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리베리아 양, 제국의 마법 발전 과정에 대해 설명해 보겠나?”
마법학 교수인 벤스가 물었다. 갑자기 불린 자신의 이름에 잠시 눈을 크게 뜬 히나가 곧 조목조목 대답했다.
“카를로스 제국은 왕국일 무렵부터 본래 뛰어난 마법사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마법사이신 카신 K 로티우스 님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왕국은 빠른 시간 안에 마법이 발전하게 됩니다. 당시 큰 공을 이룬 카신 K 로티우스 님은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게 되었고, 이후 제국이 안전하게 구축될 때까지 마법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셨습니다.”
히나는 마법학을 배우면서 평민일 때는 전혀 몰랐던 카신에 대한 사실과 잘못된 소문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카신이 얼마나 위대한 마법사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대마법사님의 도움으로 마법은 급격하게 발전하고, 또 다양한 마도구가 생성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대마법사님께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을 알려주셨는지는 언급하지 않으셔서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습니다만, 왕국에서 대제국이 된 후로 다른 나라에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마법의 힘을 갖게 된 건 틀림없습니다.”
마법을 가르쳤다는 말은 있어도 어떤 마법을 얼마만큼의 인원에게 가르쳤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었다. 심지어 가르친 시간도.
하지만 빠른 시간 안에 발전한 마법으로 힘없는 왕국 일개 하나가 대제국이 되었다. 그건 대마법사인 카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의 마법 수준으로는 마물의 침략을 차단하는 보호막을 나라 전체에 두를 수 있는 마법은 제국의 마법사만이 가능했으며, 그로 인해 마물의 피해를 최소화한 제국은 초대 황제 폐하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마법의 발전과 마도구의 생성에 대해 더 많은 연구를 하게 됩니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카신이 단시간 동안 이뤄낸 엄청난 업적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은 여전히 대마법사를 두려워했다. 나라가 무너져도 별궁에서 나오지 않는 카신의 성격이 유명한데도 말이다.
“잘했네, 리베리아 양.”
벤스의 칭찬이 이어졌다.
“오오!”
“대단한데, 히나?”
“하나도 막힘없이 대답하다니.”
히나는 쑥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루터를 힐끔 보고는 감사의 표시로 씩 웃었다.
모두 다 루터 덕이었다. 이론으로는 수석인 루터가 까칠한 목소리와 달리 세세하게 설명해 준 덕분이었다. 타박을 하면서도 그녀를 끝까지 붙잡고 스파르타로 가르쳐 준 루터에게 고마웠다.
“흠흠, 리베리아 양. 그럼 대마법사님께서 어떤 마법을 알려주셨는지 혹시 알고 있나?”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다시 히나에게 닿았다. 히나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루터의 스파르타 교육으로 인해 히나가 빠르게 성장한 뒤로 교수들은 수업 시간에 그녀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은근슬쩍 카신에 대해 물어봤다. 지금처럼.
“그건 여쭤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그, 그런가?”
벤스가 실망한 기색을 숨기며 빠르게 단념했다.
카신과 히나가 특별한 사이인 것이 이제는 당연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제는 카신에게 특별 대우를 받는 히나를 질투하는 사람들도 거의 줄었다. 조금 덜렁거리긴 해도 야무지게 제 일을 해내는 히나를 다들 응원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음 시간은 카신의 실기 수업이었다.
“성력 수업은 어때?”
성력 폭주가 있고 벌써 여섯 달이 지났다. 히나는 실기 수업 때마다 세이나에게 가서 따로 개인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로 인해 히나는 카신의 수업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카신은 그에 불만을 토로했지만, 적극적으로 성력을 배우고 싶어 하는 히나를 만류하진 못했다. 대신 세이나와 마주칠 때마다 이를 갈았다.
“이제 조금씩 성력 조절이 가능해졌어요.”
폭주했을 때 아주 많이 위험했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히나는 오히려 폭주를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력이 어떨 때, 무슨 느낌을 갖고 나오는지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확실하게.
아예 몰랐던 때와는 달랐다. 전처럼 희미하게 흘러나오더라도 히나는 자신의 힘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위험한 건 아니지?”
“다행히 폭주 때처럼 막 나오진 않아요. 아주 조금 쥐어짜는 수준이 다인걸요.”
“조심해, 조심.”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폭주 이후로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전처럼 말은 툴툴거리고 있지만, 루터는 그녀가 다칠까 항상 불안해했다. 조금 더 루터와 가까워진 것 같아 히나는 좋았다.
“카신 님 수업은 여전히 힘들어요?”
히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카신에 대해 얘기할 때는 상급반 학생들 모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때문에, 그녀도 조용히 얘기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응. 죽을 것 같아.”
루터는 무지막지한 카신의 마법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도망가고 싶거나 수업을 빠지고 싶진 않았다. 아마 상급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수업 한 번으로도 엄청난 소득이 있었다. 생명을 담보로 배우는 마법은 빠르게 늘었다. 물론 그만큼 수명이 깎이는 기분이었지만.
카신에게 본격적으로 수업을 받은 지 벌써 8개월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사이 학생들의 마법은 무궁무진하게 발전했다. 카신의 마법진을 보고 배운 그들은 기존 마법사들이 쓰지 않는 종류의 마법을 쓰기도 했다.
“너는 신녀님이 잘해줘?”
“신녀님은 엄청 상냥하시고, 또 친절하셔요.”
“그래?”
상냥하고 친절? 루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신녀들을 다 보내고, 유일하게 세인트에 머물고 있는 세이나를 지나가며 몇 번 보았다.
세이나는 얼음으로 만든 동상처럼 아름다우면서 또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워 보였다. 미소를 보이더라도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는 정도였다. 루터에게는 조금 꺼려지는 사람이었다.
“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신녀님이 기다리셔서요.”
“응. 잘 갔다 와. 내일 집에 가는 거 잊지 말고!”
“네! 오라버니도 수업 잘 들으세요.”
루터는 틈만 나면 주말마다 히나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로 인해 어색했던 가족 사이가 그나마 편해졌다. 그렇다고 화기애애한 가족이 된 건 아니지만, 이것만으로도 히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유일하게 성력을 갖고 있는 히나를 위한 개인 지도실.
히나는 문을 열자마자 활짝 핀 미소로 맞이하는 세이나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신녀님.”
“어서 와요, 히나.”
세이나는 항상 그녀를 ‘히나’라며 친근하게 불렀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애정 넘치는 목소리로.
히나는 세이나가 좋았다. 비록 아주 잠깐, 카신과 세이나가 함께 있는 모습에 질투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 기분은 어떤가요?”
“아주 좋아요!”
“다행이에요. 성력은 히나가 기분이 좋을 때 더 잘 나오는 것 같으니까.”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히나의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남자라면 도저히 반하지 않고 못 배길 것 같았다.
그런데 카신 님은 왜 세이나 신녀님을 싫어하시는 걸까? 히나는 잠시 카신을 떠올렸다가 세이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배시시 웃었다.
“황후마마를 알현할 때도 잘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히나가 폭주 뒤 깨어난 날, 부탁이 있다던 루이스는 편지로 그 내용을 전해왔다. 황후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출산을 하기 전에 성력을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성력으로 임신한 황후를 평온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히나는 더 열심히 했다. 아이를 품고 있는 황후마마에게 성력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됐다.
“그러고 보니, 곧 폐하를 뵈러 가지요?”
“네! 제 첫 임무예요.”
세이나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마음을 졸이는 히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항상 멀리서 히나의 행복을 위해 기도했는데.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저에게 남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히나의 맑은 눈동자 안에는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세이나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히나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갈수록 욕심이 생겼다.
‘히나에게 엄마란 소리를 들을 자격도 없으면서.’
세이나는 씁쓸해지는 마음을 억누른 채 말했다.
“자신감을 가져요, 히나. 히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니까.”
“에이, 그렇게까지 띄어주지 않아도 돼요, 신녀님.”
“정말이에요, 히나. 저는 히나를 보면 항상 즐겁고 행복하답니다.”
정말이었다. 히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히나를 마주할 때마다 하루에도 수십 번을 넘게 눈물을 참으며 행복을 억눌러야 했다.
“하지만 히나, 전 당신이 성력을 다른 분들보다 본인의 행복을 위해 썼으면 해요.”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녀님.”
작은 것에도 환하게 웃을 수 있는 해맑고 예쁜 히나.
세이나는 감격스러운 마음을 달래며,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 모를 히나의 얼굴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오랜 시간 보지 못하더라도 기억할 수 있도록.
* * *
“리베리아 군.”
수업이 끝나자마자 카신은 루터의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귀족의 체면 따위는 잊은 지 오래인 루터는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네, 네!”
당연히 갔을 거라 생각했다. 남이 달라붙는 걸 싫어하는 카신은 수업이 끝날 때쯤 학생들을 녹초로 만든 다음 바로 사라졌다. 기척도 내지 않고 마치 바람처럼 말이다.
당황한 루터의 대답에 다른 친구들도 힐끔힐끔 루터와 카신을 신기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잠깐 연구실로 오지.”
“저요?”
히나가 아닌 저를 부른다고요?
루터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카신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지.”
루터에게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카신은 이동 마법을 부렸다. 카신과 루터의 몸에 몽롱한 빛이 일어났다.
황궁 안에는 이동 마법을 쓸 수 없게 제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 만약 쓰고 싶다면 황제의 허가를 따로 받아야 했다. 그것도 아주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
그렇지 않고 이동 마법을 쓰면 마법을 실패하는 것은 물론, 황궁 내에서 금지된 마법을 쓴 것이 걸려 바로 잡혀가게 된다. 그러니 황궁 안에서 허가받지 않은 채 이동 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아무도 없었다. 카신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마법을 쓰지 않는 카신은 황궁 내에서 아무리 이동 마법을 써도 걸리지 않았다. 카신이 쓰는 마법은 마법진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놀라던 학생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쳐다보는 정도가 되었다.
“여긴 황궁 안인데…… 저까지 이동 마법으로 데리고 오시면 어떡해요!”
영문도 모른 채 카신의 연구실로 들어온 루터가 다급히 따지듯 외쳤다. 아무리 카신의 이동 마법이 결계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도 황법을 어기는 건 찝찝했다. 특히 이동 마법을 검열하는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 아들인 루터에겐 말이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제 자리에 앉은 카신은 루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찔리는 게 있는 루터가 몸을 움찔 떨었다.
“이번에도 주말에 히나를 데리고 집에 간다고?”
한쪽 다리를 꼰 채 턱을 괸 카신은 무척 위협적이었다.
“매번 잘도 빼내는군, 리베리아 군.”
“빼, 빼내다니요!”
대놓고 이렇게 부를 줄은 몰랐지만, 카신이 위협할 거라는 예상은 했다. 루터는 처음 히나를 빼돌릴 때부터 생각해 둔 변명을 댔다.
“히나도 집에 가서 가족들과 친분을 쌓아야 할 것 같아 데리고 가는 거라고요.”
당당하게 말하겠다는 다짐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카신이 그런 그를 보며 조소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리베리아 군. 히나를 레베스톤 공자에게 보내려는 의도라고 말일세.”
카신은 날카로운 눈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루터를 쳐다보았다.
루터는 주말마다 히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과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히나를 라우너에게 붙여놓았다. 순진한 히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알 수 있는 수작이었다.
카신은 몇 번이고 히나에게 다른 곳에 가자고 했지만, 어디를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매번 리베리아 후작가에 찾아갈 수도 없었다.
아니, 그 근처에는 가고 싶지도 않았다. 전의 대련이 퍽이나 아쉬운 것인지 라우너는 그를 볼 때마다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리고 결투를 신청했다. 카신은 레베스톤 애송이가 무서워질 만큼 귀찮았다.
‘그 때문에 주말마다 계속 히나를 보지 못했지.’
애가 탈 때로 탔다. 카신은 참고 또 참다 결국 루터를 부른 것이었다.
“루터 피안 리베리아 군.”
자신의 풀네임이 이렇게 소름 끼치게 들리다니.
연구실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루터는 두려움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