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49화 (49/128)

#49.

“마지막 날, 세인트 황궁 학교에 가는 것 말입니다만…….”

카신에 대한 말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이나의 입에서 나온 건 생뚱맞게도 세인트에 관한 것이었다. 루이스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세이나의 의중을 살폈다.

“세인트? 계속 말해보게.”

차라리 세인트에 가지 않았으면.

아마 루이스의 속마음을 들으면 선대 황제가 기함을 했으리라. 선황은 대신녀가 세인트에 방문하여 축복 기도를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부금이란 명목으로 대신전과 엄청난 뒷거래를 했으니까.

대신녀가 의례적인 황성 방문 도중에 세인트에 고작 기도를 한 번 하러 가는 것이었지만,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대신전의 가호를 받는다는 명성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번만큼은 세이나가 세인트를 방문하지 않았으면 했다.

루이스는 간절히 빌었다. 미래 황궁에서 유능한 인재가 될 학생들이 실망하겠지만, 그는 그보다 카신과 세이나가 만나지 않기를 더 바랐다.

“올해부터 학생들의 수업에 들어가 일일이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끄응. 루이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요즘 들어 두통이 오고 있었다.

“물론 대신전에서는 황궁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제 의지니까요.”

선황이 들었다면 몇 날 며칠 축제를 열었으리라. 황궁에 머물면서 고작 세인트에 형식상 기도를 한 번 해달라는 부탁도 몇 년을 압박하여 어렵게 승낙했었으니까.

루이스는 그녀가 갑자기 학생들의 반에 들어가 일일이 직접 기도를 해준다는 것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많다며 개별 방문은 거절하지 않았나?”

대신전에서 처음 선황의 요구를 거절하며 들이밀었던 이유였다. 후에 막대한 뇌물로 인해 말을 바꾸었지만 말이다.

“그 말을 한 건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세인트에 순례를 가는 것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대신전에서 세인트를 방문한 지는 이제 이십 년을 넘어가고 있지. 루이스는 시간 계산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대신전과의 뒷거래는 세이나가 신녀가 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세인트의 시험은 어렵기로 유명하다지요. 많이들 좌절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순례를 마치면 당분간 쉴 예정이었으나, 그 시간을 힘들어하는 세인트의 학생들을 위해 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엄청난 명예와 지위가 뒤따르는 만큼 세인트의 학생들은 고통받고 있었다. 대신녀, 그것도 세이나가 직접 기도를 해준다면 학생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아주 큰 힘이 될 터였다.

‘하지만…….’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부탁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카신과 세이나가 다시 만나게 된다.

‘카신은 귀찮은 걸 싫어해. 그리고 세이나도 싸움을 원하진 않겠지.’

당연한 거겠지만 대신녀인 세이나는 평화주의자였다. 카신도 귀찮은 일을 만드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둘 사이의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는 있었지만, 대놓고 싸움을 벌이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고맙네. 차후에 황궁에 아주 큰 인재가 될 학생들에게 부디 힘을 보태주게. 나도 이렇게 부탁하지.”

어차피 거절할 핑계도 없었다. 그러니 세이나가 왔을 것이다. 루이스는 찝찝한 마음을 숨기며 허락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세이나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세이나는 카신의 옆에서 히나를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히나에게 카신은 절대 안 된다.

애초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카신이 평범한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나중에 히나가 큰 상처를 받으리라.

처음 봤을 때부터 무심하기 짝이 없던 눈동자를 갖고 있었던 카신은 히나의 얘기를 할 때마다 눈빛을 바꾸었다.

유달리 히나에게서 짙은 소유욕을 드러내는 카신을 떠올리며 세이나는 표정을 굳혔다.

* * *

카신이 왔다는 소식에 뒤늦게 리베리아 후작도 달려왔다. 응접실로 이동하고 나서도 안절부절못하는 리베리아 후작과는 달리 카신은 제집처럼 편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히나와 카신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가 파티에 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히나가 양녀가 되고 나서 바로 세인트에 들어가서인지 카신과 함께 있는 모습을 계속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히나가 카신을 불러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히나에게 볼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태연하게 차를 마시는 카신과 달리 리베리아 후작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비상도 이런 비상이 없었다. 가장 놀란 건 사라였다. 서둘러 치장을 마친 그녀는 당장에 히나의 방으로 올라갔다. 뒤늦게 치장을 시작한 히나가 제시간까지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말이다.

“히나가 귀족 사회에 아직 많이 어색할 겁니다. 후작께서 많이 도와주시지요. 제가 아끼는 아이니 특별히 부탁드리죠.”

대놓고 히나를 편애하겠다는 카신의 속내를 모를 수가 없었다. 리베리아 후작은 혹여 히나가 카신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싶어 노심초사해야 했다.

“그리고 히나의 방을 좀 옮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을 말입니까?”

“너무 구석진 곳에 있더군요. 아무리 히나가 2년 동안 기숙사에 산다고 해도 주말엔 가끔 집에 올 텐데 말이지요. 참, 방은 여자아이 방답게 꾸며주시겠지요?”

카신은 온 김에 가장 큰 불만사항부터 하나씩 털어놓았다. 사실, 불만을 다 말하려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이런 일은 조급하게 굴어서 안 된다는 생각에 당장에 해결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꺼낸 거였다.

“여자아이 방이라면…….”

급작스럽게 양녀로 맞이한 히나를 위해 필요한 것만 간단히 준비했다. 바로 기숙사로 들어가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뭘 사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안 했다.

당연히 이런 건 안주인인 사라가 할 일이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귀족 영애의 삶을 산 사라가 갑자기 들어온, 신분도 불투명한 양녀를 위해 뭘 해줬을 리 없었다.

“그리고 말입니다.”

또?

리베리아 후작은 카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침을 꿀꺽 삼켰다.

“자제분께 주의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

“자제라면…….”

“루터 피안 리베리아 군 말입니다.”

루터의 이름까지 나오자마자 리베리아 후작은 한층 더 긴장했다. 루터가 전에 히나를 얼마나 못마땅해 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혹여 루터가 세인트에서 히나에게 못되게 굴거나 위험에 빠뜨리기라도 했을까 봐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리베리아 후작은 카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루터와 히나가 서로 방까지 드나들며 친하게 지내던데, 아무리 남매가 되었다고 해도 남녀가 유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카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는 정반대의 말이었다. 오히려 둘을 떨어뜨려 놓으라고 하고 있었다.

“그, 그렇군요.”

어색하게 웃는 리베리아 후작을 보며 카신은 마시던 찻잔을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척 귀찮다는 눈으로 말했다.

“슬슬 손님이 오는 모양입니다. 가서 맞이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후작?”

“네, 네! 그래야겠습니다. 대마법사께서는 편히 쉬시다 나오십시오.”

후작의 집으로 많은 기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부분 마법사여서인지 다양한 마력이 느껴졌다.

“준비를 다 끝냈으려나?”

어서 히나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파티를 준비 중인 레이디의 방에 들어가 기다리는 무례함을 보일 순 없었다. 이제부터 귀족 사회에서 어울릴 그녀를 누구보다도 귀하게 대접해 주고 싶었다.

“기대되는군.”

드레스를 입고 나올 히나를 기다리며 카신은 예민해진 감각을 둔감하게 만드는 결계를 계속 만들었다. 지금 이 들뜬 기분을 시끄러운 잡음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 * *

“정말 대마법사님이 저것, 아니, 그 히나와 친분이 있다는 거냐?”

곧바로 루터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온 베라미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못 봤어? 교수님은 히나를 엄청 특별 대우한다고.”

루터는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평소에는 존경해 마지않은 형이었다. 하지만 히나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계속 무시하니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카신이 왔다고 히나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것이 못마땅했다. 루터는 과거의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전혀 잊은 채 베라미를 보고 혀를 찼다.

“어째서 얘기해 주지 않은 거지?”

“어차피 내가 말한다고 해도 보기 전까지 안 믿을 거잖아.”

“하지만…….”

“애초에 이미 아버지가 말한 거라고. 형도 히나가 오기 전에 나랑 같이 들었잖아?”

루터의 말대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믿지 않았으리라. 사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하던 대마법사가 고작 시녀였던 여자를 위해 파티에 참석하다니.

“그보다 말조심해, 형.”

갑자기 뭔가 생각난 건지 루터가 주변을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눈은 저택을 시작으로 주변 정원까지 자세히도 훑고 있었다.

“뭘?”

“어디서 듣고 있을지도 몰라.”

한층 긴장한 루터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베라미는 이상 행동을 보이는 동생을 쳐다봤다.

“대마법사님, 귀가 얼마나 좋은데.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은 물론, 주변에도 눈을 심어놨는지 근처에서 한 말은 다 알아. 그러니까 같은 공간에 있을 때 조심해야 해.”

그래도 항상 존경하는 형이었다. 루터는 목숨을 걸고 베라미의 귓가에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진짜냐?”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루터를 보던 베라미는 대마법사의 위엄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이 있는 곳은 넓은 정원이었다. 저택 안, 응접실에서 리베리아 후작과 담소를 나누고 있을 카신이 절대 들리지 않을 거리였다.

그럼에도 루터의 말을 들으니 베라미는 옆에서 카신이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오한이 들었다.

“응. 마력을 감쪽같이 숨기고 위장도 잘해. 아무도 믿지 마. 제대로 걸리면 무조건 히나 옆에 붙어야 해.”

“히, 히나 옆에?”

“히나 앞에서는 온순해지거든.”

마치 사나운 짐승을 조련하는 법을 알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베라미는 루터의 그럴듯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쩐지 설득력이 있었다.

두 형제는 고개를 가까이 모으며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어이.”

툭. 낯선 손이 한껏 모여 있는 두 형제의 어깨에 올려졌다.

“으악!”

“흐읍!”

긴장된 공기를 뚫고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겨우 체통을 먼저 차린 베라미는 어깨에 닿아 있는 손을 홱 뿌리치며 뒤로 돌았다.

“왜들 그렇게 놀라?”

베라미는 당장에라도 아래로 툭 떨어질 것 같은 심장에 가슴을 붙잡으며 라우너를 쏘아보았다.

“라우너, 제발 부탁이니 기척 좀 하고 오라고!”

마법반이 아닌 검술반이긴 했지만, 베라미의 세인트 동기였던 라우너였다.

라우너 휴스 레베스톤. 세인트의 검술반이었던 라우너는 제국의 유일한 여공작인 아델리아 휴스 레베스톤의 외동아들이었다. 밝은 금발의 청명한 눈동자를 가진 그는 항상 아이 같은 개구진 미소를 짓고 다녔다.

“내가 왜? 일부러 기척 감춘 건데?”

기척을 숨기고 다가오는 건 라우너가 베라미에게 항상 하던 장난이었다.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베라미를 보며 라우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라미가 세인트 마법반에서 한 번의 유급도 없이 고속으로 졸업을 한 전설이라면, 라우너는 검술반의 전설이었다.

6년 만에 졸업한 베라미와 달리 한 번의 유급이 있긴 했지만, 그는 대련이 많은 검술반에서 전승무패의 기록을 남겨 검술반의 새로운 전설을 남겼다.

안타깝게도 괴물 같은 체력과 타고난 감각에도 불구하고 아주 기본적인 이론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아 유급을 했지만 말이다.

“근데 말이야. 오늘 오는 손님 중에 내가 모르는 특별한 사람이라도 있어?”

자유분방하기로는 귀족 최고를 자랑하는 라우너가 한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며 리베리아 가의 저택을 쳐다보았다.

“특별한 사람?”

베라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저택과 라우너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있을 리가 없잖아. 오늘 손님 대부분이 황궁 마법사라고 했잖아?”

“뭔가 처음 느껴보는 좋은 기운이 느껴져. 귀여운 레이디라도 온 건가?”

“레이디는 무슨. 오늘 손님은 대부분 황궁 마법사…… 너, 그런 것도 느낄 수 있어?”

특별한 사람이라면 있었다. 베라미는 저택 응접실에 있을 카신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괴물.”

라우너는 사람을 인상이 아닌 감으로 판단했다. 처음엔 그런 라우너를 베라미도 이상하게 봤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라우너가 지나가며 싫다고 한 사람들은 후에 좋지 않은 상황에 몰리거나 나쁜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베라미는 어릴 적부터 친우였던 라우너를 감이 좋은 짐승이라 칭했다.

저택 안에는 카신이 있었다. 아마 라우너가 말하는 특별한 사람은 카신이리라. 베라미는 이 먼 거리에서도 오늘도 유달리 뛰어난 감을 발휘하는 라우너를 보며 질린다는 듯이 혀를 찼다.

“정말 귀여운 레이디가 온 거야?”

“귀여운 레이디가 아니에요. 안에 대마법사님이 있어요.”

루터는 베라미의 친구로 어릴 적부터 저택에 자주 들락거렸던 라우너에게 대신 설명했다.

“대마법사님?”

“오늘 파티에 오셨다고요. 지금 응접실에 계세요.”

“네 그 괴물 같은 감에 대마법사님이 잡히기라도 한 거겠지.”

라우너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저택의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실망을 하기라도 한 건지 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어렸다.

“분명 레이디의 상큼한 기운인데.”

“오늘 손님 중에 네가 말하는 상큼한 레이디는 없으니까 기대 그만해. 들어가자. 이제 곧 시작할 거야.”

남녀 구별이 안 되긴 했지만, 대마법사의 기운을 느낀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역시 대마법사에겐 신비로운 기운이 나오나 보다, 라는 생각에 베라미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사실 우상인 카신이 뭘 해도 베라미는 감탄했으리라.

‘그런 사람에게 미움받고 있어.’

싸늘했던 카신의 눈빛을 떠올리며 베라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헛소리를 하는 라우너와 그나마 상황을 잘 알고 있을 루터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베라미의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그였지만, 어쩐지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