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73화 (73/128)

73.

“안 돼.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카신이 앞으로 나와 히나의 몸을 등 뒤로 숨겼다. 한 손을 들어 소매가 넓은 옷으로 그녀의 시야까지 모두 가린 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여기까지 데려온 거면 보여주려고 온 거 아니야?”

불만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히나가 카신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

“초면에 죄송해요! 안녕하세요, 저는 히나 피안 리베리아라고 합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칼피온은 곧 눈꼬리를 반달로 휘며 웃었다.

“나는 그냥 칼피온이라고 부르면 돼.”

칼피온이 손을 내밀었다. 무시무시한 드래곤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하얗고 고운 손이었다.

머뭇거리던 히나가 조용히 손을 내밀며 악수를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카신이 한 손을 들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두거라, 히나. 지금은 저것과 닿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

히나를 잠시 뚫어지게 보며 칼피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평범한 인간이 맞아?”

카신이 막고 있는 팔 위로 칼피온이 얼굴을 쭉 내밀었다.

“엄청 기분 좋은 기운을 갖고 있네?”

칼피온의 반응을 보며 카신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깜빡해 버렸다. 히나에게 성력이 있다는 것을.

“히나는 성력을 가진 인간이야.”

“성력? 처음 듣는 이름인데? 신력…… 은 아닌데 말이지.”

신력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쁜지 칼피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둠의 힘을 억지로 정화하는 신력과는 달랐다. 히나가 어렴풋이 흘리는 성력은 자신의 힘을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주변을 맑고 깨끗한 기운으로 바꾸는 힘이지. 모든 걸 정화시키려고만 하는 신력하고는 달라.”

카신은 굳이 히나가 가진 힘을 숨기지 않았다. 라우너에게도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진짜 짐승인 칼피온이 못 느낄 리가 없다.

단순히 감이 좋은 인간인 라우너와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우월하고 강인한 칼피온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마 칼피온은 히나에게서 그 이상의 것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러니 만지지 마. 아직 히나는 성력을 조절하지 못하니까.”

블랙 드래곤인 칼피온과 히나는 힘의 상성이 맞지 않았다. 순수한 어둠을 가진 칼피온의 힘과 조금 충돌하는 것만으로도 히나가 또다시 폭주할 수도 있었다.

“성력을 가지면 드래곤 님과 악수하면 안 되는 거예요?”

히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카신은 히나를 보며 날이 선 목소리를 풀었다.

“칼피온은 블랙 드래곤이란다. 네 힘과 닿으면 또 폭주할 위험이 있으니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겠구나.”

“블랙 드래곤이요?”

드래곤의 색이나 가지고 있는 힘에 따라 앞에 블루, 레드 등의 이름이 붙는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블랙 드래곤은 히나에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히나는 밤하늘보다 까만 칼피온의 머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만 년에 한 번, 희귀하게 태어나는 드래곤이지. 인간들의 기록에는 아마 나오지 않았을 게다.”

그래서 불길한 드래곤. 그게 칼피온이었다.

카신은 굳이 알아도 되지 않을 설명은 배제한 채 칼피온에 대한 설명을 넘겼다.

“맞아. 난 꽤 희귀해서 다른 드래곤들도 잘 모르거든. 그러니 인간의 기록 따위에 블랙 드래곤의 정보가 있을 리 없지.”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려는 의도인지 칼피온이 두 손바닥을 보이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힘을 완전히 억누르면 우리가 닿아도 절대 폭주할 리는 없…….”

카신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칼피온은 히죽 웃으며 양손을 저어 보였다.

“이렇게 말해도 누구는 믿지 않을 테니까, 히나가 성력을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거리를 유지하도록 할게. 히나라 불러도 되지?”

크고 위엄 있는 드래곤을 상상했던 히나는 가볍고 재미난 칼피온을 보며 웃었다.

“네! 저도 칼피온 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아니.”

즉각적인 거절에 히나는 눈을 크게 떴다.

웃고는 있지만, 역시 드래곤은 인간을 싫어하는 걸까?

“거기서 님만 빼줬으면 하는데. 난 칼피온 님이라고 불리면 낯간지러워서 싫다고. 편하게 칼피온이라고 불러.”

“그래도 되나요, 칼피온?”

“물론이지.”

히나와 칼피온이 친근한 대화를 나누자 카신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언제부터 알았다고 서로 이름을 부르고 친숙하게 대하는 건지. 마냥 가볍게 굴며 다가오는 칼피온이 꼴 보기 싫었다.

“드래곤이라고 들어서…… 엄청 커다란 모습을 생각했어요.”

“얼마 전까지는 커다란 모습이었는데, 손님이 찾아와서. 다시 모습을 바꾸기 귀찮아서 이대로 있었지.”

그리 말하며 칼피온은 카신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살기 어린 눈을 보자마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 로티우스가 진짜로 사랑하게 된 인간 여자란 말이지.’

얼마 전 찾아온 사람이 카신이라는 걸 말한다면 당장 죽일 기세였다. 감정이 이렇게 오락가락 변하는 카신은 처음 본지라 칼피온은 신기하기만 했다.

“제가 본 책에서는 드래곤은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손님도 오는 거 보면 그것도 아닌가 봐요.”

“교류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 귀찮거든.”

히나가 무척 적극적인 칼피온을 가만히 보다가 곧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농담하고 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히나, 어서 물어볼 거 물어보고 가자꾸나. 네 힘은 칼피온과는 상성이 맞지 않아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단다.”

“물어볼 거? 물어볼 게 있어? 나한테?”

칼피온은 눈을 크게 뜨며 히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카신은 칼피온이 한 발자국만 가까이 가도 으르렁거리며 당장에라도 위협할 것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며칠 전에 찾아왔을 때도 느낀 거였지만, 그는 본래 히나를 절대 보여주지 않을 셈이었다.

‘그럼에도 데리고 왔다는 건 앞에 있는 이 인간 여자가 먼저 나를 보고 싶다고 해서겠지.’

칼피온은 드래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카신이 왜 히나에게 제 얘기를 했는지도 궁금했지만, 그보다 카신이 히나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가 더 궁금했다.

칼피온이 본 히나의 외양은 전체적으로 가늘고 여리지만, 살짝 살이 오른 뺨이 동글동글해서 무척 귀여웠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폴리모프를 한 여성 드래곤이나 엘프 중에서도 아름답다는 하이엘프를 많이 봐온 그에게 히나는 평범한 인간 여자였다.

‘도대체 어디에 빠진 거지?’

분명 카신은 자신이 히나에게 관심을 갖는 것 자체도 불쾌해했다. 하지만 히나의 말 한마디에 그녀를 그의 레어까지 직접 데리고 온 걸 봐선 단단히 빠진 게 분명했다.

“네! 칼피온에게 저나 카신 님은 같은 인간이잖아요.”

“흐음, 아마도?”

칼피온은 애매한 대답을 했다. 카신을 순수한 인간이라 생각한 적이 없어서인지 긍정의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우리가…… 어울릴까요?”

부끄러운 것인지 히나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어울리냐고?”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사는 곳에선 카신 님과 저를 그렇게…… 그러니까 그런 관계로는 전혀 보지 않거든요. 그래서 객관적인 시선이 궁금했어요.”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대에 찬 눈을 한 히나. 대충 알겠다고 대답하라며 눈으로 무언의 압박을 하고 있는 카신.

칼피온의 시선이 히나와 카신에게 번갈아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가 씨익 웃었다.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면 만나지 않을 거야?”

“네?”

“좀 그렇잖아? 이제 막 처음 본, 인간인 너와 종족도 다른 내가 안 어울린다고 하면 만나지 않을 거야? 언급하는 것도 이렇게 부끄러워하면서 다시 원래 사이로 돌아갈 수나 있을까? 아니면 앞으로 영영 아예 얼굴도 마주하지 않으려고?”

가벼운 어조였지만, 칼피온의 말은 히나의 정곡을 찔렀다.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긴 히나가 곧 홀가분한 얼굴로 웃었다.

“아니요. 계속 카신 님하고 있을 거예요. 전 카신 님을 좋아하거든요.”

히나의 뜬금없는 고백에 카신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아니, 아예 그렇게 봐주질 않으니까 불안했어요. 안 되는 줄 알고요. 그래서 그렇게 보지 않아줄 분을 보고 싶었어요.”

“흐음, 그래?”

꼭꼭 숨겨놓았던 마음을 수줍게 고백하는 히나를 보며 칼피온은 곧 하하, 웃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못 보겠네. 아무리 봐도 너무 안 어울려.”

“칼피온!”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신이 솔직하게 말한 칼피온을 다급히 불렀다. 살의가 담긴 카신의 눈에 칼피온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같이 있는 모습도 엄청 웃겨. 꼬마랑 어른이 사귀는 것보다 더.”

그리 말하고 칼피온은 배를 잡고 폭소를 터트렸다.

“당장 죽여 버린…….”

칼피온의 말에 충격에 빠진 히나가 곧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카신은 모든 행동을 멈춘 채 히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진짜 안 어울려요.”

배를 잡고 웃고 있던 칼피온이 웃음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음기가 도는 히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칼피온.”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지 히나는 말갛게 웃었다.

“그리고 초면에 실례지만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뭐?”

안달 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카신을 모른 척하며 칼피온이 물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다시 봐주시겠어요? 제가 카신 님께 어울리는 여자가 되었는지 말이에요!”

“흐음, 될 수 있을까?”

“될 거예요. 저 지금도 노력 엄청 하고 있는걸요?”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발끝에도 어울리지 않을걸?

칼피온은 속마음을 굳이 말하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나중에 또 봐주지. 열심히 노력하라고.”

노력하고 있다는 히나가 가상해서 굳이 진실을 말해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성력이라는 이상한 힘을 갖고 있어서인가? 칼피온은 노력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히나가 꽤 마음에 들었다. 카신을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 즐거워서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마음에 들어도 카신과 어울린다는 말은 절대 얘기해 주지 않을 거지만.’

길고 지루한 시간을 사는 칼피온에게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흥밋거리였다.

“답을 냈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자, 히나.”

카신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칼피온이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초조했다.

“벌써? 그러지 말고 조금 더 놀다 가지.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말이야.”

칼피온은 절대 이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시간이 지나고 카신에게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주 진귀하면서도 맛있는 차가 있거든.”

히나의 차림새를 보고 귀족인 것을 바로 눈치챈 칼피온이 솔깃한 제의를 건넸다.

귀족의 귀부인이나 영애는 고상하게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인간계로 유희를 간 지는 오래됐지만, 진귀한 차는 시대를 불문하고 귀족들에게 인기몰이를 해왔다.

“맛있는 차요?”

솔깃한 건지 히나가 카신을 제치고 칼피온 앞으로 다가갔다. 카신은 다급하게 말했다.

“차라면 돌아가서 마시도록 하자꾸나, 히나.”

눈을 가늘게 뜨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쏘아보는 카신을 무시하고 칼피온은 히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은 차를 아주 잘 내리거든.”

“카신 님, 차는 여기서 마시고 가요. 그래도 되죠?”

카신은 상큼하게 웃으며 묻는 히나에게 결코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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