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대신전?”
아직도 속이 좋지 않았다. 말을 하니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대답을 하지 못한 히나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서 몇 번씩이나 광대한 마법이 펼쳐지고 지나갔다. 아무리 막강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고 하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보호진 속에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대신전에서 세인트까지 축복 기도를 하러 온다 이건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투명한 유리병 속의 여러 약물들을 뒤섞으며 카신이 대답했다. 알 수 없는 것을 만들어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히나는 몸서리를 쳤다.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난 이후로 확실히 몸이 이상했다. 카신과 조금 더 있고 싶고, 대화를 하고 싶었다. 간혹 보고 있으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이제는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는데 그를 볼 때마다 몸이 이상 반응을 보였다.
“이리저리 간섭하길 좋아하는 대신전이라면 다른 일로도 순례를 다니기 바쁠 텐데 말이야.”
쉬이익.
마지막으로 혼합한 두 가지 약물이 섞이며 이상한 소리가 났다. 카신이 그걸 가지고 오는 걸 보며 히나는 눈을 꼭 감았다.
요즘 대마법사님은 다정하니까. 자는 척을 하면 당장 먹이려고 안 하지 않을까?
하지만 히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카신은 이런 면에선 무척 냉정했다.
“깨어 있는 거 안다. 어서 일어나 먹거라.”
절레절레.
입을 꼭 다문 채 다급히 고개를 젓는 히나를 보며 카신은 작게 웃었다. 히나는 엄살을 부릴 때마다 표정에서 생각이 너무 드러났다. 이러니 더 놀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끓을 수밖에.
“단순히 기력을 보충하는 약이란다. 이상한 건 아니니 먹어도 돼.”
“……정말이죠?”
“그럼. 약속할 수 있단다.”
색이 기묘했다. 위험해 보였다.
힐끗, 카신을 보니 그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어서 더 의심스러웠다.
“이걸 다 마시면 네가 대신전에 대해 궁금해한 점을 알려주마.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말이다.”
“약속하시는 거죠?”
“그래. 무엇이든 물어보렴. 알고 있는 거라면 알려줄 터이니.”
빙긋 웃으며 약속하는 카신을 보고, 히나는 용기를 내어 약을 한 번에 들이마셨다. 병을 꽉 잡고 있는 손끝이 바르르 떨렸지만, 결연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하아.”
꽤 많은 양의 약을 마신 히나가 길게 숨을 내뱉는 걸 보며 카신은 잘했다는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럽게 감기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며 간질였다.
“근데 저,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의무실로 데려갈 거라 생각했던 카신은 그녀를 데리고 공간 이동을 해서 대마법사의 별궁에 왔다. 오랜만에 보는 별궁이 반가웠지만, 나머지 수업을 빠뜨렸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궁금한 건 그거니?”
“아, 아니요!”
첩자 시절을 떠올린 히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질문에 관한 한 카신은 너무나도 확고했다. 질문을 허용하고 무엇이든 답해주되, 기회는 한 번이 다였다. 반납할 휴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질문은 항상 한정되어 있었다. 어쩌다 던진 쓸데없는 질문도 그는 전부 개수에 넣었다. 그런 것엔 절대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전이요, 대신전. 카신 님은 대신전이랑 사이가 좋지 않나요?”
“딱히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별로 좋아하진 않는단다.”
“어째서요?”
또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은 히나가 살며시 눈치를 봤다. 수정구를 통해서 말할 때는 다소 편하게 대화했지만, 실제로 만나서 얘기를 하면 그녀는 과거의 습관을 그대로 드러내며 자주 긴장하곤 했다.
그래서 자주 불러 얘기를 나누려던 거였는데.
세인트에서 개별적으로 호출을 하지 말아달라 부탁하던 히나를 떠올리며 카신은 아쉬움을 다셨다. 따로 만나 얘기할 시간도 없으니 그녀에게 조금 더 편한 사람이 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 점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궁금한 거라면 더 물어도 좋다. 곤란한 질문이 아니라면 대답해 주마.”
“정말이에요? 뭐든 다?”
“수정구로 연락을 할 때도 뭐든 물어보면 대답해 줬지 않아?”
과거의 습관이 남아 있는 모습은 꽤 귀여웠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자신을 편하게 대해줬으면 했다. 가끔은 둘 사이에 보이지 않은 선이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왜 대신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궁금했어요.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을 저도 들었거든요.”
“신전에 있는 작자들은 아주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지. 그래서 그들과는 만나고 싶지 않구나.”
“만난 적은 있나요?”
“아주 오래전에 황궁에서 여러 번 만났단다.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
신력을 가진 자들은 예리했다. 특히나 신력이 높은 소수의 대신녀들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의 본질을 깨닫고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대신전에 싫어하시는 분이라도 있나요?”
“아니. 그때 만난 작자들은 이미 다 죽었단다. 아주 오래전 일이거든.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었겠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지. 그래서 만나고 싶진 않군.”
여태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카신이 대신전을 대놓고 싫어하는 걸 보자 어쩐지 낯설었다.
“하지만 신녀님들은 순례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축복을 내려주는 좋은 사람들이잖아요.”
평생에 한 번 받을까 말까 하는 대신녀의 축복을 카신과 함께 받고 싶었다. 카신은 교수이고 자신은 학생이니 같이 있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히나는 그와 같은 장소에서 대신녀의 축복을 받는 것을 조금 기대했다.
“같이 축복을 받고 싶었는데…….”
“그럼 같이 봐도 되겠구나. 항간의 소문처럼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아니란다.”
“네!”
실망한 기색이 다분했던 히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미소를 지었다.
특별 대우를 해줘도, 단단한 보호막을 걸어 지켜줘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히나는 가끔 아주 사소한 것 하나로 기뻐했다. 표정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은 그녀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굳이 싫어하신다면 같이 안 봐도 돼요.”
싫다고 하면 서운해할 거면서.
카신은 히나의 기대에 찬 얼굴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그런데 수업은 계속 그렇게 하실 거예요?”
가히 공포스러웠던 수업이었다. 하지만 정작 공포 수업을 펼쳤던 당사자인 카신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히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라니? 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쓴 거란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니?”
“아, 아니에요.”
그간 너무 편히 얘기했다. 마법을 부리지도 않고, 수정구로 일상적인 대화만 해서 잊고 있었다.
히나는 아주 오랜만에 카신이 정상적인 사람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대마법사의 상식선은 평생을 가도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았다.
* * *
“매년 보는 건데 뭐가 그렇게 신이 난다고 다들 나와서는…….”
새침하게 얘기하는 줄리아의 시선도 적은 규모로도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다.
대신녀를 중심으로 소수의 신관과 신녀가 뒤따르며 황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황궁 마법사단과 같은 새하얀 색임에도, 신성함이 묻어나는 제복은 다른 의미로 눈이 부셨다.
“우와.”
가장 앞에 있는 대신녀는 무척 작고 연약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하얀 천 자락 사이로 연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렸다.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녀라는 칭호를 받기에는 무척 젊어 보이는 여자였다.
“저분이 대신녀님?”
“대신녀 세이나 님이잖아. 몰라?”
옆에서 루터가 뚱한 얼굴로 설명해 주었다. 히나의 눈이 가장 앞장서서 걷는 대신녀를 좇았다.
대신전을 대표하는 세 명의 대신녀.
두 명의 대신녀는 나이가 많아 대부분 신전을 지키며 그 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지만, 세이나는 달랐다. 움직임이 힘든 두 대신녀를 대신하여 세이나는 왕성하게 순례를 다니며 혼자 대신전의 위엄을 지켰다.
“엄청 연약하게 생기셨는데, 대신녀님이라니…….”
아담한 키에 작은 체구, 얼핏 보이는 가녀린 얼굴.
하지만 목에 걸고 있는 은빛의 목걸이가 햇빛에 반사되며 반짝이는 것처럼 대신녀 세이나는 존재만으로도 빛나고 있었다.
“대단하다…….”
작고 보잘것없는 자신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히나의 두 눈동자가 존경과 부러움으로 일렁였다.
“대신녀님은 이곳에 얼마 동안 계시나요?”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히나가 물었다. 평소와 다른 히나를 힐끗 쳐다보며 루터는 순순히 설명했다.
“세이나 님은 아마 일주일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수도와 황실을 들를 거야. 마지막으로 황궁을 떠나기 전에 세인트에 축복 기도를 하고 가실걸. 매번 그러셨으니까.”
세인트에 축복 기도를 하는 건 거의 덤이었다. 황실에 기도를 하러 오면서 그 안에 존재하는 황실학교인 세인트에도 기도를 해주는 격이었다.
“하,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볼 수 있을 것 같냐? 절대 못 봐. 세인트에 오셔서 기도를 올릴 때도 가까이에서 보진 못한다고.”
아무리 후작가의 영애가 됐다고 해도 대신녀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세인트 학생들을 위해 축복 기도도 멀리서 짧은 시간 동안 하는 것이 다였다. 상급반에 있으니 가장 앞줄에서 얼굴은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바로 코앞에서 보는 건 아니었다.
“자, 잠깐, 그렇게 실망할 것까지는…….”
사실을 얘기했을 뿐인데 급격히 실망하는 히나를 보자 루터는 당황스러웠다. 다급히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는 이런 것에 영 소질이 없었다.
“정 보고 싶으면 교수님한테 한번 부탁해 봐. 대마법사님이라면 충분히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지 않겠어?”
“카신 님께요……?”
여태 본 히나는 카신을 이용해서 사적으로 이득을 취하려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럴 성격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당장에라도 카신에게 부탁하러 갈 것처럼 보였다.
“봐, 세인트에 제일 늦게 들어왔는데도 가장 상석에 앉아 계시잖아. 그런 부탁은 그리 힘들지 않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여태 대신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히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교수진들 사이에서 가장 앞에 있는 카신에게 닿았다. 행렬 너머에 있지만, 하얀 제복을 입고 있는 카신은 유독 눈에 띄었다.
“으악, 여기가 보이나 봐.”
루터는 히나의 시선이 닿자마자 카신이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며 재빨리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카신이 있는 곳은 행렬 너머 반대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은 떼 지어 있는 학생들 무리 속이었다. 그럼에도 카신은 그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히나가 자신을 보는 것을 눈치채고 뻔뻔하게 손을 흔들었다. 루터는 그런 카신의 모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눈이 좋은 거야?”
딱히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카신과 눈이 마주치면 괜히 찔려서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히나와 같이 있을 때면 더 그랬다.
히나가 다시 대신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다시 돌아보지 않을 것 같자 카신의 시선도 대신녀에게 향했다.
“흐음, 대신녀라.”
카신도 대신전의 행렬은 아주 오랜만에 본 것이었다. 예전에는 대신전에서 기도를 올 때마다 밖에 나가 있었고, 최근 몇 년은 별궁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마주칠 일을 아예 만들지 않았으니, 대신녀는 물론 지금 보는 대신전의 모두가 초면이었다.
그는 처음 보는 대신녀를 관찰하며 옆에 있는 교수 에단에게 물었다.
“저 대신녀는 얼마나 오래됐죠?”
“대신녀 세이나 님 말입니까?”
“많이 젊어 보여서 말입니다.”
평소엔 대화도 피하고 개인 공간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 카신이 먼저 말을 붙였다. 에단은 반가운 마음에 덥석 대답했다.
“허허, 저리 보여도 벌써 16년 동안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교수님께선 별궁에 계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세이나 님은 역대 가장 유명하신 신녀님이죠. 그 어떤 곳도 굴하지 않고 달려갈 정도로 열정이 넘치시고…….”
흡사 연설과도 같은 설명을 들으며 카신은 세이나를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얼굴 좀 구경해 볼까?’
고지식한 건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얼굴을 가리며 한껏 성스러운 분위기를 내며 걷고 있는 세이나를 보며 카신은 손가락으로 작게 원을 그렸다.
살랑.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에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었다. 세이나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천이 위로 걷혔다. 그 사이로 다소 확장된 그녀의 동공이 보였다.
일순 세이나가 카신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것참 대단하군요.”
티도 나지 않는 마력이었다. 현재 황궁 직속 근위대나 마법사단에 있거나, 마법사단 출신이었던 유능한 인재인 세인트의 교수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카신은 한순간에 일으킨 마법을 눈치채고 쳐다본 세이나를 보고 픽 웃었다.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가 대신녀로서 위엄을 뽐내고 있는 세이나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그렇지요? 올해도 대신녀 세이나 님이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항상 바쁘실 텐데도 매년 황궁과 우리 세인트를 찾아주시는 아주 부지런하신 분이죠.”
“대신녀의 축복 기도라. 이거 참 기대되는군요.”
히나가 내던 영롱한 빛과 가장 비슷한 힘을 꼽으라고 하면 신력이었다. 정확히 신력은 아니었지만, 가장 근접했다.
대신녀와 얽히는 건 꽤 귀찮았다. 하지만 어쩌면 세이나라면 히나가 가진 힘이 뭔지 답을 내려줄 수도 있으리라. 신력과 반대의 힘을 가진 자신보다도 비슷한 힘을 내는 세이나가 이럴 때는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히나의 힘이 정말 신력이기라도 한다면…….’
역시 신전의 고지식한 인간들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까나.
신력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가 없어서 난감했다. 마법이라면 모를까, 이런 힘을 구별하는 것에는 그도 익숙지 않았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급하게 볼일이 생겼습니다. 행렬도 끝나가니 전 이만 돌아가지요.”
만약 그 힘이 신력이라면 대신전에서 히나를 신녀로 만들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항상 인원이 부족한 곳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히나를 빼앗아 가려 하리라.
아무리 카신이라고 해도 대신전과 싸움은 피하고 싶었다. 차라리 나라를 박살 내는 것이 나았다.
그들이 신의 가호를 받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힘과 신력은 상성이 맞지 않았다. 싸워서 이기더라도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한 번만 더 본다면…….”
알지 못한다면 알아내면 된다. 지금은 히나에게서 그 빛을 끌어낼 순 없으니, 진짜 신력을 보고 두 힘을 비교해서 알아내야만 했다.
“폐하를 알현해야겠군.”
역대 가장 유명한 신녀라면 그 신력도 엄청나겠지.
대신녀를 만나는 것은 여전히 꺼려졌지만, 히나의 힘에 대해선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미래를 위해서 그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