단하지 않아? 난 처음에 이 소릴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
“대신녀님이 직접?”
다른 나라가 제국에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대마법사가 무서워서인 것도 있었지만, 제국에 성스러운 대신전이 존재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물론 대마법사가 가장 두려운 존재이긴 했지만, 카신이 실질적으로 거의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살생을 금하며 적극적으로 평화를 외치는 대신전의 존재는 엄청났다.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신녀들은 쉽사리 죽일 수도 없었다. 신녀들이 가장 많이 머무는 대신전이 제국에 있으니, 다른 나라에서 함부로 쳐들어오는 건 힘들었다.
“겸사겸사 오시는 거야. 황궁에 축복 기도를 오면서, 황궁 안에 있는 세인트에도 잠깐 들르시는 거지.”
신력을 뿜어내는 대신녀들의 기도는 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은 물론 역병과 재앙까지 막았다. 아예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은 카신과 달리, 신녀들은 오래전부터 방방곡곡을 누비며 기적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보여주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 기적을 보기 위해 대신전을 직접 찾아오고 있으니, 대신전이 위치한 제국을 쉽게 볼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매해 대신녀님이 오셔서 우리의 합격도 기원해 주셔. 알다시피 여긴 모든 시험이 다 어렵잖아.”
“세인트에는 대신녀님도 오시는구나.”
히나는 세인트가 황궁에서 관리하는 학교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어째서 다들 세인트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이번에 카신 교수님하고 신녀님들이 만날 수도 있겠다.”
“대마법사랑 대신전은 제국을 지키는 최고 세력인데, 서로 만나서 본 적이 있긴 할까?”
“보지 않았을까?”
“교수님은 여태 별궁에서 안 나오셨잖아. 본 적 없지 않겠어?”
“듣기론 두 세력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던데…….”
전부터 전해져 오는 소문이었다. 대신전과 대마법사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어디서, 언제 나왔는지도 모를 근거 없는 소문이었지만, 제국을 대표하는 두 세력이 만나는 일은 오랫동안 없었다. 소문에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여러 추측이 오갔지만, 답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카신의 업적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루터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몰라?”
뒤에서 루터가 히나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그런 대화는 한 적 없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물어볼게요.”
히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소문이라면 그녀도 들은 적이 있었다.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너 도대체 아는 게…… 히익!”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며 핀잔하던 루터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카신의 모습에 다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교, 교수님?”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니 카신은 히나의 옆에 앉아 있었다.
“어, 언제부터 계셨어요?”
“아까부터 있었다만…….”
자리에서 일어난 카신은 대련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열네 쌍의 시선을 쭈욱 훑었다.
“기척을 느끼는 것부터 알아야겠군. 명색이 최고의 마법사라는 꿈을 가졌으면서 이런 기척 하나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다니.”
“그, 그거야 기척을 숨기고 오셨으니…….”
마법에 대한 재능으로는 상급반에서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는 줄리아가 다급히 변명하다 입을 다물었다.
카신은 기척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학생들과 비슷한 기운을 갖고 섞여 있을 뿐이었다. 마치 카멜레온이 색을 바꿔 자연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뚜렷하게 힘을 드러내고 있는 카신을 눈치채지 못했다. 기척 하나 감지하지 못한 것에 창피함이 몰려왔다.
“이렇게 드러낸 기척도 숨긴다고 하다니, 루카스 백작이 들으면 통탄하겠구나.”
줄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난 친절하게 수업을 진행할 생각이 없다. 듣지 못한다면 언제든 포기해도 좋으니, 바로 말하도록.”
어째서 나를 보고 하는 말 같지?
그토록 존경하는 카신의 시선을 피하며 루터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런 보복도 없어 안심하고 있었건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오늘은 제대로 된 보호 마법을 알려주지.”
위이잉.
순식간이었다. 허공에 수십 가지 마법진이 한꺼번에 펼쳐졌다. 마법 보호진의 다양한 형태가 모두 있었다. 책에 나온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정확했다.
“앞에 있는 보호 마법진은 모두 현재 마법사들이 쓰고 있는 것들이다.”
수십 개의 마법진을 한 번에 펼칠 수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부리는 것에도 엄청난 집중력과 힘이 필요했다.
학생들은 한꺼번에 수십 가지의 다양한 마법진을 한 사람이 펼쳤다는 것을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같은 종류의 마법이라고 해도 체질에 따라 맞는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다. 마법진을 보고 그린다고 아무나 그 마법을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
속성만 잘 맞는다면 하급 마법사가 꽤 높은 마법진을 그릴 수도 있다. 그건 마법사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마법진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안 맞는지 고르는 건 오랜 경험을 통해서 익혀야 했다.
“그래도 세인트의 상급반이니 이 정도 이론은 알고 있겠지? 자,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마법진을 하나씩 따라 해보고 자신에게 맞는 걸 어서 찾아보거라.”
마법사들 간의 싸움에서 마력이 우세한 쪽이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니었다. 제아무리 마력이 약한 마법사라고 해도 잘 맞는 속성의 마법을 쓴다면 더 강한 마법사를 이길 수도 있었다.
“지, 지금 말입니까?”
보호 마법진 뒤로 이번엔 공격 마법진이 연달아 펼쳐졌다. 위력도 위력이었지만, 공격 마법진의 수도 여러 개였다. 제대로 된 보호진을 펼치지 않는다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있는 마법진이 당장에라도 공격해 올 것 같았다. 다양한 방어 마법진을 펼치고도 공격 마법진까지 여러 개 시현하는 것에 감탄한 겨를도 없었다. 그럴 시간에 어떻게 하면 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냐를 걱정해야 했다.
“시간을 많이 주지 않을 테니, 어서 찾는 게 좋을 거다.”
공격 마법진이 어떻게 쓰일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됐다.
“무, 무리예요, 교수님!”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자신에게 맞는 마법을 찾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에 마법의 종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자신에게 맞는 마법을 썼다고 해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수많은 경험과 노력을 통해서 겨우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자네들은 나를 쓰러뜨린 실력을 가지지 않았나. 제대로 된 방어진을 구성한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공격이니, 불평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마법진을 그려서 맞는 걸 찾도록 하거라.”
어딘가 가시가 박힌 말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걸쳐서 찾는 걸 지금 당장 하라니……!”
“설마 정말로 저 공격을 저희에게…….”
“그거 날리시면 저희는 진짜 죽을 겁니다!”
“생명의 위협에서 시현하는 마법진이야말로 정확하고 강하지. 좋지 않으냐? 자신에게 맞는 보호 마법진을 찾는 건 물론, 제대로 시현하는 방법까지 익힐 수 있으니.”
허공에 펼쳐진 공격 마법진의 마력이 점점 응축되고 있었다. 카신은 무척 느리게 마법을 시현하는 것이었으나,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엄청난 속도로 증폭되는 마력 덩어리를 보며 다들 기겁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이들도 몇 명 있었다.
“공격은 연달아 이어질 터이니,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에 뭐라도 하는 게 좋을 거다. 설마 상급반 학생들이 보호 마법 하나 따라서 시전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당장에라도 공격이 날아올 것 같았다. 적당히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
“교, 교수님! 히나는 아직 마법 시현이 안 됩니다!”
보호 마법을 펼친다고 해도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이었다. 마법을 시현조차 하지 못하는 히나가 걱정되는 마음에 루터가 다급히 외쳤다. 사실 공격 마법이 날아올까 봐 겁이 나서 히나를 살짝 들먹인 것도 있었다.
“아, 히나라면…….”
“어어?”
히나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여러 겹의 보호막이 그녀를 둘러쌌다.
학생들과 카신 사이로 둥둥 날아온 히나가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마력 덩어리를 멍하니 쳐다봤다.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마력이란 걸 제대로 느끼진 못하지만, 그녀도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건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시험할 게 있으니 잠깐 거기에 있거라.”
눈앞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당장에라도 공격할 기세로 있었다. 히나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보호 마법은 드래곤이 온다고 한들 절대 깰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단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히나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다급히 보호막을 두드려 봤지만, 얇고 투명한 막은 무척이나 견고했다. 무서울 정도로.
무슨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카신은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며 탁, 소리를 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보호 마법을 알려줘 볼까?”
모두의 귀에 카신의 말이 환청처럼 계속 울렸다.
“다음 시간엔…… 쉽게 깨져 버리는 보호 마법부터 갈아엎어 주지.”
히나에게 걸린 보호 마법이 약했다는 걸 돌려서 말하는 카신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설마 했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고 있었다.
그만둔다고 말할까?
그곳에 있는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차마 그만둔다는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구우우웅.
응집된 마력에서 음침한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아무리 보호막 안에 있다고 하지만,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마력 덩어리 코앞에 있는 히나가 그 누구보다도 가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