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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47화 (47/128)

#47.

카신은 최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제복을 입을 일이 많아졌다. 파티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히나를 보러 가는 자리였다. 파티에 굳이 제복을 입고 갈 필요는 없지만, 하얀 제복이 잘 어울린다며 저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히나를 떠올라 입은 거였다.

잘된 일이었다. 따로 초대받지 않았어도 카신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리베리아 가에 한 번 방문하려 했었다. 하지만 딱히 핑곗거리도 없었고, 주말에도 세인트의 기숙사에 남아 있는 히나로 인해 미루고 있었다.

“이참에 히나의 입지를 제대로 해두는 것도 좋겠군.”

카신은 힘을 과시하고 지위를 앞세워 주변을 휘두르는 방법에는 서툴렀다. 항상 하고 싶은 대로 했고, 눈치를 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면 히나의 입지가 생길 거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대마법사와의 친분이 있다면 가족으로 인정받을 순 없어도, 그 집에서 계속 무시받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소규모 파티니.”

리베리아 후작의 입김도 있었지만, 베라미는 이번에 최연소로 황제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그 자리는 뒷배도 있어야 하지만, 능력이 없으면 오를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이번 파티는 황궁 마법사단에서 인재를 탄생시켰다는 자랑을 하려는 의미에서 열리는 거였다. 대마법사가 별개로 있긴 해도 공식적으로는 황궁 마법사단의 소속이었다. 그들도 카신의 참석을 전혀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의례적으로 초대장을 보내곤 했다.

“드레스를 입겠지?”

한 번이지만, 드레스를 입고 있던 히나의 싱그러우면서도 귀여웠던 모습이 저절로 연상됐다. 어서 빨리 드레스를 입은 히나를 보고 싶었다.

오늘 유달리 사랑스러울 그녀에게 남들의 시선이 닿는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가 가족으로서 참석해야 될 파티이니 어쩔 수 없었다.

“구두가 불편할 텐데…….”

높은 구두를 불편해하던 히나를 떠올리며 카신은 서둘러 이동 마법을 시현했다.

“아무리 이 황궁에 자네 결계가 쳐져 있다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 드나들 때는 제발 문을 통해 다녀주지 않겠나?”

순간 불만스런 루이스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카신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오히려 이동 마법을 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 마력을 필요 이상 써야 하나 고민까지 했다. 최근 들어 얄밉기 짝이 없는 루이스의 말을 일부러라도 어기고 싶었다.

“이런. 서둘러야겠군.”

시간상으로는 지금 마차를 타고 가도 파티에는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높은 구두로 인해 불편해할 히나에게 어서 마법을 걸어주어야 했다. 그러려면 준비가 다 되기 전에 미리 가야 했다.

카신은 꼭 이뤄야 하는 사명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둘렀다.

리베리아 가에는 한 번도 가보지도 않았고, 어디인지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히나에게 준 수정구에 위치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다.

수정구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살짝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카신은 히나가 있을 커다란 저택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지만, 아직 파티 시작…… 흡!”

리베리아 가에서 일한 지 어언 10년. 하녀는 황궁 마법사단의 복장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른 손님이 입은 마법사단의 제복을 보고 급히 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큰 키에 신비로운 잿빛 머리카락, 황궁 마법사단이 입는 것과는 조금 다른 화려한 제복에 아주 젊고 아름다운 미청년.

낯선 얼굴과 복장이었지만, 하녀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자연스레 연상됐다.

“대, 대마법사님?”

하녀는 대대로 마법사단의 수장 자리를 이어온 리베리아 가에서 십 년을 일했다. 대마법사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이라면 지긋지긋할 만큼 들었다.

“어, 어서…….”

“히나는 어디에 있지?”

카신은 당황하는 하녀의 말을 칼같이 끊으며 히나부터 찾았다.

파티를 준비하는 커다란 저택은 전체적으로 시끄러웠다. 북적거리는 커다란 저택 안에서 목소리 하나만으로 히나를 찾기는 힘들었다.

“히, 히나 아가씨라면…….”

귀에 익지 않은 히나의 이름에 하녀는 더 당황했다.

“됐다. 내가 알아서 찾도록 하겠네.”

떠듬거리는 하녀에게서 답을 듣는 걸 포기한 카신은 2층으로 시선을 틀었다.

위치추적 마법을 걸어놓은 수정구가 2층, 가장 끝에 있는 방에서 느껴졌다. 가볍게 발을 한 번 디디며 그가 날 듯이 단번에 2층까지 올라왔다. 그의 시선이 가장 끝에 있는 방에 머물렀다.

수정구가 있는 방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았다. 굳이 문을 열지 않아도 텅텅 비어 있을 방을 노려보며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히나 아가씨는 루터 도련님의 방에 계십니다.”

뒤늦게 따라 올라온 다른 하녀가 그가 궁금해하는 답을 내어주었다.

“그 방은 어디지?”

“루터 도련님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카신은 제집처럼 편하게 명령하며 하녀의 뒤를 쫓았다. 당당한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대마법사님! 여긴 어떻게…….”

하녀에게 그새 전해 들은 것인지 베라미가 다급히 뛰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마주해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초대장, 내게 준 것이 아니었나?”

한창 준비 중이었는지 베라미는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있었다.

얼빠진 얼굴을 한 베라미에게 카신은 두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초대장을 던지듯 흘렸다. 아직 뜯지도 않은 초대장이 베라미 앞에 둥둥 떠다녔다.

“루터의 방이 어디라고?”

다소 멍청한 얼굴을 한 베라미를 지나치며 카신은 다시 한 번 물었다.

히나의 목소리를 잡아내기 위해 온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방과 그에 상응하는 소음이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저, 저쪽 가운데 있는 방입니다.”

카신은 구석진 곳에 있었던 히나의 방과 달리 훤히 보이는 2층 입구에 있는 루터의 방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가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와 여러 목소리가 들렸다.

“대마법사님도 오신다며! 너도 참석하라니까?”

“하, 하지만 제가 낄 자리가…….”

그토록 바라던 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신은 하나씩, 곤두세웠던 신경을 제어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카신 님도 아시는 분들이 있을 텐데 담소도 나누고 친해져야죠!”

“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감이 좋은 건지, 아니면 운이 좋은 건지 루터는 카신의 앞에서 말과 행동을 무척 조심했다.

어림짐작으로 평소에 루터가 히나에게 막 대하는 건 알고 있었다. 예민한 성격만큼이나 만만한 히나에게 그 까칠함을 드러낼 거라는 예측은 역시나 적중했다.

‘감히 나의 히나에게.’

하지만 단순히 예측한 것과 직접 듣는 건 또 달랐다. 심술궂은 저 주둥이를 확 꿰매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대마법사님! 혹, 루터의 초대로 오신 겁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온 베라미를 무시한 채 카신은 문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베라미 오라버니께서…….”

“형은 형이고! 아, 가기 싫으면 방에 틀어박혀 있던…… 으악!”

“도련님!”

짜증스럽게 말하던 루터가 카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의자째로 뒤로 넘어갔다. 루터를 꾸며주던 하녀들이 다급히 그를 부르다 카신에게 눈을 돌렸다.

“카신 님?”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던 히나가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다.

최근 들어 히나의 볼에 살이 더 올랐다. 카신은 생뚱맞게도 예전에 별궁에서처럼 히나와 조만간 식사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음식을 섭취할 필요는 없지만,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녀의 입에 음식을 차곡차곡 넣어주고 싶었다.

“히나, 어째서 이 방에 있는 거지?”

카신은 질문을 하며 히나가 아닌 루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하녀들이 같이 있다고는 하나 히나가 남자의 방에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 사이가 진짜 피를 나눈 오누이 관계라 해도 말이다.

“도, 동생이라도 여자애 방에 제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제가 불렀…….”

루터는 최대한 억울한 표정으로 해명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 어떤 해명을 해도 좋은 결과를 얻을 것 같지 않았다. 입을 열어 쓸데없는 것에 꼬투리를 잡혀 더 혼날 바엔 차라리 그냥 입 다물고 억울하게 맞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역시나 카신의 눈초리가 더 날카로워졌다. 무시무시한 시선에 루터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나름대로 명망 높은 귀족가에 태어나 살면서 이렇게 억울한 일을 겪고도 변명 한마디 못 할 줄이야.

히나의 방에 들어가지 말라 했던 건 카신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한참을 고민하다 히나를 자신의 방에 부른 것이었다.

괴롭히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도와주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설명한다고 해도 카신의 화는 풀어질 것 같지 않았다. 루터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오라버니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왔어요. 그런데 왜 벌써 오셨어요?”

다소 이상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게 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히나는 천진한 얼굴로 잔뜩 긴장한 채 버벅대는 루터 대신 설명했다.

“아직 파티는 시작하지 않았는데…….”

히나를 향한 카신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루터는 억울했지만, 결코 항의하지 않았다. 이미 눈엣가시로 찍혀 있으니, 무슨 말을 해도 밉게 보이리라. 그는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참석하지 않니?”

카신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 히나를 보며 물었다. 우물쭈물거리며 대답을 피하는 그녀의 행동에 카신의 눈이 다시금 루터에게 향했다. 어서 이에 대한 해명을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오랫동안 우상이었던 대마법사가 필요할 때 찾는 존재가 된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앞날이 캄캄하기도 했다. 루터는 겨우 억지 미소를 지으며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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