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그럼 카신은 급한 볼일이 있다면 먼저 가도록 해. 히나, 어디에 살아? 내가 데려다줄게.”
“설마 드래곤으로 변해서 데려다주는 거예요?”
히나는 순간 커다란 드래곤을 타고 황궁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칼피온이 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설마. 이동 마법은 나도 쓸 줄 안다고. 본체로 돌아가서 널 데려다줬다가는 재앙이 몰려온다고 인간들이 아주 난리를 칠걸?”
“아, 드래곤은 마법을 아주 잘한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어요.”
“드래곤들도 기본적으로 마법을 아주 잘 쓴다고. 물론 로티우스만큼 섬세한 마법은 못 하겠지만, 나도 인간들 입이 쩍 벌어질 만큼은 하지.”
칼피온이 너스레를 떨며 조금 더 히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칼피온을 향하던 히나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볼일은 없어. 나도 같이 마시도록 하지.”
히나의 앞을 막은 카신이 칼피온을 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칼피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히죽 웃기만 했다.
“그럼 자리를 옮길까?”
칼피온이 두 손가락을 튕기며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공간이 바뀌었다. 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나무 속에 집을 지으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집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이나 벽, 그리고 작은 소품까지. 히나는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손님이다, 엘레샤르. 차를 내와.”
“예, 칼피온 님.”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에 히나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리고 긴 은빛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얼굴을 한 엘프를 보며 입을 작게 벌렸다.
아름답다는 말로 다 표현되지 않았다. 살랑거리는 은빛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에 삐쭉 튀어나온 귀.
물론 카신이나 칼피온도 신기할 만큼 잘생겼다. 하지만 앞에 있는 엘레샤르는 그 이상이었다.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인 엘프란다. 엘프도 처음 보겠구나.”
옆에서 들려오는 카신의 설명에 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아름다우세요.”
히나의 시선이 다시 엘레샤르에게 향했다. 넋 놓고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카신은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었다.
히나가 강하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유독 약하다는 사실은 이제 놀라울 것도 없었다. 카신은 진지하게 여자가 되는 마법을 연구해야 하나, 고민했다.
“앉아, 히나. 로티우스도.”
빙글빙글 웃으며 테이블을 가리키는 칼피온에게 눈치를 줘도 더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카신은 히나를 데려가는 걸 포기한 채 자리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칼피온을 주시하며.
* * *
와장창!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쓸어내고 던져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제이스는 씩씩거리며 조금 더 화풀이할 것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녀들은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방 밖에서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벌벌 떨고 있었다. 그때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흑발의 남자가 시녀들을 지나치며 문으로 다가갔다.
“전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시녀들이 그 앞을 막기도 전에 남자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지 못하는 제이스를 보며 싱긋 웃었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내가 고정하게 생겼나! 루이스 그놈이 풀토 공작도, 나를 지지해 주겠다던 귀족들도 모두 잘라 버렸다고! 여기서 헬렌이 황자를 낳기라도 한다면…….”
그를 지지했던 귀족들이 연달아 처형당하며 제국은 꽤 불안정했다. 하지만 그건 제국의 황후, 헬렌의 임신 소식이 들리며 가라앉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금실 좋기로 유명한 루이스와 헬렌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루이스나 헬렌 중 누군가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했다.
‘이래서 더 서둘렀건만!’
루이스가 이대로 죽는다면 황위 계승권 1순위인 제이스가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제이스는 바로 이점을 노렸다. 어째서 황후가 임신을 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건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런 때를 예상하고 일부러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해!’
능구렁이 같은 루이스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고 끄는 능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그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곧 닥쳐올 어지러운 상황을 가라앉히기 위해 황후를 임신시킨 것이 분명했다.
루이스는 모반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가차 없이 역모자들의 싹을 잘랐다. 그로 인해 연달아 귀족들이 처형당하며 대대적으로 큰 물갈이가 이뤄졌다. 때문에 제국의 백성들은 갑작스레 뒤바뀐 영주나 관료들로 인해 불안한 마음에 휩싸여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황자를 낳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난다고!”
그렇지 않아도 황제에게 뒤늦게 황손이 들어섰다는 소식과 함께 심란했던 제국이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루이스가 황후의 임신을 기념하기 위해 곳간을 풀어 백성들에게 음식을 베푼 것도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 한몫했다.
황권은 강화됐다. 그리고 앞으로 더 강화될 것이다.
“뭘 그렇게 불안해하십니까. 처음부터 그들이 잘해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제이스가 곧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는 한결 풀어진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랬지. 하지만 계획이 틀어져도 너무 틀어졌어.”
원래 계획대로라면 제이스는 자신을 지지하던 풀토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의 힘을 빌려 더는 황권이 강화되지 않도록 막았어야 했다. 하지만 역으로 그를 지지하던 제 편들을 모두 잃었다.
“이를 어쩌면 좋나, 코반드 후작?”
제이스가 지금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플로라 왕국의 코반드 후작이었다. 제이스는 초조함을 드러내며 코반드 후작을 쳐다보았다.
“절 믿으십시오, 전하. 대마법서를 훔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저에게 아주 좋은 비책이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비책이기에 대마법서를 훔치지 못한 걸 아쉽다는 말로 끝낼 수 있을까.
제이스는 눈에 의심을 품은 채 코반드 후작을 관찰했다.
큰 키에 붉은 머리카락, 그보다 더 붉은 눈동자. 그리고 아마 수려했을 거라 예상되는 외모.
하지만 검고 커다란 안대로 인해 그의 얼굴은 반 가까이 가려져 있었다. 화상을 입은 건지 안대에 채 가려지지 않는 흉측한 피부는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역시 수상해.’
코반드 후작은 루이스에게 밀려 황제가 되지 못한 제이스의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고작 왕국의 귀족 주제에 황제의 자리를 꼭 되찾아주겠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감히 절대적인 힘을 보유한 제국을 상대로 말이다.
‘하지만 이제 믿을 거라곤…….’
플로라 왕국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모두 코반드 후작 덕분이었다. 코반드 후작은 플로라 왕국의 왕도 소개시켜 줬으며 그를 지지하는 제국의 귀족과도 연락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뿐인가. 주변 왕국들과 은밀히 접촉하여 연합국을 만들었다. 비록 제국과 떨어져 있는 힘없는 약소국이긴 하나 그래도 다섯 나라가 힘을 보태준다고 했다.
연합국의 군사 병력을 모두 합친다면 제국의 병력과 엇비슷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연합국의 병력이 훨씬 더 우세했다. 전쟁의 핵심이 될 마법사의 수가 확연히 많으니까.
“대마법사의 마법이 강하다고는 하나 그건 그가 움직였을 때의 얘기입니다. 대마법사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제국의 마법사는 별거 없지요.”
“그래도 제국의 마법은 아직도 독보적이지 않나. 제국의 마법사가 왕국 마법사에 비해 떨어진다는 말이 정말 사실인가?”
“물론입니다. 전하, 전쟁은 장기전입니다. 단번에 승패를 내는 대련이 아닌 전쟁이라면 마력이 우위인 연합국의 마법사들이 더 우세합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독보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제국의 마법사가 다른 왕국의 마법사들보다 마력이 떨어진다니.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승산, 아니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다. 마법사들의 마력도 강한데, 마법사 수도 많다면 무조건 승리를 거머쥘 것이다.
“그보다 그 시녀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됐습니까?”
“대마법사의 시녀로 있었던 계집을 말하는 건가?”
“예. 대마법사가 직접 구하러 왔다던 시녀 말입니다.”
제이스는 풀토 공작이 잡혀가기 직전까지 보냈던 보고를 떠올렸다.
시험 삼아 보냈던, 별 기대도 없었던 시녀라고 했다. 하지만 그 시녀는 의외로 대마법사의 관심을 끌어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시녀는 대마법서와 지팡이도 훔쳤다고 한다.
“아무리 대마법사가 게으르고 나태하다고 해도, 고작 시녀 한 명이 지팡이와 대마법서를 훔치려던 걸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거기다 별궁에서 나오지도 않는 대마법사가 직접 밖으로 나와 데리고 갔다니.”
코반드 후작이 제 입술을 매만졌다.
“그 시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된다면, 전쟁에서 가장 변수가 될 대마법사의 발을 묶어놓을 계획까지 짤 수 있을 겁니다. 전하께선 계속 제국과 연락을 하면서 그 시녀에 대해 알아봐 주십시오.”
“자네 말대로 조사는 하고 있다만, 루이스 그놈이 풀토 공작과 관련된 일을 워낙 철통처럼 보안해서 말일세. 그보다 고작 시녀 하나에 그렇게 신경을 써도 되는 건가?”
붉은빛을 띠는 코반드의 눈동자가 순간 번뜩였다.
“고작 시녀라니요. 대마법사의 약점이 될지도 모를 시녀입니다, 전하.”
“약점이라니,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닌가?”
코반드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아무리 연합국이 철저히 준비를 하여 제국을 이긴다고 해도 대마법사가 움직이면 끝입니다. 알고 계시겠지요?”
제이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허허, 웃었다. 어린 시절, 그는 루이스처럼 호기심에 카신의 별궁에 몇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일찍이 깨달았다.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카신은 절대 움직이지 않을 거란 걸.
“자네는 대마법사를 직접 보지 않아 모르겠지. 하지만 후작, 대마법사는…….”
“전하.”
코반드가 단호한 목소리로 잘난 척 나열하던 제이스의 말을 잘랐다. 제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기분 나쁜 티를 냈지만, 코반드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전하께서 이곳에 누구 덕에 있는지를 한번 숙고해 주십시오.”
“지, 지금 자네 날 협박하는 건가!”
제이스가 코반드를 손가락질하며 기가 찬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코반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전하를 도울 수 있는 건 뜻이 같을 때뿐입니다. 부디 제 뜻을 헤아려 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
“이, 이……!”
짧게 목례를 하고 가버리는 코반드를 보며 제이스가 그를 가리키던 손을 떨었다. 하지만 제이스는 씩씩거리며 힘겹게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 꼴이…….”
고작 왕국의 후작에게 무시받는 꼴이 되다니.
이게 다 황제가 되지 못한 탓이었다. 황제가 됐다면 아무도 자신을 이렇게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아직 늦지 않았어. 내가 황제가 되기만 하면, 황제가 된다면 저것들은 전부 바닥을 기며 내게 고개를 숙이겠지.”
가장 먼저 루이스를, 그리고 두 번째로 은근슬쩍 저를 깔보는 코반드를 바닥에 머리를 찧게 하여 죽일 것이다. 감히 황제를 기만한 죄를 톡톡히 치르게 할 것이다.
분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참아야 한다. 제이스는 황제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