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루터는 당장에라도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카신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내가 졌네.”
“네?”
“내가 졌다고 말하는 걸세.”
카신에게 있어 히나는 크나큰 약점이었다. 그런 히나를 다른 남자에게 붙이려고 하다니.
“그래서.”
카신은 당황하는 루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히나를 레베스톤 공자와 엮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루터는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카신과 부딪힐 각오도 없이 히나를 라우너에게 소개시켜 준 건 아니었다.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카신의 눈썹이 쓰윽 올라갔다.
“저는 히나가 라우너 형과 잘되길 바랍니다.”
당연히 겁을 먹고 바로 물러날 줄 알았던 루터가 맞부딪히자, 카신은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살아 있는 전설, 카신 K 로티우스.
루터는 카신이 자신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고 거의 확신했다. 적어도 히나와 함께 다니는 이상 말이다.
히나와 계속 붙어 다니는 그는 알 수 있었다. 카신이 히나에게 미움받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걸.
손가락 까딱하는 것도 싫을 만큼 게으른 그가 히나에게는 삐뚤어진 성격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귀찮은 짓을 서슴없이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막을 알 수 없지만, 루터는 카신이 세인트의 교수로 온 것도 히나를 지켜보기 위해서라고 거의 확신했다.
“나를 납득시킬 말은 생각해 뒀겠지?”
카신의 눈빛이 바뀌었다.
머릿속에 생각해 둔 말이 전부 사라졌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루터는 바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아니면.”
샛노란, 태양보다도 더 빛나는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내가 히나 때문에 자넬 건드리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루터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렇다. 그래서 이렇게 카신에게 대드는 대담한 짓을 할 수 있는 거였다.
“아주 오래전에 기억을 지우는 약을 만든 적이 있었지.”
그런 약이 정말 존재하는 걸까?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카신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바로 대마법사였으니까.
“자네 하나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일은 내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야. 아무도 모르게, 마치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지.”
“지,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당장에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았다.
“아니, 기회를 주는 걸세. 그 귀찮은 짓을 감수해야 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히나에게 가족처럼 굴어주는 자네를 없애고 싶지 않거든.”
카신은 잔뜩 겁을 먹은 루터를 보며 같잖은 웃음을 흘렸다.
이런 애송이 하나 때문에 요즘 골머리를 앓은 걸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없애고 싶었다. 인류에 대한 애정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자신을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는 그는 인간 하나 살리고 죽이는 일이 잘못된 거라는 자각도 없었다.
하지만 여태 그러지 않은 건 히나 때문이었다. 히나가 루터를 소중히 여겼다.
다른 리베리아와는 다르다. 히나는 루터만은 진심으로 오라버니라 생각하며 따랐다.
‘히나에게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건 싫지만.’
오로지 히나가 자신을 의지해 줬으면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이제 막 피어나려 하는 히나에게 루터는 카신과는 또 다른 버팀목이었다. 오히려 성장을 하는 데에 있어서 그보다는 루터가 더 도움이 되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지만 내게서 히나를 빼앗아가려 한다면 또 말이 달라지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그러니 내게서 히나를 빼돌리려 했던 이유를 잘 말해야 할 거야. 당장에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기지.”
“마, 만약 제가 교수님을 납득시킨다면요?”
“말하지 않았나? 내가 졌다고. 날 납득시킨다면 그다음으로는 내가 자네를 이해시켜야지.”
과연 납득시킬 수 있을까?
루터는 겁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카신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 카신에게는 아니었다.
“자, 말해보거라.”
말하지 않으면 당장 죽이겠지? 그렇다면 적어도 노력이라도 하는 게 나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루터는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그는 하얗게 변해 버린 머릿속에서 히나를 라우너와 연결시키려던 이유를 겨우 찾아정리했다.
“교수님은 남자답지 못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히, 히나에게 너무 비겁하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카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계속 말하라는 듯,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사랑의 묘약으로 마음을 조종하다니요! 저는 그런 약 따위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교수님보다 순수하게 다가가는 라우너 형이 히나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 히나까지. 내가 세상에서 지워진다고 해도, 날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조금은 텅 빈 마음으로 살아줘.
적어도 누군가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카신의 손에 죽는다면 그건 무리였다.
루터는 속으로 세상과 인사하며,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않을 거라는 슬픔과 암담함에 눈을 꼭 감았다.
“하, 정말이지.”
카신의 입에서 어이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죽음을 기다리던 루터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는 카신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히나가 그러던가? 내가 사랑의 묘약을 먹였다고?”
당황스러워서 말문이 막혔다. 루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에서 심장이 빠르게 뛴다고도 했겠군.”
더 강하게,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터를 보며 카신은 픽 웃었다.
“그리고 또 뭐라던가?”
루터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히나가 그에게 수시로 털어놓던 고민이 하나씩 지나갔다.
“사랑의 묘약 때문에 교수님이 아무리 미워도 싫어할 수 없을 거라고……. 막안고 싶거나 계속 가까이 있고 싶고, 더한 것도 하고 싶다고 했는…… 데요.”
꽤 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카신을 보며 루터는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한 것도 하고 싶다라.”
카신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책상을 툭툭 두들겼다. 히나가 얼마나 고민을 했을 지가 상상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히나에게 사랑의 묘약을 먹인 적이 없네.”
“네? 하지만 히나는…….”
사랑의 묘약을 먹인 적이 없다고?
히나는 거짓말이 서툴렀다. 그리고 루터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나가 했던 말을 믿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건 조금…… 장난을 친 거야.”
“히나가 사랑의 묘약을 먹은 게 아니라고요? 그럼 왜 히나에게 그런 장난을 친 거죠?”
묘약을 먹이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장난을 친 건 심한 짓이었다. 그로 인해 히나는 아주 오랜 시간 혼자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했으니까.
“히나가 나를 속이고 도망쳤거든.”
“고작 그런 것 가지고…….”
“고작 그런 거?”
루터의 말을 끊은 카신의 목소리는 무척 음산했다.
“리베리아 군.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지만, 히나는 꽤 복잡한 상황에 얽혀있었어. 그리고 그녀는 나를 배신했지.”
카신은 배신이란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복잡한 상황이라면…….”
저도 모르게 질문을 하던 루터가 입술을 다물었다. 어쩐지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일은 극비야. 후작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일이지.”
루터는 저절로 일 년 전, 제국에 있었던 커다란 사건을 떠올렸다. 히나가 리베리아에 오기 바로 직전에 터진 일이었다.
천둥보다도 더 커다랗던 굉음이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대마법사 카신이 모반을 일으킨 풀토 공작과 그 잔당들을 잡아들이는 소리였다고 나중에 밝혀졌다.
많은 고위 귀족들이 연루되어 잡혀갔던 그 사건 덕에 제국은 한참 동안 어지 러웠다. 지금도 그 여파가 지속되어 다른 귀족들이 열심히 그 공백을 메우는 중이었다.
“아무리 내가 히나에게 관대해도, 나도 꽤 상처를 받았다네.”
전혀 상처받지 않은 카신의 얼굴을 보며 차마 부정하지 못한 루터가 눈만 살짝 찌푸렸다.
“다친 히나에게 치료약을 만들어주면서 심술을 부렸지. 날 배신까지 한 주제에 다쳐서 온 것이 꽤 화가 났거든.”
그때가 떠오른 건지 카신의 얼굴이 급격히 험악해졌다. 루터는 뒷걸음치려는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 하지만 굳이 지금까지 속일 필요는 없지 않아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짜증이 나. 그래서 난 계속 심술을 부렸지.”
루터는 너무하다 싶으면서도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넘기는 카신이 이해되기도 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큰 사건에 연루되어 배신한 히나가 다쳐서 돌아왔다. 히나를 지극히 아끼는 카신이 화가 났을 법도 했다.
루터는 계속 히나의 편을 들어야 할지, 아니면 카신을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히나는 정말로…….”
히나가 카신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건 이미 안다. 하지만 루터는 그것이 이성적인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평범한 사람과 동떨어진 카신은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어 거리감도 들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누군가와 엮을 수가 없었다.
히나도 마찬가지로 카신을 그렇게 생각할 거라 여겼다. 절대적인 보호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라 막연하게 추측했다.
“자네에겐 고맙군. 답답했거든.”
“답답하다니요?”
“히나가 어디까지 나를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히나를 향한 카신의 마음은 상상 이상으로 깊었다. 루터는 그간 꽤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걸 깨달으며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교수님은 히나를…….”
차마 문장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루터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사람들은 카신이 히나를 애완동물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신이 이성적인 감정을 갖는 것 자체가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터는 어렴풋이 카신이 히나를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히나가 남자와, 특히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그녀가 조금만 힘들어해도 안절부절못한 채 지켜보았다.
‘그건 단순히 귀여워해 주는 수준이 절대 아니지.’
그 누가 애완동물을 위해 삶을 바꾼단 말인가.
루터도 카신이 사랑을 한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히나와 가까이 지내면서 모든 걸 지켜본 루터는 카신이 히나에게 빠졌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다.
“나는 히나를 내 아내로 맞이할 거네. 조금 더 큰다면 말이지.”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카신은 거침없었다.
“지금도 데리고 올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히나는 평생 내 옆에서 기가 죽은 채 살아야겠지. 나는 차곡차곡, 그녀가 원하는 걸 다 이루게 해준 다음 데리고 올 거네.”
루터는 그제야 카신이 왜 히나가 리베리아의 양녀가 되고, 세인트에 들어온걸 그냥 지켜봤는지 깨달았다. 사람과 엮이는 걸 싫어하고 히나가 상처받는 걸 극도로 기피하면서도 말이다.
“만약 히나가 그때 가서 싫다고 한다면요?”
심기를 건드리는 위험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루터는 확인하고 싶었다. 카신이 히나를 소중히 여기는 걸 떠나 얼마나 존중해 주는지.
“평생을, 영원히 구애할 거네. 그녀가 내 마음을 받아줄 때까지.”
카신은 아주 무시무시한 발언을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히나의 오라비로서 나를 인정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