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50화 (50/128)

#50.

“이렇게 꾸며놓으니, 나름대로 봐줄 만하구나. 이런 드레스를 조금 더 맞춰놔야겠어.”

우아한 상아 빛깔의 드레스를 입은 히나를 보며 사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를 드러낸 오프숄더 드레스는 히나의 가느다란 체구와 늘씬한 허리를 강조하고 있었다. 허리부터 풍성하게 퍼지는 치맛자락은 상체에 큰 장식이 없어도 전체적으로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게 했다.

가슴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단정한 드레스였지만, 훤히 드러난 어깨로 인해 답답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느다란 어깨선과 움푹 들어간 쇄골은 은근히 섹시하기까지 했다. 거기다 드레스의 우아한 빛깔은 그녀를 한층 청순하면서도 발랄한 분위기로 만들어주었다.

“이 정도면 데뷔탕트 드레스로 부족하단 말은 듣지 않겠지.”

아직 여성으로 완전히 무르익지 않은 히나의 단점을 완벽하게 가리고, 장점을 최대한 부각시켰다. 앳되면서도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드레스는 가히 성공적이었다.

“머리 장식은 조금 더 화려하게 하는 게 좋겠구나. 다른 걸로 바꾸렴.”

“네, 마님.”

여타 다른 액세서리가 없는 만큼 머리 장식이 화려해야 했다. 사라는 하녀에게 자신이 아끼는 화려한 머리 장식을 가져오라 이르며 히나를 성심껏 꾸몄다.

‘이 드레스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신분이 미천한 아이를 양녀로 들이라는 명령은 터무니없었다. 대마법사가 히나와 연관이 있는 건 몰라도, 황제는 히나를 특별히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곤란한 명령을 내린 것이리라.

사라는 히나가 양녀로 들어온 날, 그녀의 치수를 재게 하여 후작가 영애가 입을 만한 평범한 드레스 몇 벌을 구비했다.

결코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황제가 특별히 대우하는 아이이니, 다른 이목을 신경 쓰기 위한 의도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히나가 황제가 여는 파티에 가거나 접견을 할 것을 대비하여 큰 금액을 주고 앞에 있는 드레스도 특별 제작했다.

이렇게 빨리 쓰일 줄은 몰랐지만, 이게 없었다면 평범한 드레스로 데뷔 무대를 치렀을 것이다. 사라는 속으로 안도했다.

‘애초에 이런 작은 파티에는 참석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변덕스러운 루터와 어떻게 친해져서 파티에 참석하려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라는 원래 이번 파티에 히나를 소개할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히나는 조용히, 필요한 곳에만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티를 내진 않았지만, 히나가 루터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적잖이 당황했었다.

히나가 오긴 했지만, 사라는 계획대로 그녀를 파티에 참석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히나는 파티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물론, 레이디로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베라미가 한 소리 하지 않더라도 사라는 히나를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대마법사까지 왔는데 참석시키지 않는다면 큰일이 날 거야.’

사실 사라는 대마법사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래서 황궁 마법사 수장이라는 남편과 나름대로 유능한 인재인 두 아들이 카신의 앞에서 그토록 벌벌 떠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라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대마법사의 소문은 들었지만, 어느 정도 과장이 섞인 거라 치부했다.

카신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인해 히나를 다급히 꾸미긴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나중에 사교계에 내보일 때 이 정도는 꾸며줄 생각이었다.

‘아무리 양녀라고 해도 다른 귀부인들이 리베리아 레이디를 우습게 여기게 둘 수는 없지.’

카신으로 인해 시기가 앞당겨지긴 했지만,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데뷔탕트에 결코 부족하지 않은 드레스도 있었다.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어.’

보통 데뷔 무대는 화려한 게 좋지만, 히나의 경우는 아니었다. 평범하게 자란 히나에게 기본적인 파티 예절을 가르친다고 해도 결코 완벽하진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작은 소규모 파티에서 데뷔하는 게 적격이었다. 다행히 오늘 열리는 파티의 규모는 크지 않으니 크게 눈에 띄지 않고 데뷔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믿기지는 않지만, 대마법사가 히나를 아낀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카신이 곁에 있으니 히나가 긴장해서 큰 실수를 저질러도, 대놓고 욕하거나 손가락질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런 점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첫 소개를 자리에 부끄럽지 않게 내보일 수 있어서 다행이야.’

한껏 꾸민 히나는 이제 막 피어난 싱그러운 꽃 같았다. 얼굴이 빼어난 미인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귀엽고 풋풋함이 돋보여서 그런지 오히려 계속 시선이 갔다. 확실히 히나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대마법사가…….’

살짝 움츠러든 어깨와 자신감 없는 표정만 아니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귀족가의 사랑스런 레이디였다. 하지만 사라는 히나가 여전히 못마땅했다.

히나가 싫은 게 아니었다. 히나 자체가 싫다기보다도 말도 없이 양녀를 들인 것 자체가 싫은 것이었다.

남편이 혼외자를 데려온다고 해도 불쾌한 판이었다. 그런데 신분도 모를뿐더러, 얼마 전까지 시녀 일을 하던 여자아이라니.

귀족가의 영애로 태어나 품위와 기품을 지키며 평생을 살았던 그녀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너 하나 때문에 오늘 오는 손님들이 우리 집안을 우습게 여겨서야 되겠느냐. 리베리아의 이름으로 밖에 나가려면 허리를 굽히거나 어깨를 움츠리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네.”

당연히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를 보는 히나를 보자니 그리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다.

귀부인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은 흔하게 일어났다. 사라도 그 흔한 귀부인 중 한 명이었다. 가문의 명예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결코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했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악의를 가졌기에 가능한 거였다. 시간이 갈수록, 악의는 물론이고 살면서 기 싸움을 해봤을까 싶을 정도로 순하고 무지한 히나를 상대로 자신이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는 풀이 죽은 히나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네가 온 날은 내게도 너무 갑작스러웠고, 어차피 졸업할 때까지 기숙사에 있을 테니 볼 일이 없을 것 같아 말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끝까지 모른 척,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 파티는 계속해서 열릴 것이며, 황궁에 데리고 가야 하는 일도 생기리라. 이렇게 찝찝한 채로 계속 지내고 싶지 않았다.

“네가 어떤 기대를 하고 우리 집까지 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를 평생 내 딸로 인정할 수 없을 것 같구나.”

“제가…… 가족이 되어서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죠?”

조심스럽게 묻는 히나의 맑은 눈동자를 보니 죄를 짓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히나에게는 낳은 정도, 기른 정도 느낄 수 없었다. 딸이 아닌데 딸로 인정할 순 없는 거였다.

“네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구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히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리 배려심 넘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라는 하녀가 가져온 머리 장식으로 단장을 마무리 짓고 있는 히나에게 정리했던 말을 차분히 꺼냈다.

“하지만 앞으로 리베리아의 이름으로 귀족 사회에 어울려야 할 네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후견인 정도는 되어주마.”

“후…… 견인이요?”

“그래, 후견인으로 말이야. 적어도 리베리아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으려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지. 그 정도는 내가 도와주마.”

히나를 후작가의 양녀로 보낸 황제의 의도도, 고작 시녀였던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대마법사의 의중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리베리아 후작가의 안주인으로서 그녀는 히나를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내게 물어보렴. 그리고 앞으로 주말엔 기숙사에만 있지 말고 가끔은 집에 와서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거라.”

“……제가 집에 와도 되나요?”

가족이 되어준다는 말도, 따뜻한 애정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 와도 되냐고 묻는 히나의 순한 눈망울은 기쁨에 일렁이고 있었다.

사라는 순간 부끄러워졌다. 아직도 히나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리베리아로서 부끄럽게 굴지 말라는 딱딱한 말 한마디에, 소속감이 있다는 걸 깨닫고 기뻐하는 그녀를 보니 그간 그녀를 미워하고 쌀쌀맞게 내친 것이 창피했다.

“흠흠, 네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다. 그저 우리 집안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야.”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사라는 시선을 돌렸다. 이런 변명을 하는 자신의 어른답지 못한 행동에 얼굴이 붉어진 탓이었다.

히나는 아이가 아니었다. 이제 막 성년이 지났다고는 하나, 그래도 어엿한 성인이었다. 하지만 히나를 보고 있으면 마치 무지한 아이를 괴롭히는 못된 어른이 된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저, 열심히 할게요! 절대 부끄럽게 보이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항상 자신 없는 얼굴로 있던 히나가 당차게 포부를 밝히자 앓던 이가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후련했다.

“그, 그리고 이렇게 꾸며주셔서 감사합니다.”

치맛자락을 들며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히나를 보며 사라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를 입고 자연스레 인사를 하는 예절부터 가르쳐야 할 것이 천지였지만, 어쩐지 이대로도 괜찮다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제 그만 가자꾸나.”

“네!”

히나의 어색한 걸음걸이가 거슬렸지만, 그건 대마법사가 마법으로 해결해 줄 거라고 남편이 따로 전해주었다. 사라는 이미 시작했을 연회장에 가기 위해 앞장섰다.

벌컥!

“야! 거긴……!”

하녀가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뒤이어 베라미의 다급한 목소리도 이어졌다.

“어…… 실례했습니다.”

라우너는 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린 사라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평소에 라우너에게 품위가 없다며 그리도 잔소리를 늘어놓던 사라는 오늘도 어김없이 눈을 가늘게 뜨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필이면 깐깐함의 대명사인 리베리아 후작 부인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만약 리베리아 후작 부인이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어머니께 얘기라도 한다면…….

“베, 베라미! 그렇게 나를 갑자기 밀면 어떻게?”

“내가 언제…….”

남들의 기준에서는 무척 어색한 행동이었지만, 라우너는 자신이 위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넘기었다고 생각했다.

“어, 어서 내려가…….”

갈 곳을 잃은 채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문고리를 닫으려는 그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라우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니. 아무리 네가 어릴 때부터 이 집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지만, 오늘은 파티가 열리는 날인데 무례하다고 생각되지 않니?”

사라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라우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큰 보폭으로 사라를 지나쳤다. 그의 걸음이 정확히 히나와 한 발자국 차이 나는 곳에서 멈췄다.

“라우너, 어서 나가자.”

베라미가 화가 난 사라를 보고 뒤늦게 라우너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평소에 깐깐한 사라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기도 잘하니, 라우너가 어련히 잘 빠져나올 거라 여겼다. 하지만 라우너는 오히려 방 안으로 들어가 사라의 화를 더 돋우고 있었다.

“여긴 이제 네 방이 아니라고.”

지금 히나가 쓰고 있는 방은 평소에 라우너가 놀러 왔을 때 내주었던 손님방이었다. 베라미는 단순히 라우너가 자신이 쓰던 방으로 들어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라를 보고 도망가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 여겼다.

“파티가 시작됐다고. 어서 가자.”

라우너를 쫓아 방으로 들어온 베라미가 오늘따라 이상 행동을 하는 친우를 데리고 가려 했다.

“찾았다.”

아무리 베라미가 팔을 잡고 뒤로 끌어도 라우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늘의 라우너는 정말 이상했다. 사라의 못마땅한 핀잔에도, 어서 나가자는 자신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던 라우너는 생뚱맞은 말을 꺼내고 있었다.

“뭘 찾았다는 거야?”

베라미의 시선이 라우너의 큰 키와 체구에 가려졌던 히나에 닿았다. 그리고 못마땅한 목소리로 라우너에게 한 소리를 꺼내려고 했다.

덥석.

라우너가 겁먹은 눈을 한 채 한껏 경직되어 있는 히나의 두 손을 잡았다.

베라미는 하려던 말도 까먹고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쳐다봤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 라우너는 정말이지 예측 불허의 행동만 연달아 했다.

“너, 나랑 결혼하자.”

방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꽁꽁 얼어붙었다.

이번 기회에 라우너의 집에 한 소리를 하려던 사라도, 친구를 어서 데리고 나가려던 베라미도 경악에 찬 눈으로 라우너와 히나가 마주 잡고 있는 손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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