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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48화 (48/128)

#48.

“대마법사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때였다. 베라미가 다가와 조심스레 물으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히나와 카신을 번갈아 쳐다봤다.

설마 하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지만, 베라미는 곧 두 사람이 아무런 관계가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제게 말씀하십시오, 대마법사님.”

카신의 시선이 잠시 베라미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 시선은 바로 히나에게 돌아갔다.

“히나, 네가 날 초대했으면서 파티에 참석하지 않을 셈이었니?”

카신은 베라미를 철저히 무시했다.

히나는 고개를 숙이며 베라미와 카신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카신이 어째서 뭐든 얘기하라는 베라미가 아닌 자신에게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누가 널 파티에 못 오게 한 것이니?”

의구심을 가진 베라미가 들으라는 듯, 카신은 불쾌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베라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어제 히나에게 퍼부은 폭언이 그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아, 아니에요!”

“아닙니다!”

히나와 루터가 떼창을 하듯, 동시에 부정했다. 하지만 카신의 싸늘한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어째서 파티에 오지 않으려는 거지?”

카신이 화를 내고 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준비하려고 했어요.”

입술을 달싹이던 히나는 베라미를 힐끗 보려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늘의 주인공인 베라미가 원하지 않는데 참석을 해도 되나, 싶은 걱정이 들었다.

“아버지가 미리 드레스도 주문했습니다, 교수님! 참석하지 않을 리가요. 그, 그렇지, 형?”

말끝을 흐리며 다시 어깨를 움츠리는 히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루터는 다급히 히나의 등을 밀며 베라미에게 물었다.

이 거짓말을 들킨다고 해도 대마법사가 히나의 앞에서 화를 내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카신이 화가 많이 나지 않았다면 말이겠지만.

“그, 그럼. 너도 어서 준비해야지.”

카신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며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툭툭.

이 살벌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히나밖에 없었다. 루터는 카신이 보이지 않게 히나의 등을 몰래 치며 눈치를 줬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아직 파티가 시작하려면 멀었잖아요.”

다행히 루터가 보낸 신호를 알아들은 건지 히나가 카신에게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높은 구두가 아직 익숙지 않잖니? 마법을 걸어주러 일찍 왔단다.”

방금 전까지 싸늘했던 시선은 히나에게 닿자마자 부드러워졌다.

“어서 준비하렴. 마법을 걸어주마.”

“네! 금방 준비하고 나올게요.”

루터는 다급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히나를 보고 뒤늦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히나가 없어져 버리자마자 급격히 무거워지는 공기에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여긴 내 방이라고!’

카신의 싸늘한 시선이 천천히 루터에게 닿았다. 루터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며 히나가 나간 문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나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무서웠다.

“리베리아 군.”

“네, 네!”

“히나를 이용해서 나를 불러내다니, 간이 부었구나.”

“히익!”

루터는 다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카신은 루터에게 어떠한 해를 끼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루터를 한 번 스윽, 훑더니 이번엔 베라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아하니 히나를 꽤 미워하는 것 같은데…….”

베라미는 히나에게 적대적인 시선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일방적으로 무시했고, 그나마 시선을 주었을 때는 카신이 히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였다.

귀족가에서 히나를 순순히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항상 현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린 히나가 수십 번의 상처를 받고 견뎌냈을 거라 생각하니 당장에 이곳에서 빼내오고 싶었다.

“히나를.”

베라미를 지나쳐 가며 카신은 아까부터 참았던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 미워하지 말아주게.”

사실 보다 더 확실하게 경고를 하고 싶었다.

“저 아이가 여기 있다고 내 것이 아닌 건 아니니까.”

하지만 상대는 히나가 그토록 애틋하게 여기는 가족이었다. 카신은 루터의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 화를 참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 * *

카신이 리베리아 후작가에 가 있을 시간에 세이나는 루이스를 만나고 있었다.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다른 사람도 아닌 대신녀가 처음으로 직접 청한 독대였다. 항상 황궁과 공적인 일 외에는 절대 엮이는 것을 피했던 세이나가 적극적으로 알현을 요청했다.

카신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루이스도 못내 불안했던 참이었다.

“바쁘신데 시간을 빼앗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네. 너무 의외라서 조금 놀란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게.”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히나를 이용하여 카신을 별궁 밖으로 끌어냈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왜 그렇게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해?”

어릴 적, 황태자였던 루이스는 카신에게 찾아가 수없이 많은 질문을 했었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요즘 제게 질문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궁금한걸?

카신은 처음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루이스를 귀찮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호감을 품기도 했다. 그건 그의 뒤바뀐 태도에서 알 수 있었다.

옆에서 말을 걸어도 무시하던 카신이 어느 순간부터 루이스가 뛰다가 넘어질 때면 마법을 걸어 잡아주기도 했다. 시선을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제게 왜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모르겠군요. 지루한 삶을 억지로 이어가는 늙은이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루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영악했다. 카신의 아주 작은 변화를 본인보다도 더 빨리 알아챘다. 그가 귀찮은 티를 내도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카신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싶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을 알게 되면 나중에 친해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처음에는 대마법사라는 존재가 궁금해서 찾아갔고, 후에는 직접 본 카신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홀려 그토록 매달렸다. 그때는 이익보다도 대마법사라는 신비로운 존재에 대한 관심이 앞서던 때였다.

세상이 전부 지루하다는 카신이 자신으로 인해 즐거워졌으면 하는 오기가 생겨 간 것도 있었다. 당시는 제국의 황태자로 태어나 원하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오만함에 똘똘 뭉쳐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지루한 삶이라고 하니까. 세상은 지루하지 않은데 말이야.”

지금은 그 어떤 질문을 해도 잘 대답해 주지 않지만, 그때의 카신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을 많이 해소해 주었다.

“나는 그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는걸. 그러니까 말해줘. 왜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해?”

아무런 생각 없이 궁금한 대로 쏟아냈던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때 카신에게 들은 대답 중에 건진 게 많았다. 비록 카신은 자신에 대해 많은 걸 말한 그 시기를 후회하고 있는 듯하지만.

카신도 그저 남들보다 조금 영특한 어린아이였던 루이스가 자라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부리는 영악한 황제가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아니, 애초에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대마법사라는 존재에 살짝 호기심을 갖다 그만둘 거라 단순히 넘겼을 것이 분명했다.

“저는 귀가 아주 좋습니다. 눈도 좋지요. 공기를 느끼는 피부도 많이 예민합니다.”

“응?”

“모든 오감을 발달시켰습니다. 아주 멀리서 들리는 소리도 제게는 옆에서 듣는 것처럼 가깝게 들리지요.”

“그런데?”

카신은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지금 생각하면 항상 알 듯 말 듯 한 대답을 했던 그는 눈을 말똥말똥 뜨며 조금 더 구체적인 대답을 바라는 어린 황태자의 질문에 많이 당황스러워했던 것 같다.

루이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계속 대답을 해줬던 이유는 아마 아이를 대하는 것에 익숙지 않아서일 것이다.

“시끄럽습니다. 발소리 하나하나, 피부에서 느껴지는 기척들, 귓가에 들리는 커다란 소음. 그래서 싫습니다. 밖에 나갈 때마다 모든 오감을 제어하는 마법을 걸어도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목소리에도 불쾌감이 감돌고 있었다. 어린 루이스의 눈에도 그때의 카신이 얼마나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지 피부로도 느껴졌다.

“그렇게 잘 들리고, 잘 느껴지면 내가 올 때마다 미리 알 수도 있어?”

“태자 전하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오니 더 잘 알 수 있지요. 항상 시끄러우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제 별궁에 오기 전에 미리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마법을 쓰고 있습니다.”

아마 카신은 이제 더는 오지 말라며 돌려 말한 것이리라. 하지만 어렸던 루이스는 그 속내까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자신은 웃음이 나올 만큼 너무 순수했다.

“그럼 이제부터 그대의 별궁에 놀러 올 때는 호위와 시녀를 최소한으로 데리고 올게.”

큰 배려를 해준 것에 의기양양해 하던 어린 꼬마를 보며 카신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가볍게 웃으며 흘렸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아이의 예상치 못한 순수한 반응이 신선해서 그랬던 것 같다. 만약 성인이었던 루이스가 그랬다면 얄?없이 쫓아냈으리라.

루이스는 카신에 대한 것이라면 살아 있는 인간 중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카신을 예측할 수 없는 존재라 여기지만 루이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세를 떠난 지 오래된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생소할 뿐이었다. 사실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단순했다.

그래서 루이스는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사람들과 엮이는 걸 워낙 싫어하니 누군가와 부딪힐 일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세인트에 들어간다고 할 때도 다른 교수들과의 교류를 철저히 피할 거라는 걸 이미 예측한 것처럼.

“그보다 무슨 일인가?”

이유는 모르지만, 카신이 신녀와 만나길 꺼려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신이 세이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카신은 굳이 음식을 꼬박꼬박 챙겨 먹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세이나와의 식사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했으며, 개인적으로 신력을 보여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혹, 이성으로 관심이 있나 싶었지만, 그건 절대 아니었다. 세이나를 보는 시선엔 분명 불쾌감이 담겨 있었다.

항상 무관심과 무시로 일관하던 카신이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일은 흔치 않기 때문에 루이스는 적잖게 당황했었다.

“폐하께 한 가지 작은 청이 있어 왔습니다.”

루이스는 웬만해선 대신전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특히나 대신녀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면 나중에 그로 인해 얻을 이익이 많으니 오히려 먼저 요구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지금은 세이나의 청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세이나가 무엇을 요구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로 인해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듣는 것조차 꺼려졌다.

“그래, 말해보게.”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지금도, 앞으로도 현실이었다.

루이스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계속 말해보라는 듯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라고 해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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