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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69화 (69/128)

69.

“그런데 개인 지도는 원래 이렇게 무자비한 건가요?”

그건 루터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루터는 굳이 카신에게 좋지 않은 선입견을 만드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 살고 싶었다.

“교수님의 깊은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어.”

온몸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회복약을 먹기 전까지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딱히 뼈가 부러지거나 큰 상처를 입은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라우너 형도 그랬지.’

루터는 문득 침대 위에서 아프다며 뒹굴던 라우너가 떠올랐다. 그때는 다른 사람보다 고통에 둔감한 라우너가 카신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한 것에 창피해서 과장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엄살도, 과장도 아닌 진짜 아픈거였다.

도대체 어떻게 마법을 쓰면 큰 상처 없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줄 수 있는 걸까?

“근데 너 왜 나왔어? 밥 먹으러 갔잖아.”

“그게…….”

히나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머뭇거렸다.

“또 두근거렸어?”

히나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카신 님의 묘약은 효능을 없애는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오늘 라우너 오라버니를 만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어쩌죠?”

루터는 심각해지는 히나를 보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의 묘약에 대해 알고 나서 루터는 묘약을 해독시키는 방법으로 라우너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깨끗한 기운이 넘치는 라우너와 함께 있으면 묘약의 탁한 기운이 힘을 잃는다고 말이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히나가 라우너와 자주 만나면서 그를 좋아하게 되면 묘약의 효능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묘약의 힘을 이겨내고 라우너를 좋아하게 될지는 의문이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설마 사랑의 묘약을 마신 적이 없을 줄은 몰랐지.’

그간 묘약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던 히나와 그걸 걱정했던 걸 떠올리면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 같이 못 있을 만큼?”

히나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갑자기 의식하면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요. 막 이상한 말을 내뱉거나 행동해서 카신 님을 곤욕스럽게 할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그래서 도망쳐 나왔어요.”

그렇게 하면 엄청 좋아할걸?

히나는 카신을 전혀 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나 좋아하면서 말이다.

소름이 끼칠 만큼 집착하는 주제에 정작 히나에겐 이런 취급을 받고 있으니.

루터는 카신이 조금 불쌍하기도 했다. 조금 고소하기도 했지만.

“있잖아, 히나.”

“네?”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지그래?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던 말이 한순간에 들어갔다. 루터는 뒤에서 느긋하게 걸 어오고 있는 카신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회복약을 먹고 많이 괜찮아졌지만, 그래도 온몸이 삐걱거렸다. 절로 인상을 찌푸리자 히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괜찮을 거란다. 약을 먹였으니 지금 아픈 건 저녁이 되면 다 가라앉겠지.”

뒤늦게 카신이 다가온 걸 깨달은 히나가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카신을 보자 마자 루터의 뒤로 슬그머니 몸을 숨겼다.

루터는 보았다. 카신이 히나가 자신의 뒤로 숨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는 것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마력을 높이려면 이 방법밖에 없나요?”

히나의 목소리에 약간의 불만이 섞여 있었다.

‘히나, 부탁이니 내 걱정은 속으로만 해줘.’

고맙기도 했지만, 히나가 걱정을 하면 할수록 두려웠다. 루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하하 웃었다.

“타고난 마력은 본래 크게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지. 마력을 늘리기 위해선 한계를 넘어가는 수밖에 없어.”

루터에게라면 절대 해주지 않을 카신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마력이 떨어지고 육체의 한계가 넘어가면 없던 마력도 생기는 법이지. 인간은 죽을 위기에 처하면 때론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동물이니.”

확 와 닿지는 않지만,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루터는 상급반 친구들이 카신의 독단적이고 무자비한 수업을 받으며 얼마나 실력이 향상됐는지를 떠올렸다.

“전쟁을 제대로 겪어보지도 않은 평화로운 마법사들에 비해 이리저리 구른 마법사들의 마력이 높은 이유는 그 때문이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루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다른 나라의 마법사들보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더 약하다는 건가요?”

카신은 루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 이상으로 루터의 머리는 좋았다.

대충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었는데도, 그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마력이 많다고 무조건 강한 건 아니지.”

제국의 마법은 다른 나라에서 넘볼 수 없을 만큼 기술적으로 강하고 다양했다. 마법의 종류가 별로 없었던 과거에는 확실히 마력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가 중요했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마력의 양은 전처럼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적은 마력으로도 충분히 다양한 마법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

대마법사라는 두려운 존재로 인해 전쟁의 위험이 없었던 제국은 카신의 가르침 아래 독보적으로 마법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카신의 말에 따르면 수많은 전쟁 속에서 숱한 위기를 맞으며 마력을 높일 기회는 그만큼 줄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지금 왕국의 마법사들은 실력 면에서 떨어질지 몰라. 하지만 그 차이는 계속 좁혀지고 있어.’

다른 왕국의 마법사들은 제국의 마법을 따라잡기 위해 오래전부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 노력의 결과물인지 실제로 꽤 실력 좋은 마법사들의 위상은 제국까지 전해졌다.

만약 카신의 말처럼 제국의 마법사가 다른 나라의 마법사들처럼 마력이 적다면 이건 큰 문제였다. 비슷한 실력이라면 마력이 큰 쪽이 훨씬 유리했다.

루터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졌다.

“교수님은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만약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초반엔 우세를 이룰지 모르나, 장기전이 된다면 무척 위험했다. 마력 양이 적고,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제국의 마법사들은 확실히 불리했다.

“내가 세인트에서 교수 노릇을 해주는 게 나의 최선인 건 알고 있을 텐데?”

카신이 가볍게 농담처럼 넘겼다. 하지만 루터는 그가 하는 말이 진심인 걸 알고 있었다.

중립. 아니, 방관자에 가까웠다. 카신은 전쟁이 일어나도 지금의 행동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추측이 아닌 확신이었다.

‘그 사이에 히나가 끼어 있으면 모를까.’

하지만 히나가 전쟁에 끼어들 가능성은 무척 적었다. 애초에 히나가 지원을 한다고 해도 그 전에 카신이 바로 막을 것이다. 카신이 히나를 조금이라도 위험성이 존재하는 곳에 보낼 리가 없다.

“왜 전쟁 얘기를 해요? 전쟁이 일어나요?”

“일어날 리가. 감히 제국에 누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겠어. 그냥 물어본 거야,그냥.”

심각한 생각을 집어치우며 루터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제국의 마법사들의 마력이 약하다는 건 카신만이 아는 사실이었고, 자신이 말한 것처럼 감히 제국에 전쟁을 신청할 나라는 없었다.

“그럼 리베리아 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루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못마땅한 시선을 한 카신의 눈과 마주쳤다.

“오늘은 더 이상의 훈련은 무리일 것 같고.”

카신의 시선이 잠시 히나의 머리끝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만 가지 그러나?”

“네? 버, 벌써요?”

“그럼 여기서 뭘 할 테지?”

루터는 입술을 다물었다. 태어나 이렇게 대놓고 방해꾼 취급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눈치를 보며 잔뜩 위축된 건 처음이었다.

“벌써요? 오랜만에 왔는데 아쉽네요.”

히나의 말에 카신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리곤 그는 루터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도와준다고 했잖아? 카신은 눈으로 그리 말하고 있었다.

“히나. 여기 오랜만에 왔잖아? 그러니 교수님과 조금 더 있다가 오는 게 어때?”

“하지만 그럼 오라버니는 혼자 가야 하잖아요?”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지. 네 오라비 말대로 네 방도 있으니 여기서 자고 가는 게 어떠니?”

카신이 기회를 덥석 물었다. 아무리 돕기로 했다지만, 카신의 행동이 참 얄밉다고 생각하던 루터는 자고 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자고 간다고요? 히나가 왜 여기서 자요?”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아? 다 큰 여자애한테 자고 가라니? 혈연지간이 아니라고 오누이 사이에 한방에 있지도 못하게 하면서?

불만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루터를 보며 카신은 한숨을 쉬었다.

“리베리아 군, 피곤하니 자네는 이만 가는 게 어떤가? 오늘은 내가 히나에게 할 말이 있거든.”

카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터의 몸에 몽롱한 빛이 흘렀다. 루터는 점점 사라지는 자신의 몸을 보며 다급히 말했다.

“그렇다고 외박은……!”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루터의 몸을 보며 히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히나, 자고 갈 거지?”

당연한 목소리로 묻는 카신을 보며 히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네 오라비는 고된 훈련으로 피곤해 보여 먼저 돌려보냈단다. 몸이 저 지경이 됐으니 아무리 회복약을 먹었어도 힘들겠지. 그러니 어서 쉬게 하는 게 좋아.”

카신은 다급히 히나의 말을 끊으며 자신이 한 행동에 타당성을 부여했다. 히나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그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보다 오늘은 네게 할 말이 있단다.”

“할 말이요?”

“그래, 아주 중요한 말이지. 그러니 오늘은 별궁에 머물고 그 얘기를 들어주지 않겠니? 리베리아 후작에게는 내가 사람을 보내 말해두마.”

오늘은 꼭 말해야 했다. 더 이상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룰 수 없었다.

협조적이지는 않지만, 루터에게 도와준다는 확답도 받았다. 거기다 히나의 반응을 보아하니 거절당할까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더 빨리 말하지 않으면 그녀는 계속 혼자 애만 태우리라.

‘애가 타는 건 내가 더하니.’

히나의 마음이 아니라고 해도 말을 할 것이다. 더 기다리다 미치기 전에.

“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게요. 대신 아버지께는 꼭 말해주셔야해요.”

그의 진지한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대답을 미루고 있던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카신은 한편으로 안심하며 편히 웃었다.

* * *

카신이 히나의 말을 끊으며 강압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아무리둔하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이 카신에게 특별 취급을 받고 있다는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무슨 말이길래 그럴까?’

아마 아주 중요한 말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한테만 해주는 말이겠지?”

특별 취급.

처음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어딜 가서 특별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카신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남의 말을 절대 듣지 않은 안하무인인 그는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는다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 대우였다.

“혹시 성력을 먼저 보여주지 않아 실망하신 걸까?”

발끝을 보고 있던 히나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히나는 성력을 스스로의 의지로 손에 모을 수 있게 되면서, 스승인 세이나를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카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면 신녀님하고 그만 있으라는 걸까?”

카신은 세이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불쾌한 감정에 휩싸였던 것이 부끄러울 만큼 말이다. 세이나 얘기를 할 때 카신의 표정만 보아도 그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심각한 말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카신 님과 어색해지는 건 싫으니까.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히나는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녀의 방이라며 시녀가 소개해 준 곳이었다. 전에 머물던 시녀 방이 아닌 정말 귀족의 귀한 영애에게 어울리는 고풍스러우면서도 귀여운 방. 전에는 이런방이 없었다. 그녀가 없던 사이에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똑똑.

“히나, 들어가도 되겠니?”

정중한 노크 소리에 당연히 시녀일 거라 생각했다. 히나는 카신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네, 들어오세요.”

수려한 외모에 강렬한 노란빛 눈동자, 거기에 세상을 초월한 듯한 분위기.

볼 때마다 설렜다. 그의 별궁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도 가슴 뛰게 만들었다.

“네 방은 마음에 드니?”

“이렇게 만들어주지 않아도 되는데. 감사해요, 카신 님.”

카신은 한쪽 눈썹을 쓰윽 올렸다. 잡았다고 생각하면, 또 어느새 거리를 두는 그녀의 말과 행동이 섭섭했다.

하지만 그건 오늘로써 끝이다. 이제는 확실히 할 것이다.

“히나, 네게 할 말이 있다고 했지.”

“예, 카신 님.”

“그 말을 지금 하고 싶은데.”

“지금이요?”

히나를 조금 쉬게 한 다음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며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결심이 서니 마음이 조급했다.

그녀가 어딜 가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어서 말하지 않으면 이대로 놓칠 것 같았다.

“그래, 지금. 지금 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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