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루터, 어서 오거라.”
마차가 열리자마자 사라가 반가운 목소리로 루터를 맞이했다. 하지만 루터 다음으로 따라 내리는 히나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요즘 어떠니?”
“뭐, 그냥 그렇죠.”
루터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사라는 반가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히나가 조심스레 인사를 했다. 언제 인사를 건네야 할지 고민하다 용기 내어 내뱉은 말이었다.
“그래, 너도 왔구나.”
루터를 볼 때와 달리 싸늘한 시선이 히나에게 아주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사라는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따라온 히나가 몹시 못마땅했다.
“그래도 형의 행사니까 가족들이 다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같이 오자고 했어요. 작은 파티지만…… 그래서 더 소개하기 좋을 것 같아서요.”
사라의 탐탁지 않은 시선에 루터는 황급히 변명했다.
가족 행사를 히나에게 알리지 않는 건 아무래도 찝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히나에게 함께 참석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파티에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참석 제의를 한 것도 찝찝하게 느껴졌다.
“그래, 소개는 해야겠지.”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사라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히나를 쳐다봤다. 최근에 상급반 동기들과 교류를 하면서 다시 펴지기 시작했던 히나의 작은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저희는 이만 들어가서 쉴게요. 피곤해서요.”
피곤한 건 없었다. 그저 이 자리가 불편한 것뿐이었다. 정확히는 히나가 불편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한 말이었지만.
“그러렴, 루터.”
루터에게만 다정히 인사를 한 사라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히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루터는 그녀가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엔 후작가에 들어올 만큼 영악한 여자의 연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가식도, 위선도 아니었다. 애써 웃으며 속으로 슬픔을 꾹꾹 눌러 담는 모습을 몇 번 옆에서 지켜봤다.
“어머니는…… 별로 신경 쓰지 마.”
사라는 세인트에서 신분의 구별 없이 친구들과 지내본 다른 가족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귀족들 사이에서만 자라온 그녀는 평민과 친근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으리라.
부유한 백작가 영애로 마냥 곱게 자라 후작가로 시집온 사라가 히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당연했다.
어머니인 사라가 이해됐지만, 히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루터는 풀이 죽은 히나가 무척 신경 쓰였다.
“원래 저러시니까.”
조금 더 위로가 될 만한, 다정한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를 달래본 적도 없는 루터의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전 괜찮아요!”
전혀 따뜻한 말이 아니었지만, 속에 담긴 그의 노력을 이해한 것인지 히나가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도 파티에 참석해도 되는 건가요?”
“당연하지! 너도 리베리아잖아.”
루터도 히나가 망설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히나도 정식으로 리베리아 사람이니,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돼. 물론 참석하지 않는 걸 추천하고.”
불쾌감이 감도는 목소리.
“형!”
언제 나타난 건지 베라미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벽에 기댄 채 그들을 보고 있었다.
“루터. 너도 ‘저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 학교에 같이 다니다 보니 정이라도 든 거야? 저런 것이 리베리아라니, 웃기지도 않지.”
움찔하며 시선을 내리까는 히나는 속으로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는 자신이 애초에 후작가의 영애가 된다니 말도 안 됐다.
“여, 역시 전 파티엔 참석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히나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황궁 마법사분들도 여러 분 오시니 나오지도 마. 보이기 창피하니까.”
“말이 너무 심하잖아.”
“루터. 파티 때 저거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말아줘. 나에게 있어 뜻깊은 자리야. 저런 걸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저, 전 그럼 그만 방으로 돌아갈게요! 피곤해서…….”
후다닥 달려가는 히나의 뒷모습이 마치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베라미는 그가 항상 존경했던 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베라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루터는 죄책감 하나 없는 얼굴을 한 베라미를 쏘아보았다.
“형, 정말…….”
“루터, 불쌍해도 분수를 알게 해줘야지. 저렇게 길들였다가 나중에 자기가 진짜 리베리아라며 가문에 먹칠을 하면 어쩌려는 거야?”
“형이 아무리 그래도 히나는 이미 우리 가족이라고.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지 마.”
“하, 저런 게 가족?”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아버지도 곧 정신 차리시고 쟤를 내보낼걸? 대마법사님이 저런 것 때문에 밖으로 나왔다니 말도 안 돼. 그건 다 우연이라고.”
“아니야, 대마법사님은…….”
“폐하의 부름에도 별궁을 나서지 않는 분이 고작 여자애 한 명 때문에 나왔을 리가. 세인트에 오신 것도 그저 지나가는 변덕일걸?”
베라미는 확신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루터. 쟨 대마법사님과 우연이 같이 있었다는 걸 빌미로 이용하는 거야. 신분 상승을 해서 권력 놀음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절대 안 되지.”
그건 좀…….
반박하려고 벌어진 입술을 다물며 루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쯤 되니 차라리 히나가 조금 영악했으면 싶었다. 카신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조금이라도 자각하고 이용한다면 세상 살기 편해질 텐데.
하지만 히나는 답답할 정도로 순진, 아니 무지했다. 터무니없는 말로 속여도 진짜라고 믿을 정도로 순수했고, 권력이라곤 일절 몰랐다. 당연히 이용할 줄도 모른다.
‘어차피 말해봤자 절대 안 믿겠지.’
루터 역시 직접 보고도 받아들이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자신보다도 더 대마법사를 선망하는 베라미가 나중에 후회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 무슨 말을 해봤자 말도 안 되는 허풍이라며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후회해도 난 몰라.”
루터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베라미를 두고 방으로 들어왔다.
답답했다. 사실을 말해주지 못하는 현실이. 그리고 히나의 선한 심성을 알아주지 않고 선입견을 가진 채 보는 시선이.
‘대마법사님이 파티에 오시지 않는 이상 절대 안 믿겠지.’
방으로 향하던 루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아무리 사람들과의 교류를 싫어해도 히나가 부르면 오지 않을까?
만약 대마법사와 히나가 정말 친한 사이란 걸 안다면 적어도 이런 어색한 상황은 당장에 개선될 것이다.
‘이건 걔를 두둔하는 게 아니야. 매번 이런 상황이 오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야.’
루터는 필요도 없는 핑계를 만들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볼 때마다 숨 막히면 내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까. 그래, 그래서 이러는 거야.’
히나가 일일이 상처받은 얼굴로 또 혼자 슬퍼할 걸 생각하니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가족으로 인정받지는 못하더라도 상처는 안 받았으면 했다.
루터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히나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갈수록 다급해졌다.
똑똑!
“야! 들어가도 돼?”
“아, 네! 들어오세요!”
다소 거친 노크 소리와 함께 루터는 문을 벌컥 열었다.
“너 말이야…….”
얼빠진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는 히나의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무언가 위로해 줄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달래주는 법은 모른다. 결국 루터는 모른 척하며 용건을 이어 말했다.
“내일 파티 때 말인데.”
움찔.
파티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히나의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대마법사님, 그러니까 교수님도 초대하면 안 돼?”
역시 안 될까?
호기로웠던 처음과 달리 루터는 다소 자신이 없어졌다. 남에게 부탁을 하지 못하는 히나의 성격과 사적인 교류에 절대 얽히고 싶어 하지 않는 카신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뭐, 지금 연락하면 오실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서신을 보내면 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그러니까 맛있는 것도 먹고, 얼굴도 보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 황궁 마법사분들도 오시는데, 일단은 뭐, 같은 소속이니까 친해지면 좋고.”
히나의 부탁이라면 카신이 참석할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횡설수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설명하며 루터는 뺨을 긁적였다.
“이건 교수님을 위한 거니까 한번 물어보라는 뜻이었는데…….”
역시 안 오시겠지?
히나는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작은 부탁도 피해가 간다고 생각하면 절대 하지 않았다. 특히나 카신에겐 더 그랬다. 그러니 카신을 위해서라고 말하면 히나가 얘기라도 해보지 않을까 싶었다.
“아, 그러네요! 입이 짧아도 음식을 드시긴 하니까요.”
여태 카신이 음식을 먹었던 건, 히나가 같이 먹었으면 하는 눈으로 간절히 쳐다봐서인 걸 전혀 모르는 그녀는 천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카신 님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거든요. 생각해 보니, 정말 좋은 자리일 것 같아요.”
다른 의심은 전혀 하지 않은 히나의 해맑은 얼굴에 루터는 양심이 조금 찔렸다. 하지만 이건 다 히나를 위해서였다.
‘아니지! 이건 히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 간의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한 노력이었어!’
루터가 자신의 머리를 헝클이며 속으로 격렬히 부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스스로에게 아니라고 변명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근데 제가 막 초대해도 될까요?”
“초대하지 않았다고 해도 교수님이 온다면 누구나 다 환영할걸?”
“그럼 일단 물어볼게요!”
시무룩해 하던 히나는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작은 가방에 고이 모셔놓은 작은 수정구를 꺼냈다.
“그건 뭐야?”
“카신 님이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걸로 연락하라고 했어요.”
멀리 있는 사람과 연락하는 수정구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루터가 알고 있는 수정구는 절대 히나가 들고 있는 작은 구슬이 아니었다. 손에 들고 다니기 편할 정도로 휴대가 가능한 작은 수정구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 그게?”
수정구는 제국 내에서도 많지 않았다. 같은 파동이 일어나는 마법석을 찾는 것도 어려웠고, 만드는 과정도 무척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를 선명하게 전하려면 수정구에 파동이 흔들리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른 수정구와 연결을 하기까지의 여러 복잡한 마법을 걸어야 했다. 그러려면 당연히 수정구의 크기가 커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 완성되기 전에 마법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 버리거나 소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실패작이 탄생했다.
어렵게 완성이 된 수정구는 성인 남자 세 명이 손을 뻗어 겨우 두를 수 있는 커다란 크기였다. 적어도 루터가 알고 있는 한은 그랬다.
“그거 어디서 난 거야?”
“카신 님이 주셨어요. 항상 이걸로 연락하는걸요.”
히나의 손이 닿자마자 수정구에서 희미한 빛이 일어났다. 따지듯 더 물으려던 루터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항상 루터가 존경해 마지않는 카신은 무서웠다. 특히나 제가 히나와 같이 있을 때는 더더욱.
[집에 잘 도착한 모양이구나.]
“네! 그보다 물어볼 게 있어요.”
대화를 나누는 히나의 모습이 퍽이나 자연스러웠다. 그간 수정구로 연락을 많이 했다는 뜻이었다.
[물어볼 거라니?]
“내일 베라미 오라버니를 축하하는 파티가 열리는데…… 혹시 오실 수 있나요?”
파티에 대마법사를 초대하는 일이 이렇게 쉬운 건가?
절대 아니다. 보통은 대마법사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하면서도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봉투째로 바로 버려지지 않기 위해, 혹은 아주 작은 확률로 초대장을 보게 될 대마법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하지만 히나는 그 어떤 때보다도 편하게 물어보고 있었다. 루터는 히나와 카신의 관계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깊다는 걸 확신했다.
“맛있는 것도 많고, 황궁 마법사분들도 많이 온대요!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그 말을 하면 어떡해!
루터는 횡설수설 내뱉었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그대로 전하는 히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히나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건 누구의 생각이니?]
카신이 작게 웃으며 물었다. 루터는 왠지 그 작은 웃음소리가 무섭게 들렸다.
“루터 오라버니가 카신 님한테도 엄청 좋을 거라고 제안해 줬어요.”
두 손으로 엑스 자를 그리며 절대 말하지 말라 눈치를 줬지만, 수정구에 모든 시선을 두고 있는 히나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루터는 세상 모든 불행을 다 겪은 눈으로 수정구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이러다 나 단명할지도…….’
히나의 앞에서는 항상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카신은 무척이나 무자비했다. 수업을 빌미로 폭행을 휘두르는 것만 봐도 대마법사가 얼마나 포악한지 알 수 있었다.
[혹시…… 지금 옆에 있니?]
카신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네! 어떻게 아셨어요?”
루터는 불길한 예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어디에 있지?]
“제 방에 있어요.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혹시 쟤, 나한테 일부러 이러는 건가?
처음 괴롭힌 것에 대한 복수를 이렇게 하나 싶었다. 하지만 히나의 얼굴은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결코 악의가 없었다.
[루터 피안 리베리아 군. 아무리 네 여동생이 됐다고 하지만, 다 큰 여자의 방에 들어와 있다니. 내가 볼 땐 이해가 되지 않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 그게 아니라……!”
“오라버니는 카신 님을 초대하자고 저한테 말하러 온 거예요.”
그만해!
루터는 히나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손을 가까스로 멈췄다. 혹여 이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카신을 생각하니, 저절로 몸이 굳어졌다.
[히나, 네 오라버니라도 숙녀 방에 들어오는 남자는 쫓아내야 하는 거란다.]
“하지만…….”
[정숙한 레이디라면 그 누구라도 조심히 행동해야지, 히나.]
“네에.”
모든 것을 포용해 주던 평소와 달리 단호한 카신의 어조에 히나는 샐쭉하니 대답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했다.
[리베리아 군, 뭐 하나? 나가지 않고.]
“네, 네! 나갑니다! 나가고 있습니다!”
도망치듯 떠나가면서도 혹여 또 꼬투리를 잡힐까 싶어 루터가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갔다. 누가 쫓아올세라 잽싸게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며 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