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이 힘은 신력을 구사할 수 있는 저만이 관리할 수 있습니다. 마력과는 아주 먼 힘이니 분명 한계가 있겠죠.”
“마력도, 신력도 아니면서 신력과 비슷한 힘이라니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신력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성력.
애초에 신력과 비슷한 힘 자체가 없었다. 낯설면서도 신력과 비슷하여 익숙한 이름이 어쩐지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제 발견된 힘이니 그렇겠죠. 그래서 지금 제가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까?”
세이나의 말투는 사근사근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 그렇게나 기이한 힘인가요?”
세이나는 시선을 돌려 혼란스러워하는 에단을 응시했다. 더 이상 히나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히나를 본다면 울컥 치솟은 감정이 확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힘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다듬는다면 아주 좋은 일에 쓰이겠지요.”
그 힘은 히나의 행복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 오로지 히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니까. 남들에게 쓰도록 가르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거짓말이 능하다는 건 아주 편리했다. 세이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겁니다. 어찌 보면 무조건 정화하려고만 하는 신력보다도 더 위대한 힘이 될 수 있겠지요.”
대신녀가 직접 이렇게 높게 치켜세웠으니, 그 누구도 히나의 힘을 같잖게 보지 않으리라.
예상대로 히나를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상황이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가 정말 그런 힘을 갖고 있나요? 그렇게 대단한 힘이 정말 제게 있는 건가요?”
자신이 갖고 있는 정체 모를 힘에 히나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대마법사인 카신도 알지 못했던 힘을 대신녀인 세이나가 직접 발견해 주었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그 힘을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저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신기한 힘이 있다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단연 카신이었다. 신력보다도 더 위대하다는 성력으로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노력해서 그 옆에 당당히 설 수만 있어도 충분했다.
“잘만 다듬는다면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겠죠.”
히나의 표정에서 생각하는 것이 모두 드러났다. 히나의 속을 꿰뚫은 세이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미안해, 아가. 하지만 너를 그런 끔찍한 어둠과 함께 두고 싶지 않아.’
오랜 염원으로 만들어진 힘, 성력이 다듬어질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였다. 평생 히나가 다루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만약 히나가 성력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다고 해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세이나는 히나를 관리하며 카신과 떼어놓을 셈이었다. 카신은 신력에 불쾌감이 솟아나 신녀들을 피해왔다. 그러니 그녀가 옆에 있다면 카신도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리라. 어차피 변덕이 들끓는 인간이니 거리가 멀어지면 관심도 곧 끊어질 것이었다.
“세인트에 있는 다른 교수님들도 히나 양이 가진 힘을 계속 눈치채지 못한 걸 봐선 저 말고는 적임자가 없을 것 같군요.”
“하지만 적임자라고 해도 대신녀님은 곧 대신전으로 돌아가시지 않습니까? 그럼 리베리아 양을 대신전으로 데리고 가시겠다는 겁니까?”
“제가 없다고 신전이 돌아가지 않는 건 아닙니다. 순례를 할 우수한 신녀님들도 충분히 있지요.”
히나를 대신전 근처로도 데려가선 안 된다. 미약한 히나의 힘을 다른 신녀들은 깨닫지 못하겠지만, 대신전에 있는 또 다른 두 명의 대신녀는 아니었다. 세이나는 힘에 부쳐 멀리 나오지 못하는 그들에게 히나를 절대 보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폐하께 새로운 힘에 대해 말씀드리고 이 아이가 성력을 잘 다룰 수 있도록 제가 관리해도 되겠습니까?”
새로운 힘, 성력. 세인트를 졸업할 히나가 그 힘을 완벽히 다룬다면 이 또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완벽히 다루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성력을 증명할 수만 있어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세인트에서는 신녀님께 최대한 협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단은 신이 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속으로 히나를 무시했던 것에 크게 반성했다.
능력도 없으면서 하급반도 아닌 상급반에 굴러들어 와 물을 흐린다고 미워하기도 했다. 거기다 쓸데없이 카신의 눈에 들어 다른 학생들의 기회를 빼앗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세이나의 말을 들으니 모두 이해가 됐다.
“감사합니다, 에단 교수님.”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세이나의 속내는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에단은 기쁨을 충분히 만끽했다.
* * *
“하아.”
루이스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그의 눈은 시름에 젖어 있었다.
“매를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누가 그런 거지?”
시간이 갈수록 두려웠다. 하지만 시간을 멈출 방도 따위는 알지 못했다. 루이스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이라도 가야 할까?”
모든 걸 다 가졌고, 더는 그가 두려워할 만한 건 없다고 생각했다. 도망은 비겁자나 하는 치졸한 짓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오만이었다. 루이스는 처음으로 도망을 갈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디로 말입니까?”
음산한 목소리. 예상을 했음에도 루이스의 몸이 움찔 떨렸다. 제국의 황제로서 이런 겁쟁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방금 전 호위를 밖으로 내보냈다. 다행이었다.
“하하, 자네 언제 온 건가? 놀랐지 않나.”
언제 왔는지 기척도 없었다. 평소라면 핀잔을 주었겠지만, 루이스는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에도 어둠 속에서 스윽, 나타나는 카신의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시겠지요.”
“무슨 말 말인가?”
“언제까지 시치미를 떼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루이스는 카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승인이 떨어진 일이었다. 카신은 다시 되물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루이스로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황제라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승인을 하고 거절을 할 수 있다.
“카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자네도 알지 않나?”
방금 전 세인트에서 두 가지 요청이 왔다. 하나는 대신녀를 세인트의 임시 교수로 임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 발견된 성력이라는 힘을 가진 히나를 대신녀, 세이나가 관리 감독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히나를 제게 준다고 약속했을 텐데요?”
“하지만 그건 졸업 후였어. 자네도 알 텐데?”
루이스는 평소와 다른 기세로 다가오는 카신에게 물러서지 않고 반박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겁이 나 미칠 것 같았다. 예상보다 카신의 화는 더 컸다.
“그리고 내게 숨긴 건 자네가 먼저이지 않나. 미리 언질이라도 해줬다면 나도 이렇게 대책 없이 당하진 않았을 거네.”
대책을 갖고 있었다면 되도록 시기를 늦춰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어낸 다음 승인을 했겠지.
카신이 들으면 제국을 없애 버릴 만큼 큰 분노를 일으켰을 속내였다. 하지만 영리한 루이스는 속내를 끝까지 숨기며 태연하게 자신이 이로울 말만 나열했다.
“히나에게 신력과 비슷한 힘이 있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지 않았나? 그러니 세이나에게 신력을 보여달라 했겠지. 비교하기 위해서 말일세. 안 그렇나?”
다행히 카신에게 반박할 말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사실이기도 했지만, 핑계이기도 했다.
카신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고 해도, 성격 자체가 차분하고 이성적인 그가 충동적으로 폭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어릴 때부터 친분도 쌓아왔는데 설마 죽이기라도 할까 싶은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제가 신녀를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면 적어도 시간을 버셨어야 합니다.”
“그, 그걸 내가 어찌 아나?”
무시무시한 기세로 카신이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루이스의 앞까지 걸어왔다. 장신의 그가 긴 그림자를 만들자 무척 위협적이었다. 루이스는 정신을 놓아 헛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했다.
“폐하께서 조막만 한 애송이일 때, 제가 분명 신녀 따위는 질색이라고 말했죠. 쓸데없는 걸 전부 기억하는 폐하께서 설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시진 않겠죠?”
기억하지 못할 리가. 어째서 신전에서 순례를 올 때마다 여행을 가냐는 어린 황태자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카신은 확실히 대답했었다. 그들이 질색이라고.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신녀를 한껏 낮춰 부르며 싫다고 했다.
“영특한 황제 폐하께서 잊으실 리는 없을 테고.”
이거 아슬아슬한데. 생명의 위협을 느낀 루이스는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지금 당장 철회시키십시오. 히나를 그깟 신녀 따위가 관리하다니,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적당히 해야 했다. 히나에 관한 사항은 특별히 말이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카신을 보며 루이스는 안일했던 자신의 생각에 심히 반성했다.
“……그건 안 될 말이네, 카신.”
하지만 다행히 루이스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커다란 제국을 다스리는 만큼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그는 언젠간 카신이 폭발할 거라는 걸 예상했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레이디 리베리아는 전부터 자네의 옆에 당당하게 서고 싶어 했네. 정말로 자신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면 꼭 그 힘을 끌어내서 자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지.”
사나운 기세가 한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카신의 분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루이스는 서랍에서 한 장의 종이를 책상 위로 꺼냈다. 이렇게 대놓고 무기로 쓰려고 모아둔 것은 아니었다. 웬만하면 끝까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쉬움을 참으며 그의 앞까지 편지를 밀었다.
“이건 뭡니까?”
“한번 읽어보게.”
카신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히나의 필체였다. 직접 글을 쓰는 건 본 적이 없지만, 그녀가 필기해 놓은 마법 서적을 통해 여러 번 봤었다.
루이스가 말한 그대로였다. 풀토 공작의 부하들도 모두 보았다는 힘이 잠시 반짝이다 떨어지는 별똥별이 아닌, 항상 그 자리에서 빛나는 밤하늘의 별이었으면 싶다는 내용이었다.
“언제…….”
이런 걸 주고받으셨습니까? 카신은 당황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황제와 히나가 이런 편지를 주고받은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카신은 자못 충격을 받았다. 루이스가 괘씸한 것도 있었지만, 히나가 생각보다도 더 스스로를 비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레이디 리베리아와 말벗이 되기로 한 것은 정말일세. 그래서 정기적으로 이렇게 고민이나 일상을 다루는 내용을 편지로 주고받고 있었지.”
그래, 황제는 확실히 영악했지. 카신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어찌하진 못했다.
루이스는 현명했다. 사람을 다루는 것도 능했다. 그가 괜히 명군으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황제로서의 뛰어난 자질과 사람을 손안에 두고 철저히 농락하는 능력은 카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면으로 레이디 리베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일은 꽤 즐겁다네.”
카신은 히나와 친한 척 구는 루이스의 면상이 꼴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자신이 더러운 성질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처음 목적이 어찌 됐든 루이스는 히나와 친해지면 카신이 그를 건드리지 못할 거란 걸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약을 대비하여 고민 상담을 핑계로 그에게 맞설 방패도 단단히 준비했다. 카신은 루이스가 얼마나 앞을 내다봤는지를 깨닫자 허탈해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섭섭해하지 말게. 레이디 리베리아가 내게 먼저 이런 고민을 털어놓은 것이 부끄럽다고 되도록 자네에게 말하지 말아달라 부탁한 거니.”
고민을 털어놓게 의도적으로 이끄는 것은 물론, 그런 말을 먼저 하게끔 교모하게 수를 쓴 것이리라. 뻔했다. 그는 사람을 잘 이용하니까 말이다.
‘빌어먹을 황제 놈.’
카신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루이스를 쏘아보았다. 이미 승패가 갈린 걸 깨달은 루이스가 아까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꼴도 보기 싫은 미소였다.
“너무 날 미워하지 말게. 그래도 자네를 봐서 레이디 리베리아의 모반죄를 완벽하게 감춰주었지 않나.”
“혹여 히나에게 상처를 줄 시에는…….”
단단히 으름장을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이스가 폭소를 터트렸다.
“처음엔 어떨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레이디 리베리아가 마음에 들어 이러는 것이네. 알지 않나? 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리 필요해도 이렇게 귀찮은 짓은 하지 않네.”
루이스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카신의 앞에 있는 편지를 다시 가져왔다. 카신의 못마땅한 시선이 편지를 곱게 접어 서랍에 넣는 루이스의 행동을 따라다녔다.
분명 다른 편지의 내용이 궁금한 것이리라. 루이스는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서랍을 닫았다.
“답장 따위는 전혀 할 줄 모르는 누구와 달리 레이디 리베리아는 아주 성실하고 배려심이 넘치지.”
사적인 편지를 얼마 만에 써보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순수하지 않은 목적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히나 덕에 오랜만에 즐겁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오래전 카신에게 일방적으로 보냈던 편지를 떠올리면 몇 배는 더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카신, 아무리 그렇게 뜨겁게 쳐다봐도 레이디 리베리아와의 서신 교류에는 끼워주지 않을 거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보여줄 생각도 없네. 나머지는 다른 곳에 숨겨두었으니 엿볼 생각도 말고.”
얄미워 죽겠다는 얼굴을 한 카신을 보며 루이스는 이제 킥킥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카신이 먼저 황태자 시절의 루이스에 대해 꺼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편하게 말을 하지만, 결코 예의에 벗어나는 말투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카신이 그를 애송이라 칭하며 화까지 냈다.
“왜 그대는 내게 답장을 하지 않는 거야?”
“매일같이 저를 보러 오시는데 굳이 제가 귀찮게 손수 답장을 써서 드려야 하는 겁니까?”
“그, 그래도! 난 황태자잖아! 당연히 내가 보낸 편지에 답장을 하는 게 맞지!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런다고!”
“그럼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십시오.”
얄미워 미치도록 시큰둥하게 대답했던 카신을 보며 어린 루이스는 다짐했다. 그리고 당당히 외쳤다.
“흥, 나중에 나와 편지를 주고받고 싶어 안달 나게 만들어줄 거야!”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루이스는 방금 전, 과거까지 들먹인 카신에게 보란 듯이 그대로 돌려주었다.
“자네도 말을 바꿀 줄 알게 됐구만. 요즘 자네가 나와 같은 사람처럼 느껴져서 내가 얼마나 기쁜 줄 몰라.”
과거의 빚까지 모두. 요즘 사는 것이 참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