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53화 (53/128)

#53.

“교수님하고 같이 안 있어도 돼?”

루터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처럼 마법사님들과 친해질 기회잖아요.”

사실 히나는 카신과 떨어지기 무서웠다. 카신이 갖고 있는 권력이나 지위를 떠나 언제부턴가 그와 함께 있어야만 마음이 편했다.

“카신 님이 조금 더 다른 마법사들과 어울렸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히나는 카신을 얽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손님으로 찾아온 대부분의 황궁 마법사들이 카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단 걸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평소에 외부에 나가는 것조차 꺼리는 카신이 이번 기회에 공통분모를 가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으면 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루터는 등 떠밀리다시피 다른 마법사들에게 가는 카신을 쳐다보았다.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카신이 사라지자마자 히나를 향한 시선이 늘어났다. 그들은 히나가 어디서 뭘 하던 아이이길래 후작가에까지 입양이 된 건가 하는 의문 섞인 눈을 하고 있었다.

“카신 님께 언제까지 폐를 끼칠 순 없으니까요.”

저쪽은 네가 그래주길 바랄걸?

루터는 답답했다. 조금 더 편한 길을 놔두고 힘든 일을 자처하는 히나가 안타깝기도 했다.

“히나, 넌 이리 오거라.”

“네!”

카신이 황궁 마법사들과 어울리자마자 사라가 본격적으로 히나를 불러 직접 주변에 인사를 시키기 시작했다. 루터는 불편한 걸음걸이를 내색하지 않으며 군소리 없이 인사를 다니는 히나를 눈으로 좇았다.

“너, 언제 쟤랑 그렇게 친해진 거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베라미가 물었다. 그 옆엔 히나의 데뷔 인사에 참견 말라는 사라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입술을 쭉 내밀고 있는 라우너도 있었다.

“친해졌다기보다…… 계속 같이 있다 보니 정이 조금 들었을 뿐이야.”

“계속 같이 있었다고? 저렇게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여자한테 고작 정이 조금 든 게 다라니. 루터, 너 이제 보니 엄청 둔하구나.”

“두, 둔하다니요!”

루터를 보며 라우너가 혀를 찼다.

“오누이 관계로 매일 본다며? 나 같으면 저런 기분 나쁜 사람이 히나 옆에 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차단했을 텐데.”

“기분 나쁜 사람?”

“응. 저기, 저 사람. 대마법사.”

베라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라우너를 쳐다봤다. 아까부터 히나에게 좋은 기운이 나온다는 표현을 하는 것부터 누구에게나 우상인 대마법사를 기분 나쁜 사람이라 칭하는 라우너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쩐지 기분 나빠.”

“쉿. 조심해, 라우너. 아무리 네가 싫어도 저분은 대마법사라고.”

카신을 보며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는 라우너를 보고 베라미가 눈치를 줬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우너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대마법사라고 해서 엄청 대단한 기운이 나올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라우너가 정말 실망한 눈으로 카신의 뒷모습을 보다가, 여기저기 인사하고 있는 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히쭉 웃었다.

“멀리 있어도 좋다. 이런 기분 처음이야.”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편안하고 포근한 기분이었다. 히나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깊은 곳이 따뜻해졌다. 그녀가 곁에 있어준다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 기운이란 거, 도대체 어떻게 느끼는 거야?”

베라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평상시 상대를 기운으로 평가하는 라우너를 응시했다. 기운은 아니었지만, 마력을 느껴야 하는 마법사인 그는 평소에 라우너가 말하는 기운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느껴지는 거라고. 나도 설명 못 해.”

느껴지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가능할까. 베라미는 항상 라우너를 보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라우너가 좋지 않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끝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걸 떠올리면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라미가 타고난 머리와 마력에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노력형 천재라면, 라우너는 노력 따위 전혀 하지 않아도 항상 톱을 유지하는 그냥 천재였다. 평소에 워낙 제멋대로 행동해서 허점이 많아 보이지만, 그는 검을 쥐는 순간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질 것 같아. 히나가 옆에 있으면 무슨 임무든 전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 정말이야?”

라우너는 내키는 대로 사는 남자였다. 그의 인생에 계획이란 없었다. 평소 대련을 즐거운 게임이라 여기는 라우너는 세인트에도 대련을 많이 할 수 있다는 말에 입학한 것이었다. 황궁 기사단에 들어간 이유도 더 재밌는 일이 많아질 거라는 모친의 말에 속아서였다.

그는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 탓에 입에 발린 소리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권력도, 야망도 없이 그저 인생을 즐기기 위해 살아가는 라우너가 이렇게 말한다는 건 히나에게 단단히 빠졌다는 뜻이었다.

“히나 옆에 있으면 다 즐거울 것 같거든.”

그 어느 때보다도 라우너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네 마음이 진심이라면 나도 도와줄게.”

“정말? 정말이지?”

시종일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던 베라미가 도와준다는 말에 라우너의 입가에 미소가 활짝 폈다.

“대신 일 제대로 한다는 말, 꼭 지켜.”

황궁 기사단에서 단장씩이나 하고 있으면서도 라우너는 가끔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땡땡이를 치는 바람에 주변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기사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많은 마법사들은 그나마 라우너와 대화가 가능한 베라미에게 책임을 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가 가능하다고 통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베라미도 한 번씩 돌발 행동을 하는 라우너로 인해 골머리를 썩던 참이었다. 어디서 굴러 왔는지도 모를 히나와 절친한 친구가 잘되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라우너를 통제할 수만 있다면 그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되리라.

“잠깐! 형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그렇게 마음대로 정하면 안 되지! 처음에 아버지가 히나는 세인트를 졸업하면 집에서 나갈 거라고 한 말, 잊었어?”

계속 듣고 있던 루터가 도리질을 치며 베라미를 말렸다.

“대마법사님을 홀리고, 폐하께 청탁을 넣어 귀족 사회까지 들어온 당돌한 아이야. 그런 애가 공작가의 귀부인 자리를 마다하겠어?”

베라미는 히나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루터는 혹여 이 대화를 들었을까 하는 마음에 카신을 힐끔 보았다. 모른 척하는 건지, 정말 듣지 못한 건지 카신이 다른 마법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며 그는 안도했다.

“아니야! 히나는 그런 걸 바라서 들어온 게 아니라고.”

“그럼 뭘 바라고 들어온 거지? 너와는 다른 이유겠지만, 나도 저런 애를 라우너의 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공작가에 시집간 히나가 나중에 더 큰 야망을 위해 라우너를 꾀어낸다면 그땐 베라미가 가만두지 않을 셈이었다.

“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며! 그러니까 안 된다고.”

“라우너에게 너무 떨어지는 아이지만, 어차피 대마법사님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추후에 라우너에게도 좋을 수 있겠지.”

“형!”

“이 얘기는 그만하자, 루터. 너도 이제 그만 파티를 즐기도록 해.”

신이 난 라우너와 멀어지는 베라미를 보며 루터는 어쩔 줄 모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누구도 카신이 히나를 특별 대우 하는 것을 깨달아도, 그 관계까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물론 루터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카신과 히나의 관계를 가장 많이 지켜본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한편 사라의 손을 붙잡고 정식으로 사교계 데뷔에 나선 히나는 차례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히나 피안 리베리아입니다.”

어색했던 풀네임도 수십 번을 반복하자 툭 치면 자동으로 나올 경지에 도달했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 것 같았다. 발끝은 익숙하지 않은 높은 구두로 인해 이제는 감각도 없었다. 꽉 조인 허리도 당장에 풀어 헤치고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소규모 파티라고 들었다. 하지만 사라에게 붙잡힌 채 몇 번을 인사했는지도 모를 만큼 사람들은 끝도 없었다.

“참으로 귀엽군요. 혹, 마법사로서 재능이 뛰어난가요?”

“아까 보니 대마법사님과 함께 있던데……. 역시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가요?”

“여자아이가 귀한 집이지 않습니까? 남편과 상의해서 들인 아이입니다.”

사라가 난감해하며 별다른 능력이 없다고 돌려 말하는 순간 그들의 눈빛이 차갑게 바뀌었다. 세인트에 있을 때보다도 더 심했다.

하지만 큰 기대와 함께 실망이 넘나드는 곳에서 계속 상처받을 수만은 없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 맞으리라.

‘그냥 카신 님 옆에 있을걸.’

아쉬운 마음에 힐끔,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카신이 보였다. 무뚝뚝한 얼굴로 간단하게 대답만 하고 있는 카신은 시종일관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더 잘 어울려서 놀지.’

카신은 그가 원한다면 모든 게 부족한 그녀가 아닌 조금 더 영특하고 보다 어울리는 사람을 사귈 수 있었다. 황제나 지금 그의 옆에 있는 황궁 마법사들처럼.

‘그러면 카신 님은 나와 멀어지겠지.’

자신이 혼자가 되더라도 히나는 카신이 조금 더 욕심을 부려 그들과 어울리길 바랐다. 그녀보다도 그의 고민을 조금 더 잘 이해해 주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길 원했다. 카신이 행복하다면 다 좋을 것 같았다.

‘그건 절대 싫어!’

그러나 상상과 현실은 달랐다. 카신의 옆에 자신이 없으니, 참을 수 없이 싫었다. 히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시선을 돌렸다.

“히나? 왜 그러니?”

사라는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히나를 보고는 조용히 물었다. 아무런 교육도 시키지 않은 그녀에게 조금 무리한 일정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어디가 불편한 거니?”

히나를 주변에 소개시켜야 하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어차피 한 번은 지나가야 할 일이니, 이참에 제대로 소개시키던 참이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은 그녀를 보니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아니에요. 잠깐 딴생각을 했어요. 죄송…….”

어깨에 닿는 따뜻한 손길에 히나의 말문이 닫혔다. 언제 왔는지 모를 카신이 그녀의 한쪽 어깨를 자연스레 감쌌다.

“후작 부인, 인사는 이쯤 하고 내가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카신은 당장에라도 히나를 데려갈 기세로 부탁하고 있었다. 아주 정중해서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역시, 대마법사님과 레이디 리베리아는 친분이 있었던 거로군요.”

“그럼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건가요?”

퍼뜩 정신을 차린 히나가 뒤에 있는 카신을 힐끗 쳐다보곤 살짝 벌어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의무는 없어 보이는군요.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사람이 많은 곳은 익숙지 않아서 말입니다.”

무뚝뚝한 목소리에는 결코 거절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그러십시오, 대마법사님.”

“가자꾸나, 히나.”

질문을 했던 사람들이 물러나는 걸 보며 카신은 히나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왔다. 조용히 따라오는 그녀의 낯빛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역시.”

사람들의 인기척을 피해 아무도 없는 곳까지 오자마자 카신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시무룩한 히나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네 표정이 어떤지 아니?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얼굴이야.”

카신은 꽤 화가 나 있었다. 갑자기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간절하게 그를 응시하는 그녀를 보자마자 참고 있던 화가 폭발했다.

“이렇게 힘들 거라면 굳이 귀족 따위가 되지 않아도 돼. 억지로 그런 구두에 발을 적응시키지 않아도 되고, 답답한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히나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그녀와 떨어지게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은 건 아니었다.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똑같은 소개를 하며 지쳐 하는 것부터 다리가 아파서, 자세가 불편해서 치맛자락을 몇 번이나 움켜잡는 것까지.

얼핏 찡그리며 언제 끝나나 하는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던 그도 짜증이 났다.

“귀족이 되어서 싫은 거니? 아니면 지금의 가족이 싫은 거니?”

어쩌면 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라우너 때문에 짜증이 난 걸 수도 있었다.

“내게 말해보렴. 솔직히 말한다면 더 편해질 거야.”

히나가 말해주길 바랐다. 전부 다 싫다고. 그만큼 그는 조급하며 짜증이 났다. 정확하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른다. 그냥 이 상황이 전부 싫었다.

“내게 싫다고 말해.”

전부 없애줄 테니까.

그의 강압적인 말에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망울이 카신에게 닿았다. 그녀의 조그만 입술이 열리는 걸 보며 카신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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