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정신을 잃었을 때의 기억은 나나?”
히나가 쓰러졌다는 소리에 루이스는 꽤 많이 걱정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를 제쳐 두고 카신의 별궁에 온 건, 세인트에 결근한 카신을 질책한다는 핑계로 히나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게…… 카신 님과 라우너 오라버니의 대련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몸에서 빛이 났어요. 카신 님이 그 빛이 제가 가진 힘이라고 했어요.”
“라우너? 레베스톤 공자를 말하는 건가?”
“네. 주말에 집에 갔는데, 베라미 오라버니와 절친한 친우인 라우너 오라버니가 놀러 와 있었거든요.”
카신이 대련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성력이라. 신기할 노릇이군. 카신은 그것 때문에 히나를 데리고 있는 건가?’
루이스는 히나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사흘이나 지나고 알았다. 그것도 황궁에 머물고 있는 신녀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카신의 별궁에 가게 해달라고 청을 넣어서 알았다.
항상 즉시 회신을 주었던 히나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갖긴 했지만, 요즘 열성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으니 그러려니 했다.
“처음엔 엄청 신기하고 또 좋았는데, 갈수록 몸에서 힘이 빠졌어요. 그 뒤로는 기억이 잘 안 나요.”
히나가 말을 이었다. 루이스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도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 세이나가 발표한 대로 갑작스러운 어둠의 기운에 히나의 새로운 힘, 성력이 폭주했다는 사실만 알았다. 카신과 세이나 사이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지만, 입이 무거운 두 사람에게 진실을 들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은 나나?”
“엄청 신기한 힘이었어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편안해졌어요. 주변이 깨끗해지는 기분도 들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멈췄으면 좋겠는데, 멈춰지지가 않았어요.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고 죽을 것 같았는데…… 그 뒤로 기억이 나질 않아요.”
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얼핏 세이나를 본 것 같기도 하고,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라는 카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힘이 폭주해서 그런 거네.”
“폭주요?”
“마력이 폭주하듯이 성력도 폭주를 하는 모양이더군. 자세한 건 카신에게 듣는 게 좋을 것 같네.”
상황이 파악되자마자 루이스는 말을 아끼는 쪽을 선택했다. 히나의 일에는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카신을 괜히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답장이 계속 없길래 걱정을 했는데, 무사해서 다행이야.”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답장도 늦어져서 죄송하고요.”
“탓할 생각은 없어. 괜찮단 걸 확인한 걸로 됐네. 답장은 몸이 회복되면 천천히 받도록 하지.”
히나와 루이스가 마주한 것은 그녀가 리베리아 가의 양녀로 들어가기 전 몇 번이 다였다. 그러나 이전의 루이스와 지금의 루이스가 히나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전에는 엄격하고 무서운 황제 루이스였다면, 지금은 편안한 오빠 같았다. 대화를 하면서 편지글 속의 유연하고 부드러웠던 루이스의 활자가 저절로 떠올랐다.
“그보다 성력이란 힘을 발견해서 다행이군. 힘을 갖고 싶다고 했잖은가.”
카신의 옆에 있기로 다짐하고부터 히나의 바람은 딱 하나였다.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
“아직 실감이 안 나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까 정말 기뻐요.”
시녀로 있을 때는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리베리아 가에 양녀로 들어가 세인트에 다니고부터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노력 없이는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도.
“그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겠나?”
“쓸 거예요! 꼭이요.”
히나는 힘이 간절했다. 그녀는 모든 것이 가능한 카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속내를 눌러 담아야만 했다.
카신이 성력에 대해 일러줬지만, 평생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힘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 또 폭주하면 곤란한데.”
루이스는 짐짓 걱정이 되었다. 히나가 카신의 옆에 있기 위해 남몰래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폭주해 버렸지만, 어떤 힘인지 알았으니까 괜찮아요. 다음에는 폭주하지 않고 잘 쓸 자신이 있어요!”
당차게 말하는 히나의 모습에 루이스는 빙긋 웃었다. 이렇게 자신감에 찬 모습은 처음이었다.
“성력을 쓸 수 있게 되면 내가 가장 먼저 부탁해도 될까?”
“부탁이요?”
어쩐지 수줍은 듯한 미소였다. 히나는 처음 보는 루이스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당황하는 호위 기사들을 제치고 카신이 앞장서 들어왔다. 그리고 반가운 목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히나!”
“루터 오라버니?”
히나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기뻤던 기분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카신은 제 이름보다 먼저 튀어나온 루터의 이름 때문에 짜증이 솟구쳤다.
‘네 옆에 계속 있었던 사람은 난데!’
오랜 시간 잠들었다가 깨어난 히나를 아주 짧은 시간 옆을 지킨 루이스가 먼저 맞이한 것도 짜증 나는데, 이름이 불리는 순번까지 루터에게 밀렸다.
카신은 쫄랑쫄랑 튀어 나가 어느새 히나의 옆에 선 루터의 뒤통수를 아주 강하게 쏘아보았다.
“흐음, 꽤 빨리 왔군그래. 제대로 수업을 한 건가?”
“누구…… 폐, 폐하?”
뒤늦게 루이스를 발견한 루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당장에 무릎을 꿇었다.
“무,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황제가 옆에 있는데 예의도 차리지 않고 히나를 먼저 찾다니!
루터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다 못해 쪼그라드는 걸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몰랐다고 해도 명백한 황족모독죄였다.
“괜찮네. 지금은 사적인 자리이니 편히 대해도 돼. 그보다 오누이 사이가 보기 좋군.”
루이스는 초반에 리베리아 가에서 적응을 못 하고 힘들어하던 히나를 떠올리며 안심하듯 웃었다. 애가 타는 루터와 달리 루이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히나, 이제 괜찮은 거니? 기분은?”
히나는 고개를 돌려 카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 살짝 물기가 돌았다. 루이스와 대화를 할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뭉클함이 울컥 올라왔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 불안했던 걸까?’
폭주니 뭐니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저 몸이 조금 피로한 정도? 루이스의 얘기를 들었지만, 기억이 없어서인지 폭주를 했다는 자각도 없었다.
하지만 카신을 보니 안심이 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아마 루이스나 루터가 없었으면 그에게 투정을 부리며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도 없는데 말이다.
“그럼 난 정무가 있어 이만 돌아가지. 인사는 됐네.”
부탁은 나중에 해도 되겠지.
가장 먼저 히나의 기분을 눈치챈 루이스가 먼저 일어났다. 그는 이제 막 일어난 루터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다시 인사하려는 것을 한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다급히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을 뻐끔거리는 히나를 바라보았다.
“히나, 그럼 답장을 기다리지.”
“예, 폐하. 살펴 가세요.”
히나가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숙였다. 루이스는 그런 히나를 흐뭇하게 보더니 금방 자리를 떠났다.
루이스가 사라지자 카신이 그 자리에 대신 앉았다.
“히나, 정말 괜찮아? 계속 학교에 안 와서 걱정했어.”
루터는 이곳에 오는 길에 카신에게서 히나의 성력이 폭주했다는 말을 들었다. 마력이 폭주한 마법사를 제어시키는 방법은 책에 나와 있었지만, 제어한 기록은 없었다. 그래서 루터는 히나가 폭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걱정을 많이 했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수업이 벌써 끝났나요?”
아직 햇빛이 들어오는 창밖을 보며 히나가 물었다.
“그게…… 네가 괜찮은지 확인만 하고 가려고…….”
루터는 머뭇거리며 민망함에 뺨을 긁적였다.
얼굴이 살짝 야위었지만, 히나는 폭주한 것치고는 멀쩡해 보였다. 루터는 그녀의 폭주 얘기를 듣자마자, 카신을 붙잡고 별궁에 데려가 달라고 징징거렸던 것이 떠올라 민망했다.
“네가 걱정되어 같이 가자고 조르더구나. 그래서 데리고 왔다.”
가장 걱정한 것은 나야, 히나.
카신은 옹졸한 속마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누르며 설명했다. 대신 속내를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루터에게 심술을 부렸다.
“아니, 난 그게……!”
“수업에 빠져도 된다고 해서 나도 난감하던 차였는데, 괜찮으니 어서 돌아가라고 네가 말해주렴.”
모든 게 못마땅했다. 그래서 카신은 화풀이 대상으로 루터를 택했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오지 말라는데도 굳이 따라오겠다고 한 건 루터였다.
“오라버니! 그렇다고 수업에 빠지면 어떡해요. 저는 괜찮으니 어서 돌아가세요.”
“그래, 얼굴도 봤으니 이제 돌아가거라.”
“히나, 난 그러니까 여기 온 건……!”
카신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루터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히나는 루터가 사라지고 한 박자 늦게 아쉬운 탄성을 내뱉었다. 워낙 순식간에 사라져서 루터가 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히나, 기분은 어떠니?”
“그냥…….”
기분은 괜찮았다.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히나는 카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신 님.”
“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히나는 천천히 자신의 말을 기다려 주는 카신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한 번만 안아주시면 안 될까요?”
카신은 눈썹을 쓰윽 올렸다. 히나가 무슨 의도로 안아달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
하지만 오랫동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은 정말이지 히나에게 약했다.
카신은 히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가 두 팔을 크게 벌리며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허리를 감싸는 가녀린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히나가 머리를 파고들며 그에게 더 안겼다.
“어디가 안 좋은 건 아니지?”
히나가 말없이 안겨만 있자 카신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히나의 말에 그는 안심했다.
“저…… 아팠으니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안 될까요?”
단순히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것이었다. 서툴고 엉망이어도 뭐든 혼자 하려고 했던 히나가 이제 자신에게 의지하려고 있었다.
카신은 그런 히나의 변화가 좋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히나가 멀쩡한 건 알고 있었다. 폭주 후에 기력이 많이 빠졌지만, 그건 그의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녀의 몸을 확인했기 때문에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했다. 며칠이 지나도 눈을 뜨지 않는 히나로 인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시간을 견딘 보람이 있군.’
루이스나 루터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던 히나는 모두가 사라진 지금,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 더 진도를 나가도 될까?’
카신은 슬슬 히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싶었다. 더 이상 양보할 수 없을 만큼 인내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고백해도 되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카신은 히나를 눈독 들이는 것들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라도 그녀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히나.”
그의 허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히나가 대답 대신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맑고 순한 눈망울이 그를 향해 있었다.
어째서 이 눈만 보면 죄책감이 드는 것인지.
카신은 마치 순진한 아이를 꼬드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말도 없는 카신을 멍하니 보고 있던 히나가 그의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을 풀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진정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조금 더 안겨 있어도 되는데.
어째서 답지 않게 머뭇거렸던 걸까.
카신은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떨어지는 히나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턴가,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