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다른 교수들이 카신과 세이나가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뒤에서 벌벌 떨었다.
“어째서 바쁘신 대신녀님이 이곳에 온 건지 모르겠군요.”
“세인트의 시험이 아주 어렵다죠? 세인트의 학생들이 곧 제국의 미래이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시간도 여유로우니 학생들의 사기를 직접 올려주고 싶군요.”
팽팽한 신경전이었다. 결코 발톱을 드러내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대마법사님과 대신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하지만 어째서죠? 제가 알기론 대마법사님과 대신전은 만난 일이 없는데…….”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니까…… 저도 어렸을 때부터 대마법사님 팬이라…….”
마법학 담당인 벤스가 살며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해된다는 듯, 에단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저도 두 세력이 만났다는 사실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역시 교수님께서도…….”
우상인 카신을 앞에 두고 평소에 차마 티를 내지 못했던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공감했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같은 마음을 가진 동지를 만났다는 생각에 그들의 눈이 애틋해졌다.
“여기 있는 건 상관없다만 나를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피차일반입니다. 저를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대마법사님.”
세이나를 보니 골치가 아파왔다. 카신은 온몸으로 기분 나쁜 기운을 내고 있는 대신녀를 보며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세인트를 한번 둘러보고 싶군요. 학교란 곳을 한 번도 다녀보지 않아 궁금합니다. 괜찮을까요?”
카신을 지나쳐 다른 교수들 앞에 선 세이나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상하면서도 우아한 그 목소리에 다른 교수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단은 다급히 앞으로 나왔다. 에단은 성스러운 대신녀를 코앞에서 보는 것도 모자라, 직접 안내를 하게 된 것이 뿌듯했다.
“마법반이 있어서 그런지 다양한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학생들의 개성이 느껴집니다.”
“그럼요! 특히 제가 담당하고 있는 상급반은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실력이 뛰어나지요.”
“상급반에 올라가는 것이 평민이 작위를 받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신녀님께서 세인트 학생들에게 이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이거, 영광이군요.”
이번 상급반은 특히나 더 우수했다. 우수한 학생들을 배출해 낸 교수는 그만큼의 명예가 따른다. 거기다 대신녀 세이나의 관심을 받고 비호까지 깃들었다고 담당 교수인 그도 더 많은 명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
“오후에 제 수업이 있는데, 그럼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속내가 훤히 보이는 에단의 제의에 세이나는 살포시 웃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학생들이 언제 대신녀님과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제 수업보다 더 뜻깊은 시간이 될 겁니다, 하하.”
본래 세이나라면 이런 의도가 담긴 제의를 절대 수락하지 않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세인트에 방문하기 위해 루이스에게 청탁을 할 때부터 결심한 것이었다.
‘선수를 쳐야 해.’
절대 카신에게 히나를 줄 수 없다. 가까이 있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비록 어미 노릇을 다해줄 순 없지만, 그래도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그 위험한 존재 옆에 계속 있게 두지 않으리라.
“제국의 미래가 될 마법반 학생들이라. 얼마나 다양하고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 정말 기대됩니다.”
모든 것은 히나의 행복을 위해.
그녀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자 오랜 염원이었다. 결코 그 꿈을 망칠 수 없었다.
* * *
“다양한 기운이 느껴지는 세인트의 상급반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히나는 작게 입술을 벌린 채 세이나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리도 맑고 청명할 수 있을까.
“잘됐다. 너 가까이서 대신녀님 보고 싶다고 했잖아.”
루터가 말을 걸어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세이나만 쳐다본 모양이었다. 히나는 뻑뻑해진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녀님은 정말 아름다우세요.”
대신녀의 반의반만 닮았어도 카신의 옆에 있을 자격이 생기지 않을까? 히나는 카신과 세이나가 함께 있었던 걸 떠올리자 힘이 빠졌다.
“저렇게 멋진 여성이 있다니, 세상은 정말 큰가 봐요.”
카신이 알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히나는 세이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순간 세이나도 고개를 돌렸다.
“어?”
눈이 마주쳤다. 세이나의 눈이 반달로 휘어지며 그녀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피어났다.
“지, 지금 절 보고 웃어주셨어요. 봤죠?”
“널 보고 웃었겠냐? 바보.”
착각도 유분수라며 루터가 혀를 차도 히나는 갑자기 좋아진 기분에 히쭉 웃었다. 질투가 나긴 해도 세이나가 싫은 건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리고 지금도 세이나가 좋았다.
“잘 들어. 신력과 마력은 종이 한 장 차이야. 대신녀님도 마력을 느낄 수 있겠지만 넌 마력도 없잖아. 여기서 너한테만 유일하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건데, 널 보고 웃을 리가 없지.”
“저기, 하지만…….”
히나가 루터의 옷깃을 다급히 잡아당겼다. 하지만 루터는 그녀의 반응을 무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마력이 많지 않은 나도 집중하고 있으면 다양한 마력이 느껴진단 말이야. 하지만 너한테는 나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있잖아요, 오라버니…….”
세이나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히나는 그녀가 어쩐지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 아래로 루터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애초에 네게 보였다는 빛도 착각일 게 분명해. 그러니 카신 교수님도 이제는 널 내버려 두시잖아.”
“저기, 그…… 대신녀님이 가까이 오시는데…….”
“착각이라니까 그러네. 대신녀님이 어째서 너한테…… 흡!”
바로 앞에 당도한 세이나의 모습에 루터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세이나가 히나의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루터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잔뜩 얼어 있는 히나와 세이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우리 구면이지요?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히, 히나! 히나 피안 리베리아라고 합니다!”
“히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세이나의 청아한 목소리에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히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주변에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히나를 쳐다보았다. 상급반 학생들 모두가 히나에게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력도 없는 그녀가 카신에게 특별 대우를 받고 있지만, 이제는 모두 그러려니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대신녀인 세이나에게도 관심을 받다니. 혹시 저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히나에게 있는 것일까?
“신녀님, 히나 양은 특례 입학으로 갑자기 저희 세인트에 들어온 학생입니다만, 아직 아무런 능력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다른 우수한 학생들도 한번 봐주시는 게…….”
에단은 쩔쩔매며 어떻게 하면 세이나가 히나에게서 시선을 돌릴지 머리를 굴렸다.
상급반의 학생들 모두 나중에 뛰어난 마법사가 되어 화려하게 활동을 할 것이다. 하지만 히나는 예외였다. 그녀에겐 특별한 능력은커녕 마법사로서 아무런 재능도 없었다. 어째서 카신이 히나를 특별 취급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외에는 특별할 게 없는 학생이었다.
기껏 세이나를 상급반까지 데리고 왔다. 에단은 세이나가 미래가 불투명한 히나보다 다른 학생에게 관심을 가지길 바랐다.
“대마법사님이 상급반에 들어온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모두 우수한 학생들이라 카신 교수님의 수업을 아주 잘 따라가고 있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만……. 학생들이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아부하기 바쁜 에단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히나 양을 보고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세이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카신은 며칠 전에 겨우 히나의 힘의 근원을 알았다. 본질을 깨달았다고는 하나 그 짧은 시간동안 카신이 히나를 어찌하지 못했을 거라는 추측이 들어맞았다. 그는 신력과는 거리가 먼 힘을 가졌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카신 교수님께서 히나 양을 특별 대우 하고는 있지만, 별다른 언급은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에단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세이나는 한 손을 들어 히나의 뺨을 만졌다. 맑고 생기가 도는 뺨에 손끝이 닿자 그녀의 입가에 일순 쓴 미소가 지나갔다.
“이렇게 특별한 힘을 가졌는데,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니. 아무리 위대한 대마법사님이라 해도 마법 외의 힘에 대해서 무지한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작게 벌린 히나는 세이나의 손길을 그대로 받고 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끝에서 신성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뭉클한 것 같기도 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뒤섞였다.
“……특별한 힘이라니요?”
에단도, 교실에 있는 학생들도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들의 머릿속에 히나를 데리고 실험을 한다던 카신이 떠올랐다. 특별한 힘으로 특례 입학을 한 히나에게 정말 무슨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히나에게 신력이 있는 건가요?”
옆자리에 있던 루터가 다급히 물었다. 히나는 항상 노력했다. 마법사로서의 기초 지식이 하나도 없으면서 무작정 공부했고, 상급반의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일반적으로 자란 평범한 인간이 처음부터 엘리트 마법사로 길러진 상급반 학생들과 같아질 순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더 힘내는 히나를 보며, 루터는 그녀에게 부디 특별한 힘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대마법사님도 히나가 특별한 힘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게 신력인가요?”
처음 히나가 왔을 때, 분명 그녀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했다. 신력이면 신녀가 되기 위해 나중에 신전으로 떠나야 하니 조금 아쉽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되면 마력을 가진 것보다 더 대단해지는 거였다. 신력은 희귀해서 조금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평소 라우너는 축복 기도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며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었다. 그리고 이번에 히나를 봤을 때도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어쩌면 히나에게 신력이 느껴져서 그렇게 말한 걸지도 모른다. 루터는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세이나의 말을 기다렸다.
“히나 양이 가지고 있는 힘을 신력이라 정의 내리긴 힘들군요.”
은연중에 루터보다 더 기대를 했던 히나가 눈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루터도 실망을 감추지 못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신력과 비슷한 힘입니다.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처음 보는 힘이라 지금 당장 정의를 내릴 순 없을 것 같군요.”
세이나의 눈이 히나를 천천히 관찰했다.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부터 둥근 이마, 순하디순한 동그란 눈동자, 작지만 오뚝한 코, 베어 먹고 싶을 만큼 귀엽고 통통한 뺨, 붉고 귀여운 입술까지.
가까이서 본 딸은 참 어여뻤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멋대로 손을 뻗어 꼭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세이나는 이성을 놓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힘이에요. 아마 이런 기운은 쉽게 찾을 수도, 볼 수도 없겠죠.”
“오지까지 다니시는 대신녀님께서 처음 보는 힘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힘입니까?”
답답한 마음에 에단이 급히 물었다.
“짧은 식견이지만, 이런 힘이 기록되거나 발견됐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러니 감이 좋은 대마법사님도 특별히 이상한 걸 느끼면서도 뭐라 정의하지 못하고 답을 내지 못하셨겠죠.”
세이나는 일부러 카신을 언급했다. 카신이 히나의 기이한 힘을 느낄지언정, 제대로 알아내지는 못할 거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신력을 가지고 있는 저는 이 힘을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세인트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히나의 힘을 직접 들춰내는 것. 어차피 히나의 힘은 신력이 아니었다. 그러니 대신전에서 억지로 신전에 끌고 가 그녀의 자유를 옭아맬 권리는 없었다.
하지만 신력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처음 발견된 힘이라는 이유로, 대신녀인 자신이 개입할 수 있었다. 그녀의 힘을 정의 내리고, 다듬어주면서 지켜보는 것도 가능했다.
“지금부터 나, 대신녀 세이나가 히나 양의 이 성스럽고도 거룩한 힘을 ‘성력’이라 칭하도록 하지요.”
갓 태어난 히나를 버리며 절대 만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히나가 대신녀의 딸이란 것이 알려지면 일어날 파장이 두려워서였다. 자신은 상관없지만, 히나를 불행하게 만들 순 없었다.
‘내가 널 지켜줄게. 행복하게 해줄게, 히나.’
카신과 만나 히나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로 수백, 수천 번을 연습한 말이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히나의 인생에 확실히 개입해 버렸다. 하지만 세이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