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51화 (51/128)

#51.

“저기 이 손 좀 놓아주세요.”

결코 깨질 것 같지 않은 정적을 가장 먼저 깬 사람은 다름 아닌 히나였다.

아까부터 라우너가 꽉 잡고 있는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빠지지 않았다. 손가락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아, 미안.”

라우너가 다급히 히나의 손을 놓았다.

‘잘못 들었나?’

그래, 잘못 들은 거야. 베라미는 자신의 귀가 잘못 들은 거라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는 라우너가 히나에게 결혼을 하자고 했을 리 없었다.

“그보다 어때? 나랑 결혼하자니까?”

어서 라우너를 끌고 가려는 순간, 다시금 들리는 프러포즈에 베라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라우너.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너무 심하다는 생각 안 드니? 결혼이라니. 너, 지금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고 그러는 거니?”

보다 못한 사라가 라우너에게 한 소리 했다. 이 방이 아무리 라우너가 자주 쓰던 방이라고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미리 말해주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행동은 너무 무례했다.

평소에도 라우너의 행동에 불만이 많았던 차였다. 라우너가 공작가의 자제이고, 베라미의 절친한 친구라고는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

사라는 이참에 라우너에게 제대로 한 소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난 아니에요. 저, 얘랑 진짜 결혼할 거예요.”

항상 장난기 넘치던 라우너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강제로라도 끌고 가려던 베라미가 일순 모든 동작을 멈췄다.

“어머니께서도 상대가 귀족이기만 하면 누구건 상관없다고 하셨는걸요. 설마…… 귀족이 아닌 건 아니죠?”

그건 조금 곤란한데. 작게 중얼거린 라우너가 난감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하아, 라우너. 내가 전에 말했지? 아버지가 양녀를 들였다고.”

“아! 폐하를 꾀어내서 귀족이 되려고 너희 집에 들어온 영악한 계집…… 읍!”

베라미가 다급히 라우너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살며시 시선을 틀어 히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이제껏 히나의 앞에서 그녀를 비꼬긴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험담을 할 생각까진 없었다. 상대를 앞에 두고서라면 모를까 뒷말을 하는 건 어쩐지 비겁했다.

베라미는 나름대로 귀족 신사로서 품격을 지켜오며 살았다. 뒤에서 남의 뒷담을 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라우에겐 어릴 때부터 친한 친우였기 때문에 속상한 마음에 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겐 히나에 대한 얘기는 일절 하지도 않았다.

“설마 얘가…….”

눈치 없는 라우너가 뒤늦게 리베리아에 들어온 양녀가 히나라는 걸 깨닫고 난감함을 표했다.

“그만 가자. 파티 시작했잖아.”

웬만하면 남의 험담을 하지 않은 베라미가 하도 영악한 계집이란 말을 해서 아주 표독스럽고 욕심 많게 생겼을 거라 속단했다. 그래서 당연히 앞에 있는 순하디순한 히나는 사라의 손님이라 둘이 따로 담소를 나누는 거라 여겼다.

“으응, 가자.”

레베스톤 공작은 귀족 중에서도 가장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로 유명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할 일이 많으면 한 번씩 업무 따위는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간 전적도 있었다.

그런 집안에서 차기 공작으로 자유분방하게 큰 라우너 또한 태어날 때부터 남들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살았다.

특히나 기사단에 있는 그에게 섬세한 배려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덕목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당장에 해야 했고, 굳이 누군가를 조심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여태껏 그의 태도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라우너는 눈앞에서 당장에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히나를 발견하고는 처음으로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깨닫고 풀이 죽은 채 사과했다.

“어머니, 준비가 다 끝났나요? 대마법사님이 히나의 준비가 끝난 것 같으니 데려다 달라고…….”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싸늘한 분위기를 느낀 루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뒤따라오던 카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절대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스윽.

루터를 지나쳐 카신이 앞으로 걸어갔다. 카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준비는 다 된 거니? 네게 마법을 걸어주러 왔단다.”

큰일이 날 거라는 루터의 걱정과는 다르게 카신은 평소와 다름없이 히나에게 말을 걸었다.

히나의 맑은 눈동자가 카신에게 닿았다가 라우너에게 향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길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저를 마음에 들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완벽한 귀족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아, 으응.”

방금 전까지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얼굴로 있었던 주제에 히나는 무척이나 차분한 목소리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곤욕스런 목소리로 대답한 라우너에게 고개를 돌려 카신을 응시했다.

“마법을 걸어주신다고 한 건 감사드리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 같아요. 카신 님이 없을 때마다 제대로 걷지 못한다면 큰일이잖아요. 넘어질까 걱정되긴 해도 하루빨리 적응하고 싶어요.”

카신의 눈에 일순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카신은 마법을 걸어주는 대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법을 걸어주지 못한다면 직접 에스코트라도 해줄 생각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필요해진다면 말하거라.”

히나가 모든 것에 자신을 의지하길 바랐다. 그가 없다면 아무것도 못 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자립하고 싶어 하는 히나를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네!”

망설이다 손을 내밀던 전과 달리 히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카신은 그녀의 변한 태도에 만족하자며 스스로를 달랬다.

카신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히나를 보며 베라미는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아주 짧은 시간, 몇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받은 기분이었다.

“너…… 실수한 거야.”

“미안.”

눈치 없는 라우너가 이렇게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베라미의 핀잔에 라우너도 반성을 하는 것인지 풀이 죽은 얼굴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래도 말이야. 네 동생이 됐으면 귀족이긴 한 거잖아. 네 동생, 나한테 시집보내 주면 안 돼?”

“너 아직도…….”

“라우너, 그 말 진짜로 하는 소리니?”

계속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었던 사라가 차분히 물었다.

“제가 아무리 그래도 제 결혼 문제로 장난칠 리가 없잖아요.”

“어째서 이제 처음 본 히나랑 결혼을 하겠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구나.”

“그건…….”

라우너의 시선이 히나가 나간 방향으로 향했다.

“같이 있으니까 뭐랄까……. 좋은 기분이 들어요. 멀리서부터 느껴졌는걸요. 그래서 좋아요.”

사라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진지한 라우너를 살폈다. 저와 눈이 마주치면 도망가기 바쁜 라우너가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하는 걸 보니 진짜인 듯했다.

차기 공작인 라우너라면 일등 신랑감이었다. 제멋대로인 라우너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불만을 쏙 들어가게 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겸비했다.

만약 히나가 라우너와 결혼한다면 가문은 물론, 히나 개인에게도 무척 좋은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저 아이는…….’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카신의 존재랄까.

“양녀면 아무튼 귀족이란 거잖아요! 어머니는 제가 잘 설득할 테니, 부탁드려요.”

떼를 쓰듯 조르는 라우너를 보며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한 루터가 기겁을 한 채 다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라우너 형, 히나는…….”

“저 아이는 양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귀족 사회의 결혼 제도는 잘 모른단다. 그러니 네가 한번 잘 꾀어내 보렴.”

루터의 말을 자르며 사라가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뭐, 어떠니. 귀족 사회에 들어오길 선택한 건 저 아이지 않니? 그러면 당연히 귀족과 짝을 맺어야지.”

두 아들의 경악 섞인 목소리에도 사라는 냉철하게 말을 이었다.

황족 다음으로 최고의 권력을 가진 것도 모자라, 규율과 규범에서 가장 자유로운 귀족이라면 평민 출신의 히나에겐 최상의 혼처였다.

귀족 사회의 정략결혼에 대해서 잘 모르는 히나에겐 갑작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나중에 적응을 하면 혼처를 알아봐 줘야 했다. 그 시기가 조금 빨리진 거라 생각하면 이상할 건 없었다.

“라우너라면 신분에 손가락질 받을 일도 없으니 저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다. 라우너, 네 덕에 내 수고를 덜었구나.”

히나의 혼처를 알아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인 리베리아 후작가가 뒤에서 버티고 있다지만, 히나는 양녀였다.

리베리아의 이름을 생각하면 양녀라고는 하나 히나를 아무 곳에나 시집보낼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귀족 자제 중에 양녀인 히나를 받아줄 집안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어차피 대마법사는 저 아이를 특별히 후견하는 정도로만 생각할 테니, 오히려 더 좋아하겠지.’

아주 오랜 시간 살았다는 것치고는 대마법사의 용모가 젊긴 했지만, 사라의 입장에서 카신은 조상님 정도의 어르신이었다. 카신이 히나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사라는 단순히 그렇게 치부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베라미, 네 동생 이름이 히나라고 했지? 나 먼저 내려간다!”

히나를 보기 위해 쌩하니 내려가는 라우너를 보며 루터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어쩐지 아주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 *

“히나, 레베스톤 공작의 아들과 무슨 얘기를 했니?”

히나를 데리고 홀로 향하던 카신이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히나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이든 그냥 넘기려고 했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레베스톤 공작의 아들이 누구예요?”

히나가 순진무구한 눈으로 라우너가 누구냐고 되묻자, 카신은 조금 더 편해진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까 네 앞에 있던 사내 말이다.”

“아! 별 얘기 안 했어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히나로 인해 카신은 속으로 안도했다. 소란스러운 연회장 소음 때문에 모든 감각에 몇 겹의 제어 마법을 펼친 것이 후회됐다. 싸늘한 분위기는 읽었지만, 안타깝게도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일렁이는 히나의 눈동자를 보고 혹여 남들 앞에서 눈물이라도 보일까 싶어 무작정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히나가 우는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남이 그녀를 울리는 걸 용납할 수도 없었다.

“제게 청혼을 하셨는데, 거절했어요. 그게 다예요.”

“그렇구나, 청혼을……. 잠깐, 지금 뭐라고 했지? 청혼이라고?”

“네, 청혼이요. 농담 같은 거였지만요.”

아마 절 괴롭히려는 걸 거예요. 히나는 입안에 맴도는 말을 삼키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신분 상승을 하고 싶다는 목적은 애초부터 갖고 있지도 않았다. 리베리아 후작가에 양녀로 들어온 건 단순히 가족이 갖고 싶어서였다. 후작가가 아닌 가난한 집안의 양녀라고 해도 그녀는 기쁘게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도 악의는 없었잖아. 그게 어디야.’

세인트 생활을 하고 나서 히나는 깨달았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처음에는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억울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하지만 본의 아닐지언정 그녀는 남의 시샘을 받을 만큼 많은 걸 받았다.

“제가 너무 경직되어 있으니까 농담을 하신 걸 거예요.”

세인트에 있는 학생들을 보고 깨달았다. 신분을 떠나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더 올라가기 위해 매일같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루터도 마찬가지였고, 얄미운 말만 하는 줄리아도 그랬다.

선택에는 항상 책임과 대가가 따른다. 히나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귀족이 되었고, 세인트에도 들어왔다. 따지고 보면 죄를 짓고 이러한 대접을 받는 거였다.

“히나, 귀족이 되어서 싫으니?”

카신은 히나가 싫다고 하길 바랐다. 그녀가 그렇다고만 대답하면 당장에라도 후작가를 없애든 제국을 없애든 해서 그녀를 빼내올 작정이었다.

“평민 가족이 갖고 싶다면 내가 찾아봐 주마.”

히나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둔 이유는 그녀가 가족이 생겼다는 말에 무척 기뻐해서였다. 그녀의 눈물을 떠올릴 때마다 몇 번이고 엎어버리려던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귀족인 게 싫다면 지금 말하거라.”

그는 루이스와 특별한 관계였다. 카신은 굳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만하면서도 순수했던 어린 루이스가 성인이 되고, 황제가 되어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보면 가끔 흐뭇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히나를 위해 루이스를 죽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히나가 먼저였다. 루이스가 히나를 다시 빼가는 걸 반대한다고 하면 카신으로서는 둘 중 한 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는 힘들면 힘들다고 편히 말해도 된다.”

히나의 말에 의해 귀족 사회가, 어쩌면 제국이 바뀔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떤 말을 하든 히나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리라. 카신은 히나의 대답을 차분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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