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아직 싫은지 좋은지 모르겠어요.”
“싫은지 좋은지 모르겠다고?”
“사실 귀족이 될 거라 생각해 보질 않아서요. 계속 기숙사에 있기도 했고. 아직은 제가 귀족이 됐다는 것도 실감이 잘 안 가요.”
히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가 생각했던 가족이 아니라서 조금 슬프기도 하고, 능력도 없는데 분에 넘치게도 세인트에 들어가서 뭘 하는 건가 싶기도 해요.”
감당해야 하는 대가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베라미가 라우너에게 한 말을 듣고 충격을 받긴 했다. 어째서, 하필이면 왜 귀족의 양녀가 된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전 진짜 가족도 아니니, 처음부터 가족처럼 굴 수 없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히나, 네가 원한다면 널 반겨줄 가족을 만들어줄 수도 있다.”
히나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밝고 당찬 미소만 보였던 히나는 언제부턴가 한 번씩 보는 사람도 슬프게 하는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카신 님. 하지만 저, 노력해 보고 싶어요.”
“노력?”
“아직 저에 대해 아무도 잘 모르잖아요?”
처음엔 가족들에게 멸시를 받는 이 상황을 원망했다. 그녀가 원해서 귀족이 된 것도, 세인트에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가족을 갖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비난을 받아야 하나 싶었다.
“이건 네가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럴 때마다 세인트 상급반 학생들과 카신의 내기 때 루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베라미의 싸늘한 목소리와 사라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면 갈 길이 멀었지만 말이다.
“그래, 후견인으로 말이야. 적어도 리베리아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으려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지. 그 정도는 내가 도와주마.”
아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 히나의 입가에 조금 더 밝은 미소가 지어졌다.
리베리아 후작도, 후작 부인도, 그녀를 조금씩 인정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만두는 건 한 발짝 다가와 준 그들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특히나 최근 들어 툴툴거리며 챙겨주는 루터를 위해서라도 조금 더 힘내야 했다.
“조금 더 노력하고 싶어요. 노력해서 저에 대한 오해도 풀고 싶고, 가족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제 힘으로요. 그래야 될 것 같아요.”
심각하게 고민하던 카신은 당차게 말하는 히나를 보고 픽 웃었다.
“그래.”
처음 히나가 첩자로 왔을 때가 절로 떠올랐다. 그녀는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감히 혼자 있지도 않은 대마법서를 훔치러 들어왔었다. 터무니없는 행동도 서슴지 않고 했으며, 막막할 텐데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카신은 히나의 해맑고 순수한 미소도 좋았지만, 항상 열심히 노력하는 그녀의 면모에 빨려들었다.
참으로 대견했다. 작고 여린 몸으로 그녀는 항상 엄청난 힘을 쏟아냈다.
카신은 손을 올려 히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려다가 멈칫하며 내렸다. 단정히 틀어 올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지 못해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히나는 첩자로서도 꽤 소질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대마법서를 훔치지 못했지만, 히나는 대마법사의 마음 자체를 훔쳐 갔다. 그녀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제국은 물론, 세계를 휘어잡을 수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루이스가 히나에게 호감을 사지 않았다면, 히나가 조금 더 영악했더라면, 풀토 공작이 그녀를 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이용하려 했다면…….
카신은 방금 전까지 히나를 위해 제국까지 어떻게 하려고 했던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지금쯤 제국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내게 푸념이라도 하렴. 언제든지 들어줄 테니.”
조금 더 의지해 주고 기대주길 바랐는데. 히나가 기특하면서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카신은 대놓고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돌려 말했다.
파티가 시작되고 시간이 꽤 흘렀다. 오늘 리베리아 후작이 히나를 정식으로 소개한다고 했으니, 더 늦기 전에 서둘러 데리고 가야 했다.
“난 언제나 네 편이란다, 히나.”
폭삭.
그만 연회장으로 가기 위해 한 발짝 떼려 할 때였다. 하지만 카신은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품에 꼭 안기는 따스한 체온이 그의 사고를 모두 정지시켰다.
“가, 갑자기 증상이 심해졌어요. 증상이 심할 땐 안아주신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이렇게 있으면 안 될까요?”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히나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불그스름한 뺨과 탐스러운 입술을 보며 카신은 다급히 숨을 참았다.
“……안 될 리가.”
머릿속에서 리베리아 후작이 파티가 무르익기 전에 데리고 와달라 했던 부탁이 떠올랐지만, 카신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 * *
손님 대부분이 황궁 마법사인 소규모 파티였다. 친분이 깊은 이들끼리 모여 파티는 당연히 화기애애해야 했다.
그러나 파티의 분위기는 애매모호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할 때지만, 홀은 어수선하기만 했다.
리베리아 후작가에 혼외자도 아닌 평민 출신의 양녀가 조용히 소개된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 양녀 옆에 있는 대마법사의 존재 때문이었다.
‘어째서 내게 이런 시련이 떨어지는 것일까.’
루터는 어쩔 줄을 모르며 카신의 심기를 살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파티의 분위기를 심각하게 고조시키는 데 한몫 단단히 하고 있는 의외의 인물을 쳐다보았다.
“저기 아까는 미안했어. 나는 네 오라비인 베라미랑 어릴 때부터 엄청, 아주 절친한 친구인 라우너야.”
“아…… 네.”
라우너가 히나의 손을 덥석 잡으며 억지로 악수를 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카신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 걸까? 루터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강철만큼 단단한 라우너의 신경이 부럽기도 했다.
“세인트에 다닌다며? 그럼 내 후배가 되겠네. 나도 세인트 졸업생이거든. 검술반이지만.”
“검술반이요?”
너는 왜 검술반에 관심을 갖는 건데! 루터는 또 다른 눈치 꽝인 히나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고 폭발할지 모르는 카신을 보고 있자니 오금이 저렸다.
“응! 졸업하기 훨씬 전부터 스카우트돼서 지금은 황궁 기사단에 있지. 어때? 대단하지?”
어떻게든 히나와 이어지려는 라우너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경계만 하던 히나가 아이처럼 신이 나 자랑하는 라우너에게 어느 순간부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와아, 대단해요. 세인트를 졸업하기 전부터 스카우트라니.”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 히나를 보며 카신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휘었다.
“히나, 나도 황궁 마법사단 소속이란다.”
“흐읍!”
다급히 숨을 들이마시는 루터에게 카신의 못마땅한 시선이 닿았다. 루터는 곧바로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척했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한데 카신의 반응을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설마 부러워서?’
카신이 어째서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황궁 마법사단 소속인 걸 밝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마법사는 그저 그 호칭만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굳이 대마법사가 자신이 황궁 마법사단 소속인 걸 밝혀서 자랑할 이유가 없었다.
설마하니 대마법사씩이나 되는 카신이 대단하다는 히나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러기엔 카신의 얼굴이 무척 진지했다. 굳이 여기서 이 타이밍에 소속을 말한 다른 이유가 딱히 없기도 했다.
“하지만 카신 님은 엄연히 따지면 따로 소속되어 있는 게 아닌가요?”
“내가 입은 옷을 보렴. 황궁 마법사들이 입은 것들과 비슷하잖니?”
베라미나 라우너처럼 대부분 연미복을 입고 왔지만, 몇몇은 카신처럼 제복을 입고 오기도 했다. 카신은 그들 중 황궁 마법사들이 입은 제복을 손가락질하며 소속감을 드러냈다.
“저는 역시 새하얀 제복이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히나가 수긍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역시 질투가 맞았어.’
루터는 확신했다. 카신은 지금 유치한 질투 때문에 여태 관심도 없던 황궁 마법사단에 소속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조금 재밌을지도.’
시련 속에 있는 아주 위험천만한 재미였다. 언제 카신의 화가 폭발하여 그 무지막지한 마법으로 저택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지만 말이다.
“있잖아, 히나라고 불러도 되지? 내 절친한 친우의 동생이 됐으니까 말이야.”
카신에게 시선이 돌아간 것이 싫은지 라우너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아까부터 라우너가 계속 베라미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며 루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애들 싸움도 이보다 더 유치할 수 없으리라. 원래부터 애처럼 구는 라우너는 그렇다 치고, 카신은 어째서 이렇게 유치하게 나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네, 편히 불러주세요. 그런데…… 저는 뭐라고 불러야 될까요?”
절친하거나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면 보통은 격식을 차려 불러야 했다. 하지만 후작가의 양녀로 들어오고 나서도 히나는 계속 신분 차별을 하지 않는 세인트에 있었다. 항상 히나라고 불리는 게 익숙한 그녀는 이상한 걸 느끼지 못하고 곧바로 허락했다.
“히나, 네가 황궁 기사단의 기사와 만날 일은 극히 드물단다. 레베스톤 공작가의 장남은 작위를 받았다고 들었으니, 굳이 부르려면 레베스톤 백작이라고 부르면 되겠구나.”
“뭘 그렇게 딱딱하게. 난 네 오라비인 베라미의 친구잖아. 그러니까 베라미처럼 오라버니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철저히 차단하려는 카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우너는 저돌적으로 구애를 하고 있었다. 카신의 심기가 최악을 달렸다. 하지만 히나의 앞에서 그는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래도…… 되나요?”
히나의 시선이 베라미에게 향했다. 아직 오라버니라고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다. 허락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베라미의 친우인 라우너에게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되나 싶었다.
“그게…….”
자신이 히나에게 오라버니인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라고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우상인 대마법사에게 미움은 물론 큰일을 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해도 문제였다. 그간 자신의 행실을 떠올리면 괜히 오라버니인 것을 인정하지 않아 반대하는 걸로 착각할 것이다. 히나가 그의 대답으로 실망하거나 슬퍼한다면 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며 베라미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절친한 친우이자 원수인 라우너를 원망했다.
동경의 대상이자 우상인 카신이 히나의 뒤에서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의 시간을 주어도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히나,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하렴.”
깊이 한숨을 내쉰 카신은 결국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 탐탁지 않은 눈으로 라우너를 응시했다.
역대 황제들도 카신에게 눈치 없이 대들지 않았다. 인간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친근한 루이스도 그가 적대감을 내비치면 바로 발을 빼냈다. 이렇게 무식하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인간은 그가 대마법사가 되고 나서 처음이었다.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단다.”
사실 히나에게 친숙한 호칭을 쓰지 말라고 몇 번이고 강요하고 싶었다. 어쩔 줄 모르는 멍청한 리베리아 후작의 장남이 곤란할까 봐 대신 대답해 준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의 눈치를 보다 안 된다고 할 베라미로 인해 히나가 상처를 받을까 걱정되어 물러난 거였다.
“네, 카신 님.”
“그런데 오늘 이렇게 차려입으니 참 예쁘구나.”
오늘의 히나는 무척 예뻤다. 한껏 치장한 히나를 보자마자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고조된 긴장감으로 인해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별궁에서 처음 드레스를 입었을 때도 참 귀엽다는 생각을 했지만, 귀부인인 사라의 손이 지나간 지금과는 또 많이 달랐다.
히나가 남들 눈에도 예쁘게 보인다는 사실이 내심 뿌듯하기도 했지만, 그녀를 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을 전부 차단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처음 소개된 자리라 많이 답답할 텐데 나와 함께 산책을 하지 않으련?”
노출된 어깨나 노골적으로 드러난 그녀의 여린 상체에 아까부터 심기가 거슬렸다.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이 힐끔힐끔 히나를 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나 라우너의 시선에서 그녀를 완전히 빼내오고 싶었다.
카신은 당연히 히나가 받아들일 거라 예상하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요, 전 괜찮아요.”
갈 곳 잃은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그보다 카신 님은 아주 오랜만에 황궁 마법사님들하고 재회하신 거잖아요? 가서 담소를 나누셔야지요.”
“난 괜찮다. 나는 너와…….”
“카신 님은 아주 위대한 대마법사잖아요. 제가 이렇게 계속 카신 님을 잡아두고 있는다면 다들 속으로 절 욕할 거예요.”
욕하든 말든. 어차피 그들이 죽을 때까지 대화도 안 해볼 확률이 더 높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내심 기대한다는 눈빛을 보내는 히나를 보니 그리 말할 수 없었다.
“어서 가세요. 저는 루터 오라버니와 함께 있으면서 파티 예절을 배우고 있을게요.”
작게 손까지 흔드는 히나를 보니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히나의 옆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카신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