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70화 (70/128)

70.

자신의 욕심으로 히나를 억지로 신분 제도에 끼워 넣었다. 루이스가 만든 상황이긴 하지만, 그도 굳이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와의 미래를 생각하며 동조했다.

처음엔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안하기만 했던 히나는 귀족 사회에 완전히 적응했다. 황궁 학교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히나의 마음은 이미 내게 향하고 있지.’

히나가 맹목적으로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신은 은연중 자신이 없었다.

루이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시선처럼 ‘그게 이성적인 사랑이 아닌다른 감정이면 어쩌지?’ 하는 의문과 불안. 그래서 그녀가 적응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핑계를 대며 미뤄온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아닌 걸 알았으니.’

루터가 말해준 히나의 마음이 기폭제가 되어 그를 자극했다. 카신은 자신이 고작 조그만 애송이의 말에 휘둘린 것에 기가 찼지만, 루터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 말이 무엇인가요, 카신 님?”

짙은 갈색빛이 감도는 맑고 깨끗한 눈동자.

카신은 맑은 눈만큼이나 순수한 그녀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으면서도 더럽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구나.”

카신은 히나의 코앞까지 걸어갔다. 순진한 눈망울에 당황한 기색이 깃들었다.

히나는 얼굴이 붉어지자 시선을 슬그머니 옆으로 비틀었다. 카신은 그녀의 턱을 잡고 도로 돌렸다.

“나를 사랑하니?”

히나가 몸을 움찔했다.

“저, 전 사랑의 묘약을 마셨으니…….”

그녀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사랑의 묘약이라.”

카신은 픽 웃었다.

그때의 심술이 이런 상황을 야기할 줄이야.

“그래서 날 사랑한다는 거니?”

“그 약을 마셨으니…… 당연한 거잖아요?”

히나의 목소리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가까이에서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당연히 나를 사랑한다라. 그것참 좋은 말이구나.”

어째서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몰아붙이는 거지? 히나는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턱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뒤로 한 발짝 물러서려 했다.

“그럼 히나.”

뒤로 도망가려던 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항상 무심하고 태만하던 그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무척 뜨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앞으로도 당연히 나를 사랑하겠지?”

“묘약의 효능이 없어지지 않는 한은…….”

“잘됐구나.”

히나는 카신이 왜 이런 걸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잘못을 해서 벌로 마신 거라지만 이건 너무 과도한 게 아닌가.

평생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혼자 설레고 가슴을 두근거리는 것도 억울했다. 항상 카신을 볼 때마다 애써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힘들었다. 한데 그 말을 억지로 내뱉게 만들다니.

히나는 울고 싶은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도 같은 마음이니 말이다.”

힘이 꽉 들어갔던 그녀의 입술은 곧 힘이 풀리며 살며시 벌어졌다.

“네가 졸업을 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내가 조금 급해서.”

허공에 있던 그녀의 한쪽 발이 제자리로 도로 돌아왔다. 히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의 얼굴이 가까이 오는 걸 바라보았다.

“서로의 마음이 같으니, 이대로 연인이 되어 평생을 함께하는 게 좋겠구나.”

쪽.

작게 벌어진 입술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것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이한테 하듯, 아주 가볍고 귀여운 입맞춤이었다.

“어떠니, 히나?”

히나는 얼음이 되어 굳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도망가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카신은 애가 타는 마음을 숨기며 그녀를 재촉했다.

“네가 허락의 말을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란다, 히나.”

이 상황에서 거절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카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위치는 높아졌고, 마음도 이미 확인했다. 여기서 그녀가 도망갈 일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있던 히나가 두 손을 들어 그를 밀어내는 행동에 그 확신은 산산이 깨져 버렸다.

“잠깐…….”

도로 돌아왔던 그녀의 발걸음이 다시 떨어지며 히나가 뒤로 물러났다.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생각할 시간? 어째서지?”

히나는 불만에 찬 카신의 음성에 몸을 살짝 떨었다. 항상 상냥하고 친절했기 때문에 계속 까먹게 된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냉소적이고 강압적인지.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카신 님과 제가 인연이라니…….”

치맛자락을 매만지며 히나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여러 생각을 하나씩 정리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남녀가 만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절대 거절하지 못하게끔 압박을 가하는 그의 행동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히나는 저도 모르게 그렇네요, 하고 대답하며 수긍하려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카신 님은 대마법사님이시잖아요.”

카신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게 어떻다는 거지?”

몰아붙이는 카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히나는 그녀에게만은 순하고 다정했던 그가 강하게 나오자 조금 겁이 났다.

“저와 어울리지 않아요, 카신 님은.”

“뭐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너는 대대로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을 맡아온 리베리아 후작가의 여식이고, 나는 황궁 소속의 대마법사. 이보다 더 어울리는 조합은 없을 텐데?”

조금이 아니라 많이 났다, 겁이.

히나는 어지러운 생각들을 정리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마법사님은 독보적인 존재잖아요?”

카신은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전설이었고, 우상이다. 아주 오래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황궁 마법사 수장이라고 해도 그와는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 누가 살아 있는 전설인 대마법사의 연인으로 어울릴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의 생각 따위는 필요 없어, 히나.”

다소 사나운 목소리였다. 히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보았다. 카신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연인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차라리 제물로 바쳐진다고 하는 것이 더 상상하기 쉬웠다.

“나는 네 의사만 중요해. 그러니 다른 것들 생각은 다 집어치우고 네 의견을 듣고 싶구나.”

카신은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히나로 인해 조급해서 미칠 것 같았다.

애초에 카신은 루이스가 히나와 그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히나를 애완동물을 키우듯이 대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히나가 그 관계를 신경 쓰고 있다니. 거기다 대마법사라는 이유로 안된다니.

“그렇게 내가 대마법사인 것이 꺼려진다면 그따위 칭호, 당장 버리고 오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히나는 당장 대마법사를 관둬 버릴 것 같은 카신을 다급히 붙잡았다.

“그럼 내가 왜 안 된다는 건지 설명하고 날 납득시켜 보렴.”

“카신 님은 나이도 아주 많고…….”

히나가 또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들먹이자 카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신체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란다. 올해로 열일곱이 된 너와 나이 차이는 꽤 있다만 귀족 사회에서 이 정도 나이는 그리 큰 차이도 아니지.”

“아니, 지금 그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또 무슨 문제가 있지?”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여태 참아온 것이 터지기라도 한 듯, 카신은 그녀를 세차게 몰아붙였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요. 그래서 조금 당황스럽고, 또 믿기지가 않아서…….”

“어째서 갑작스럽다고 하는지 모르겠구나. 난 네게 꽤 적극적으로 표현했는데 말이다.”

적극적으로 표현했다고?

히나는 그간 받았던 카신의 특별 취급을 떠올렸다. 조금만 지켜보아도 카신이 사람들과 엮이는 것 자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보이기 때문에, 그가 그녀를 특별 대우 하는 걸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특별 대우를 이성적인 감정에서 우러나온 호의라고 보진 않을 것이다. 그건 히나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제가 성력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겨우 성력 때문에 널 특별히 대우했다고? 히나, 넌 이제 막 성력을 조절할수 있게 되었어. 거기다 그 수준은 하루에 한 번 겨우 쓰는 정도지.”

“그게 아니라도 전 카신 님의 시녀였잖아요?”

히나의 입에서 계속 부정의 말이 나오자 짜증이 치밀었다. 카신은 신경질적으로 반박했다.

“그간 내 시녀가 얼마나 많았는지 듣지 않았니?”

“그럼 차를 카신 님의 입맛에 맞게 타서…….”

“그래, 그렇게 맛없는 차는 난생처음이었지. 내 입은 정상이란다, 히나. 너도 주말에 리베리아 가에서 시녀가 타주는 차를 마시면서 네 차가 얼마나 맛이 없는지 이제는 알지 않니?”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카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자신을 거부하는 히나에게 화가 났다.

“형편없는 네 차에 익숙해졌을 뿐이지, 그렇다고 맛있는 건 아니란다. 네가 타준 차를 마신 건 단순히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야.”

카신의 말처럼 히나는 자신이 얼마나 차를 못 타는지 알고 있었다. 카신의 시녀로 들어가기 전, 급히 배운 거니 서툰 건 당연했다.

하지만 카신은 차 맛에 대해 불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입맛에 잘 맞나 싶었다. 남의 눈치 따위는 절대 보지 않고 사는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널 처음 보자마자 네 성력에 호기심을 가진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세상에 인간이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힘은 넘치도록 있고, 나는 그런 힘을 꽤 많이 본 편이지.”

신랄하게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히나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가 평소 남에게 생각 없이 막말을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듣는 느낌은 또 달랐다.

“그러니까 히나, 네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든 내 마음과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던 히나가 슬금슬금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카신은 은근슬쩍 도망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도망가지 말고 대답하렴, 히나. 다른 건 몰라도 내 마음에서 도망가는 건 봐줄 수 없구나.”

“이건 도망이 아니라…….”

“네가 내게서 도망갈 수 있는 건 나를 보는 게 부끄러워서, 설레서 도망가는 것까지야. 내 마음에서는 용납 못 해.”

히나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란 단호한 의지가 담긴 그의 눈과 꽉 붙잡힌 손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강압적이고 저돌적인 카신이 낯설었다.

“어서, 히나. 방금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니?”

또다시 카신이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저는 카신 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걸 다 제쳐 두고서라도 가장 걸리는 게 있었다.

“카신 님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요. 절 좋…… 아하는 마음에 얼마나 특별 취급을 해주셨는지도 이제는 알겠고요.”

히나는 아직도 카신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모든 배려와 다정함이 이성적으로 좋아해서 그런 거였다고 하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의 묘약으로 카신 님을 좋아하고 싶지 않아요.”

“히나, 그건…….”

히나가 이렇게나 사랑의 묘약을 맹신하고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 못 한 카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던 비밀이었다. 하지만 사랑의 묘약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 착각하는 히나를 보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먹은 것이 묘약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것이 예상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로 인해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보단 나았다. 잠시 뜸을 들인 카신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건 네가 날 배신하고 돌아선 것이 괘씸해서……. 그래, 네가 괘씸했어. 나는 이렇게 네게 관대하게 구는데도 도망간 게 말이야.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내게 맹세하자마자 떠나고, 거기다 그렇게 다치고 온 것에 화가 났어.”

처음 듣는 카신의 속마음.

항상 들어주기만 했던 카신이 진정으로 속내를 내비치자 히나는 놀라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회복약을 사랑의 묘약이라고 속인 거란다.”

“그게 사랑의 묘약이 아니라고요?”

“그래.”

“하지만 약을 먹자마자 카신 님이…….”

히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사랑의 묘약을 먹고 나서 그를 보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건 단순히 회복약이야. 상처를 빨리 낫게 해주는 약이라고.”

그럼 난 언제부터 그를 사랑한 거지?

기억을 더듬던 히나는 심장이 떨리고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카신의 시녀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가 인체 실험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럼 처음부터?’

심장이 뛰고 얼굴이 뜨거워지고.

처음엔 무서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에 대한 두려움이 옅어질 때마다 그 증상은 더 심해졌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데리고 인체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그걸로 네가 괴로워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건 내가 잘못했다. 하지만 히나, 이것 하나만 명심하렴. 너는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했고, 나도 같은 마음이란다.”

나는 사랑의 묘약을 마시지 않았어. 거기다 이 마음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오래된 거야. 거기다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나와 같은 마음이고.

간절히, 아주 절박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카신을 보며 히나는 그간 잘못 알고 있었던 모든 기억과 생각을 하나씩 뒤엎었다.

그녀는 카신에게 대답하기 위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뗐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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