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57화 (57/128)

#57.

“히나, 그 힘은 말이다. 그렇게 중요한…… 그러니까 바로 익힐 수 있는 힘이 아니란다.”

루이스를 어떻게 할 수 없다면 히나의 마음을 돌리면 그만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황제에게 더 이상 얻어낼 건 없었다.

카신은 루이스의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히나가 있는 기숙사에 몰래 잠입했다.

“그래도 노력하려고요! 대신녀님이 저를 직접 지도해 주신다고 했어요.”

“다시 생각해 보렴. 나도 충분히 너를 지도해 줄 수 있어.”

히나가 카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에 카신은 오한이 서렸다.

“카신 님은 제 힘을 알아주지 못하셨잖아요.”

“몰랐을 리가! 내가 먼저 말했지 않아? 네게 기묘한 빛이 나타났었다고.”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셨잖아요.”

히나에 대한 건 모두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모르는 사실까지. 하지만 히나는 불신이 담긴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신은 억울했다. 그 빛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알려준 것도 그였다. 하지만 히나의 눈은 그리 말하고 있지 않았다.

“제 힘은 신력과 비슷하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신녀님께 배우는 게 맞지 않을까요?”

세이나가 히나와 가까워지는 게 싫었다. 히나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도.

“그리고 카신 님의 힘은 잘 모르지만, 신녀님의 힘과 상반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성력은 신력과 비슷한 힘이니까, 역시 신녀님께 배우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막연히 히나를 설득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항상 그를 의지하고 따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히나는 아니었다. 혼자 생각하고 가야 할 방향을 정했다. 그게 못내 섭섭했다.

오로지 자신만 의지하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까? 일부러 그녀의 옆에 혼자 처리할 수 없는 위험한 것들을 산적해 두고, 자신에게만 매달리게 하고 싶었다.

카신의 한 손에 마력이 고였다. 당장에라도 이 말도 안 되고 짜증 나는 상황을 전부 갈아엎고, 히나를 데리고 떠나고 싶었다.

“세인트를 졸업할 때쯤이면 카신 님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겠죠?”

“내 옆에……?”

손안에 감돌던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넓은 세상에서 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저 하나뿐이니,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어서 빨리 이 힘을 인정받고 싶어요.”

“그래, 그렇구나.”

힘이 쭉 빠졌다. 히나의 미래에 그가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전 평생 마법사가 될 수 없으니 마법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나 고뇌를 나눌 순 없겠지만, 그래도 저만의 힘으로 카신 님께 의지가 되어드릴게요!”

의지는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히나를 만나고 평생 헤맸던 길을 찾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도 있게 됐다. 의미 없이 살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하루를 살아가는 게 보람찼다.

“카신 님은 아주 긴 세월을 사셨고, 너무 위대하다고 주변에서 치켜세우니까 힘들어도 누구한테 투정을 부릴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카신 님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것참 든든하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어야 했지만, 얼굴이 붉어졌다.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겨우 대답한 카신은 빠르게 뛰는 심장 고동 소리를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나는 살아 있구나.’

기쁨, 슬픔, 분노, 설렘, 질투, 호기심, 안타까움…….

히나와 함께 있으면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게 느껴졌다. 더 이상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을 견디는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루에도 히나로 인해 여러 번이 바뀌는 기분이 말해주었다.

머리가 울릴 만큼 빠르게 뛰는 심장 덕에 짜릿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준 히나의 한마디에 그의 기분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보다도 카신 님, 저 이번 주말에 집에 갈 예정이에요.”

자유롭게 하늘을 날던 새가 갑자기 날개를 잃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친다면 이런 기분일까.

쑥스러움에 붉어졌던 얼굴은 순식간에 원상태로 돌아왔다. 카신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히나를 응시했다.

“어째서?”

사방이 적이었다. 리베리아가가 아니더라도 루이스가 언제 기습적으로 찾아와 히나를 파티에 초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방금 전에 알았지만, 히나는 그 몰래 루이스와 몰래 서신까지 주고받고 있었다.

“딱히 파티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만.”

히나가 예상에도 없던 파티에 두 번이나 참가한 계기로 카신은 별궁으로 오는 초대장을 모두 매번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가 초대받을 만한 파티를 추리고 엄선하여 미리 준비까지 했다.

그가 알고 있기론 당분간 마법사와 관련된 파티도, 황제와 관련된 파티도 없었다. 즉, 히나가 집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게…….”

히나가 잠시 뜸을 들였다. 수상했다. 시선을 은근슬쩍 피하는 그녀를 보며 카신은 무언가 있다고 확신했다.

“가족들과 친해지고 싶어서요. 아버지도 가끔은 가족끼리 함께 식사 자리를 만들자 하셨고, 또 간 김에 파티 예절도 미리 배워두면 좋잖아요?”

거짓말을 못하는 건 천성이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던 세이나와 달리 말이다. 물론 히나는 자신이 거짓말을 아주 제대로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카신은 미친 듯이 얄미웠던 루이스가 이번엔 부러웠다. 정확히는 인자하게 속아주면서도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 빠르게 굴러가는 그 영악한 머리가.

눈치 한 번 보고 살지 않은 카신은 이럴 때 강압적으로 정면 돌파를 하는 것 외에는 딱히 좋은 수가 없었다.

“히나, 혹시 내게 말하지 못할 것이라도 있니?”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끝까지 잡아떼는 히나에게서 진실을 듣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확실한 물증도 없는데, 그녀를 몰아붙일 순 없는 일이었다.

“제가 카신 님께 숨기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흐음.”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내려다보는 카신을 보며 히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카신을 속이는 것에 양심이 콕콕 찔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히나는 얼마 전, 루터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이번 주말에 집에 같이 가자. 내가 형에게 말해서 사랑의 묘약 따위, 해독하게 해줄게. 대신 교수님이 알면 절대 못 하게 막을 수도 있으니까, 무조건 비밀로 해야 돼.”

카신의 앞에 있을 때마다 진정되지 않는 심장 때문에 머리까지 아팠다. 전에는 어쩌다 한 번씩이었지만,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꼭 안고 싶었다.

특히 수업 도중 마법을 쓰는 카신은 너무 멋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나중에 카신의 옆에 당당히 서서 그를 도우려면 반드시 사랑의 묘약을 해독해야 했다. 아니면 무슨 일을 하든 집중이 안 되어 카신에게 폐만 끼치리라.

“그보다 이렇게 여자 기숙사에 들어오면 안 된다니까요? 들키면 큰일이니 어서 나가세요.”

“내가 들킬 리가 없지 않아.”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카신 님이 여기 계시면 제가 규칙을 어기는 게 되는 거잖아요.”

“알았다, 이만 가마.”

별로 가고 싶지 않아 하는 카신이 몇 번의 눈치를 보다 공간이동 마법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남을 속이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 * *

“교수님이 뭐라고 안 했지?”

“제가 잘 넘겼는걸요! 걱정 마세요. 카신 님은 완벽하게 속으셨으니까.”

루터는 당당하게 말하는 히나가 미덥지 못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은 카신을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순진한 히나가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속아준 거겠지.’

완전히 속였다고 생각하는 히나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추궁할 수 없었으리라. 루터도 그녀의 맑고 천진한 눈동자를 보다가 오히려 당황하거나, 솔직하지 못한 말이 나올 때가 많았다. 히나에게 무척이나 약한 카신이니 알면서도 속아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독하는 거예요? 정말 가능한 건가요?”

마차 창문으로 저택이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루터는 히나를 집에 데리고 가면서도 이게 잘하는 짓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카신이 히나에게 사랑의 묘약을 억지로 먹인 건 비겁한 짓이었다.

“그게 말이지…….”

휙!

“히나!”

“으악!”

“꺄악!”

마차 위에는 언제 올라가 있었던 것인지, 라우너의 얼굴이 갑자기 창문 위에서 훅 튀어나왔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그의 몸이 좌우로 대롱대롱 움직였다.

“놀랐다면 미안. 그보다 문 좀 열어주지 않을래? 나, 거꾸로 있으려니 구역질 나.”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루터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히나를 확인하며 떨떠름한 얼굴로 마차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라우너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루터가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난 네가 어디에 있든 알 수 있다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집에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는데, 왜 여기까지 나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예요.”

루터가 툴툴거리는데도 라우너는 세상 편한 얼굴로 씩 웃었다.

“거의 다 도착한 것 같아서 마중 나온 거야.”

라우너는 멀리서 느껴지는 히나의 기운에 베라미의 만류에도 다급히 뛰어나왔다. 마부 몰래 마차 위에 살포시 앉으면서도 놀랄 히나를 떠올리며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평소에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라우너는 당연히 히나가 재밌어할 거라 생각했다. 다들 놀라긴 해도 험한 남자들만 있는 기사단에서 라우너의 장난은 꽤 인기가 많았다.

“히나, 괜찮아?”

걱정스러운 루터의 목소리에 기대 어린 눈으로 히나에게 고개를 돌리던 라우너가 멈칫했다. 온몸이 하얗게 질린 히나를 보니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식었다.

“괘, 괜찮아요.”

정말 많이 놀란 모양인지 히나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그, 그렇게 놀랐어?”

이게 아닌데. 라우너의 예상대로라면 크게 놀란 다음 재미있다며 까르르 웃었어야 했다. 하지만 히나의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형, 그런 건 남자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장난이라고요. 보통 여자들은 놀란다고요! 특히 히나는 형이 이러는 거 잘 모를 테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 그래?”

당황하는 라우너를 보며 루터는 혀를 찼다. 레베스톤은 대귀족인 공작가이자 수많은 일류 기사들을 배출해 낸 명문가였다. 기사는 본래 가장 낮은 지위를 갖지만, 제국에서는 레베스톤 공작가로 인해 기사들은 전부터 아주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기사의 지위까지 올려주는 집안에서 라우너는 유일한 후계자로 자라왔다. 험하고 짓궂은 기사들 사이에서 자라왔으니, 라우너가 레이디에게 할 배려라든가 예의 따위는 전혀 모르는 게 당연했다.

‘맡겨도 되는 걸까?’

본래라면 카신의 편에 섰을 테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더 이상 보복이 무서워서, 라는 이유로 카신의 편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전부터 우상이었다지만, 치사하게 사람의 마음을 농락한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건 남자로서 절대 용서 못 할 짓이야.’

남자로서 보면, 항상 솔직하고 뒤에서 꼼수 따위는 절대 보이지 않는 저돌적인 라우너가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대공자이자 타고난 능력까지 뛰어난 라우너라면 오히려 히나에게 감지덕지였다.

루터는 자신이 오라버니의 마음으로 히나의 남자를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고민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이런 부분에선 배려를 잘 해줄 건데. 뭐, 그렇지도 않나?’

카신이 정식적으로 첫 수업을 진행했을 때를 떠올리면 배려를 못 하는 건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라우너는 여자에 대한 배려를 못 하는 거였고, 카신은 평범한 사람에 대한 배려를 못 하는 거였지만.

“아니에요! 전 정말 괜찮아요.”

뒤늦게 히나가 말했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애써 그리 말하고는 있지만, 히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았다.

드물게 당황한 라우너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항상 제멋대로 살아온 라우너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좁은 마차 안에서 히나의 앞까지 온 라우너는 바닥에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히나를 올려다보며 라우너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미안해.”

여태껏 진심 어린 사과 따위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색했다. 하지만 라우너는 진심으로 히나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나는 여자를 다루는 게 서툴러서 네가 이렇게 놀랄 줄 몰랐어. 다음부턴 조심할게.”

“사, 사과해 주셔서 감사해요!”

히나는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아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정성스런 사과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아주 높은 귀족인 라우너에게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고마움에 얼굴이 살며시 붉어졌다.

‘역시, 라우너 형이 더 나아.’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비는 라우너와 그 모습에 얼굴을 붉히는 히나를 보며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이 단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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