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68화 (68/128)

68.

히나는 입을 떡하니 벌리며 루터가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 그만……!”

루터가 입을 뻐끔거리며 겨우 나온 목소리로 애원했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카신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카신이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차가운 얼굴로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커다란 파도가 덮쳐 왔다.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파도를 보며 루터는 숨을 들이켰다. 곧 몸을 찢어버릴듯한 기세로 파도가 그를 덮쳤다.

“카신 님!”

보다 못한 히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은 거센 파도에 잠식된 채 숨이 막히는지 두 손으로 제 목을 붙잡고 있는 루터에게만 닿아 있었다.

안절부절못한 채 자신을 부르는 히나를 보며 카신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엄지와 중지를 튕기며 딱, 소리를 냈다.

파앗―

루터를 삼켰던 파도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평화로운 별궁의 작은 훈련장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롭기만 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루터만 아니었다면 히나는 방금 본 것이 꿈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오라버니!”

그늘 아래에 티테이블을 놓고 편히 차를 마시고 있던 히나가 벌떡 일어나 루터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카신은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괜찮으세요?”

저렇게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다른 남자를 보는 히나를 보고 싶지 않았다.

“네 오라비라면 괜찮단다, 히나.”

지금 나를 믿지 못하는 거야? 설마 네 앞에서 루터를 죽일 리 없잖아?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삼키며 카신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히나가 자신의 수업을 듣지 않아 까먹고 있었다. 그녀는 루터가 다치는 것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걱정했다.

“카신 님, 오라버니는…….”

꿈쩍도 하지 않고 축 늘어진 루터를 보며 히나가 울먹였다. 카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신체 강화 마법을 걸었단다. 이걸로 죽지는 않아.”

“하지만 깨어나지 않고 있잖아요.”

히나의 눈동자에 아주 작은 원망이 들어섰다.

‘앞으로는 히나 앞에서 훈련을 시키지 않는 게 좋겠어.’

루터를 걱정하는 히나를 계속 보게 되면 성격이 더 삐뚤어질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타고난 성정이 좋지 않은데 말이다.

‘위험해. 저런 걸 보고 있다가는 홧김에 진짜 죽여 버릴지도 몰라.’

카신은 그나마 세인트의 수업에서는 학생들을 심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물론 평화롭게 자란 학생들이나 다른 교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하지만 마력을 높이려면 지금보다도 더한 꼴을 만들어야 했다. 개인 지도 중에 루터를 죽이지 않을 자신이 있는 카신은 루터가 너덜너덜 걸레 조각이 되어도 죄책감 따위 느끼지 않았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그에겐 별다른 감흥이 없을 것이다.

‘애초에 내게 인간의 목숨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그는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순간을 셀 수 없이 봐왔다. 영원과도 같은 삶을 살아온 그에겐 하루 살고 죽는 벌레나 고작 수십 년 살다 죽는 인간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히나는 그렇지 않았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루터는 그녀의 오라비였다. 당장에라도 루터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든 것인지 그녀의 눈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회복약을 만들어두었단다. 금방 나을 테니 걱정하지 말렴.”

카신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춘 채 한 손을 들었다. 손 위에 미리 만들어두었던 회복약이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그가 건네주기도 전에 히나가 회복약을 홱 가져가 버렸다.

‘히나가 참 많이도 변했군.’

그는 텅 비어버린 제 손과 루터에게 회복약을 먹이는 히나를 번갈아 보고 한 숨을 푹 쉬었다. 히나가 눈치를 보지 않고 제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기뻐할 일이지만, 그로 인해 홀대받는 건 역시 슬펐다.

“으으. 히나, 난 괜찮아.”

사내자식이 이리도 허약해서야.

카신은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는 루터가 괜히 더 얄미웠다. 일부러히나를 더 걱정시키려고 저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얼굴이 하얘요! 정말 괜찮은 거죠?”

“속이…… 이상해.”

카신은 기침을 하다가 이제는 헛구역질까지 하는 루터를 보며 혼자 혀를 찼다. 하여간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란.

“식사를 준비하라 미리 말해두었단다. 히나, 가서 식사를…….”

“제가! 도와드릴게요.”

전혀 들리지 않은 것인지 카신의 말을 끊은 히나가 루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두 손을 모았다. 카신의 두 눈썹이 쓱 올라갔다.

신녀들이 신력을 끌어내기 위해 취하는 전형적인 기도 자세 중 하나였다. 히나가 신녀라도 되는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카신은 그저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도 히나가 성력을 쓰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좀 괜찮아질 거예요.”

두 눈을 꼭 감은 채 무언가를 감싸듯, 히나가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았다. 곧그녀의 작은 손 안에서 밝고 아름다운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희미하게 빛을 뿜었던 전과는 달랐다. 그녀의 두 손에서 뭉쳐지는 성력은 작지만 무척 강했다. 히나는 겨우 만들어낸 빛을 루터에게 보냈다.

새하얗게 질린 루터의 안색이 점점 제 색으로 돌아왔다. 카신은 한결 편한 얼굴을 한 루터를 확인하고, 묘한 눈으로 히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성력이야?”

아픈 건 여전했지만, 불쾌한 기분은 사라졌다. 루터는 신기한 눈으로 제 몸을 확인하며 물었다.

“아직은 이 정도밖에 못 써요.”

얼마 전부터 겨우 성력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참이었다. 성력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려준 세이나를 제외하면 루터에게 처음 쓰는 것이었다.

쑥스럽게 웃으며 말한 히나가 고개를 돌려 카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더니 수줍게 말했다.

“사실 성력은 카신 님께 가장 먼저 쓰고 싶었는데.”

카신이 다가와 잔뜩 아쉬워하는 히나를 위로하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랬구나.”

“내일 다시 보여 드릴게요!”

“내일?”

“아직은 하루에 한 번밖에 못 써요.”

루터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이 슬며시 카신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니,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하라고!’

하루에 한 번 쓸 수 있는 성력을, 그것도 남에게 처음으로 쓴다는 성력을 왜자신에게 쓴 걸까.

잠시 마주친 카신의 눈에서 거대한 살기를 발견한 루터는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거대한 파도가 덮쳤을 때보다 더 무서웠다.

“식사를 하러 가자꾸나. 히나,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부탁해 놓았단다.”

“배가 고팠는데 잘됐어요!”

카신이 히나를 일으키면서 고개를 돌려 루터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자네는 여기서 몸을 더 추스르고 들어오게.”

“왜요? 약도 먹었으니까 같이 가면 좋잖아요?”

히나의 천진한 목소리에 그러자고 대답할 뻔했다. 루터는 딱딱한 동작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히나! 난 조금만 쉬었다가 갈게.”

아쉬워하는 히나를 보며 루터는 쐐기를 박았다.

“어서 가! 난 방금 배운 거, 조금만 더 연습하고 갈 거니까!”

배운 거? 배운 거라곤 없다. 무작정 맞기만 했으니까.

개인 지도라기보다 화풀이에 가까운 카신의 마법에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친루터는 히나가 발걸음을 돌리자 몰래 안도했다.

‘잊고 있었어.’

히나가 마법 실기 수업을 듣지 않게 되면서부터 카신 앞에서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일이 줄었다. 그래서 까먹고 있었다. 카신 앞에선 히나와 거리를 둬야 한다는 사실을.

어째 집착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루터는 당분간 몸을 사려야겠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평민 시절에 자주 먹지 못해서였는지 히나는 고기를 좋아했다. 카신은 음식의 가짓수가 많은 호화로운 식사 자리에선 항상 편식을 하는 히나를 고려해, 별궁 요리사에게 아주 간단한 상차림을 주문했다.

“자, 히나. 먹어보렴.”

잘게 다진 쇠고기 사이사이에 야채를 넣고, 그 위에 매시트포테이토를 올린 코티지 파이는 편식이 있는 히나에게 적절한 요리였다.

그의 별궁에 오고서 거의 일을 해보지 못한 요리사가 간만에 들어온 식사 주문에 힘을 쓴 것이 역력히 보였다.

먹기 좋게 코티지 파이를 자른 카신은 히나에게 포크로 파이 조각 하나를 찍어주었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냉큼 받아먹었다.

“카신 님과 이렇게 있는 건 아주 오랜만인 것 같아요.”

여기서 시녀로 일했던 것이 아주 오래전 일 같았다. 그때와 비교하면 많은 곳이 바뀌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시녀가 아니었고, 고개를 숙이며 눈치를 보는 입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카신을 보니 전처럼 텅 빈 별궁에 단둘만 있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기도 했다.

“계속 같이 있지 못했으니까.”

“자주 놀러 온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해요.”

평일에는 항상 학교나 기숙사에 있었고, 주말은 집에서 보냈다. 카신의 수업도 듣지 않다 보니 한 번씩 쉬는 시간에 연구실을 찾아가는 것 외에는 그를 직접 보는 일이 드물었다.

‘욕심을 부릴까 봐 일부러 만나지 않은 것도 있었지.’

히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신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그와 함께 있으면 사랑의 묘약이 효능을 발동하는지 더한 욕심이 생겼다.

눈을 마주치면 손을 잡고 싶었고, 꼭 껴안고 싶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마다 몇 번이나 껴안아달라고 애걸할 뻔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말이다. 그래서 히나는 카신의 연구실에 찾아가도 오래 있지 않고 바로 나왔다.

“공부한다고 바쁘지 않았니? 시간 날 때마다 내 연구실에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카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하며, 그녀의 접시에 파이를 덜어주었다.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멍하니 보며 히나는 얼굴을 살며시 붉혔다.

밤마다 수정구로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부끄럽기도 했다.

카신과 알고 지낸 지 일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누구보다도 익숙하고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히나는 최근 들어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이 쑥스러웠다. 그녀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시선을 살며시 피했다.

“히나.”

그녀를 부르는 진지한 목소리에 히나는 고개를 살며시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차마 카신의 얼굴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그의 앞에 놓여 있는 텅 빈 접시에만 머물렀다. 식사를 하지 않는 그의 앞에는 깨끗한 식기구가 올려져 있었다.

“요즘 이상하구나. 나를 보기 싫은 거니?”

“아니요!”

“그런데 왜 계속 눈을 피하지?”

슬그머니 시선을 올리던 히나는 카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휙 내렸다.

의식을 하니 더 못 마주치겠다. 특히나 뭐든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저 눈동자 하고는.

이상한 기분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덥지도 않은데 얼굴이 뜨거워지고 배 속이 간질간질했다. 더 이상 여기에 있다가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오, 오라버니가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히나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저 먼저 가볼게요!”

카신은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채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히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게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란 말이지.”

그는 사랑의 묘약 효능 때문에 히나가 무척 괴로워한다는 루터의 말을 떠올리며 픽 웃었다. 그 말을 듣기 전이었다면 도망가 버리는 히나의 행동에 상처를 받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가장 성가신 방해꾼은 없다. 루터를 완전한 아군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녀를 굶주린 늑대 소굴에 데리고 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때가 됐군.”

혹시나 히나가 자신을 이성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보는 게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히나의 마음을 안다. 그러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카신은 히나가 향한 방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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