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저, 정말인가?”
지휘권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지휘권을 플로라 왕국의 왕도 아닌 자신에게 맡긴다니.
플로라 왕국의 왕이 코반드 후작의 꼭두각시라는 것은 진작 눈치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기본적인 명예도 지켜주지 않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제이스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제가 어찌 전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래도 의심스러우시다면…….”
코반드 후작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제이스가 귀를 기울이며 그에게 집중했다.
“플로라 왕국의 국왕이 되시고, 전장의 총괄 지휘자가 되셔도 됩니다.”
제이스는 당장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말을 꺼낸 코반드 후작을 보며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코반드 후작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후작의 얼굴을 몇 번이고 살펴봤다.
“아시다시피 플로라의 왕은 무능하고 힘이 없죠.”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연합군의 총괄 지휘권도 넘겨준다. 거기다 원한다면 그가 모시는 왕 자리까지 손수 빼앗아주겠다고 제의하고 있었다.
제이스가 플로라 왕국까지 온 이유는 왕국과 친밀해서도, 코반드 후작 때문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외당숙 되는 플로라 왕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런 힘없는 작은 나라 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았으리라.
“뭘 그리 놀라십니까? 전하께서도 플로라의 피가 흐르지 않습니까. 왕위에 오르실 자격이 충분하지요.”
힘겹게 겨우 도착한 플로라는 우습게도 늙어 빠진 왕이 다스리는 것도, 권위 없는 공작이 다스리는 것도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마법 연구가라는 후작 하나가 모든 걸 지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의심스럽기만 했다. 아니,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하물며 자신이 모시던 왕을 죽일 생각까지 하며 나를 도와준다고?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네, 원하는 것이 도대체 뭔가?”
코반드 후작이 원하는 건 왕이나 황제가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다.
“저는 대마법사의 목만 있으면 됩니다.”
제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전쟁에서 가장 나서지 않았으면 하는 인물이 대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굳이 대마법사를 노리는 이유는?”
“그는 사라져야 할 존재입니다.”
코반드 후작이 확고한 신념을 보이며 말했다.
“저는 대마법사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제 목숨을 포함해 그 어떤 대가도 치를 자신이 있습니다.”
코반드 후작의 눈이 살의로 불타올랐다. 한쪽 눈이 안대에 가려져 있음에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살기였다.
무슨 원한이 있는 걸까?
아니다. 후작의 나이는 기껏해야 그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정도였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별궁에 칩거해 온 대마법사와 원한이 있을 리가. 게다가 대마법사는 남에게 위해를 끼치기엔 무척 게으른 사람이었다.
“그러니 전하께오선 대마법사가 아끼는 시녀에 대한 정보만 제게 알려주시면 됩니다.”
“시녀가 약점이라는 보장도 없다네. 그것에만 모든 것을 걸기엔…….”
“상관없습니다. 제가 대마법사를 죽이는 것에 실패한다고 해도, 전하께서 황제로 즉위하시는 건 변함이 없으니, 부디 제 소소한 부탁만 들어주십시오.”
“알겠네. 자네가 이렇게까지 해준다니 내 성심성의껏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지.”
제이스는 여태 코반드 후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알아봐 달라 했던 것에 신경을 덜 쓰기도 하고, 알아낸 중요한 정보를 일부러 숨기기도 했다.
하지만 제이스는 이제 그 모든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코반드는 적어도 그를 황제로 만들어줄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 * *
루이스는 전부터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플로라 왕국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오늘은 그 문제의 플로라 왕국이 코랄 왕국과 접촉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것도 한참 전에 말이다.
“도대체 왜 확실한 정보가 아닌 것도 모자라, 전부 뒤늦게 가져오냔 말이다!”
귀신도 이렇게 신출귀몰하지 않으리라.
가장 강력한 제국이 주변국의 움직임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 지금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플로라 왕국으로 간 정보원들이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코랄 왕국의 정보원과도 연락이 두절된 상황입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나이가 지긋한 로티스 공작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한숨을 내쉬었다.
플로라 왕국과 그 주변의 작은 국가 전체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정황을 알 수도 없었다. 사람을 보내도 돌아오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레베스톤 공작, 자네는? 이후 코랄 왕국의 정황은 파악했나?”
루이스는 유일하게 플로라 왕국이 코랄 왕국과 접촉했다는 정보를 가져온 레베스톤 여공작에게 물었다. 확실한 정보도, 자세한 상황에 대한 보고도 아니지만, 지금 기댈 곳은 레베스톤 공작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레베스톤 공작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짧게 텀을 두었다.
“확실치 않은 정보로 내린 결론입니다만, 전쟁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루이스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아무런 정보도 없다. 아는 것이라곤 주변국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과 아무리 알아보려 해도 자세한 사항을 절대 알아낼 수 없다는 것.
두 나라가 서로 벽을 치고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렇게 완벽하게 속셈을 감출 수는 없었다.
“전쟁? 확실한가?”
“코랄 왕국 병사들의 움직임이 수상했습니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플로라 왕국에서는 무리가 있었지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코랄 왕국에서는 그나마 정보를 조금 더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데 백성들은 또 평화롭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피난을 한다거나 전쟁에 대비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레베스톤 공작은 이따위 보고를 올리는 자신에게 환멸이 났다. 전장에서 항상 일등 공신이었던 조상님들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다른 건?”
“……알 수 없었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폐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나라의 동향조차도 모르다니. 이렇게 무력하기는 처음이었다.
“병사들은 뒤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지만, 나라는 평화롭다 이거지. 한데 어째서 전쟁을 준비하라는 건지, 레베스톤 공작?”
“확인한 병사는 소수였으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레베스톤 가는 대대로 감이 좋았다. 특히나 현 레베스톤 여공작은 적의에 그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니 레베스톤 공작의 말을 함부로 간과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제대로 훈련받은 저희 집안의 정보원들까지 모두 연락 두절 상태입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지만, 상대측에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루이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보원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있었다. 왕국과 교류하는 상단에서도 미심쩍은 움직임을 전혀 못 느꼈다고 했지만, 외려 너무 깨끗해서 더 수상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제국의 3대 공작 중 하나인 풀토 공작가가 빠진 상태다. 만약 정말 플로라 왕국과 코랄 왕국이 연합을 맺어 제국에 전쟁을 선포할 각오를 했다면 확실히 지금이 적기다.
“전쟁이라.”
루이스는 손끝으로 책상 위를 툭툭 건드렸다.
“제국의 위대함을 보여줄 때가 된 것 같군.”
감히 대제국에 맞설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를 후회하게 짓밟아줘야 했다. 루이스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명령했다.
“황명이다, 우리도 신속히 전쟁 준비를 시작하라!”
“예, 폐하!”
* * *
“어째서 계속 집에 있는 거야? 세인트에 나가지 않을 거야? 시험 안 볼 거야?”
주말이 되자 루터가 득달같이 달려와 따져 댔다.
상급 졸업반에 올라갈 수 있는 시험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세인트의 모든 학생들이 승급하기 위해, 졸업을 하기 위해 가장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루터는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히나가 갑자기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카신과의 연애가 알려진 것이 부담스럽다고 해도 말이다.
“너와 교수님의 연애는 학교 측에서 인정해 줬다고 진작 알려줬잖아!”
카신은 직접 황제에게 찾아가 히나와의 연애를 허락한다는 승인까지 받아왔다. 그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이 들었지만, 그걸 떠나 학교에서도 카신과 히나의 관계를 인정했다.
“그런데 왜 안 나온 거야? 지금에 와서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말을 할 거면 내가 용서 못 할 줄 알아.”
히나에 대한 카신의 특별 대우는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카신과 연애를 하기 전부터 히나에겐 이미 시기와 질투 어린 시선이 따라다녔다.
사랑이란 감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카신이 연애를 한다는 말에 그 시선이 많아진 것뿐이지, 따지고 보면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부담스럽다고? 극비 문제를 일으킨 시녀 출신으로 귀족가에 들어오고, 세인트에 특례 입학까지 했으면서?
부담스러워서 세인트에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진짜일 리가 없다. 루터는 확신할 수 있었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거야?”
루터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히나를 관찰했다. 퀭한 눈이나 초췌한 얼굴을 보건대 집에 와서도 제대로 쉬지 못한 듯했다.
“그런 거라면 교수님께…….”
“아니요! 그냥 조금 쉬고 싶었을 뿐이에요.”
히나가 당장에라도 카신을 부르려는 루터를 다급히 말렸다.
“정말?”
의심 가득한 눈으로 묻는 루터에게 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에요. 여태 정말 열심히 쉬지 않고 달려왔잖아요. 그러니까 좀 쉬고 싶었어요.”
“시험이 끝나고도 아니고, 굳이 시험 직전에 쉬고 싶었다고?”
“저는 마법 시험이 아니라 성력으로 시험을 치잖아요. 성력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제국에 저 말고 없으니까, 그 기준이 그렇게 높지 않을 거예요. 아마 전에 오라버니에게 했던 것처럼만 써도 충분하겠죠.”
성력은 비교 대상이 없는 유일한 힘이니, 실기 시험의 커트라인이 낮은 건 당연했다. 히나는 얼마 전부터 자유자재로 성력을 쓰게 됐으니, 아마 그 상태만 유지해도 충분히 상급 졸업반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성력이 발견되기 전부터 히나는 루터의 도움을 받아 이론 공부에도 계속 열을 올렸다. 실기에 비해 이론은 그나마 쉬우니, 히나라면 졸업 시험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다.
“신…… 녀님도 더 이상 제게 가르칠 건 거의 없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집에서 이론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험은 충분해요.”
히나는 세이나를 거론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되도록 세이나에 대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빠지는 건…….”
반박할 말이 없어지자 루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싸웠어?”
잠시 무슨 말인지 생각한 히나는 그 대상이 카신이란 걸 깨닫고 아, 하고 숨을 내뱉었다.
“설마요. 카신 님하고는 매일 연락하는걸요.”
히나가 침대 옆에 있는 수정구를 가리켰다.
“정말 쉬고 싶었던 거예요. 말도 없이 갑자기 집에 와서 죄송해요, 오라버니.”
“뭐 그렇다면야…….”
찝찝한 마음을 뒤로한 채 루터는 멋쩍은 목소리로 인정했다. 히나가 얼마나 눈치를 보며 독하게 버텨왔는지 아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걱정…… 아니, 아무튼! 다음부터는 조심해! 알았어?”
입 밖으로 걱정했다고 말하는 것까지는 쑥스러운지 루터가 괜히 소리를 질렀다.
“네. 다음부터는 어디 갈 때 꼭 말하고 갈게요.”
루터가 하는 모든 행동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거짓말을 한다거나 속내를 숨겨도 얼굴에 드러나는 루터를 보니, 히나는 그간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루터 오라버니를 이렇게나 의지하고 있었구나.’
새삼 고마웠다. 적어도 루터와 대화를 하며 의심을 하거나 신뢰가 허물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더 고맙고 미안했다.
‘이번 한 번만 거짓말한 걸 용서해 주세요, 오라버니.’
히나는 속으로 루터에게 몇 번이고 사과했다.
“주말이 지나면 세인트로 같이 돌아가요, 오라버니.”
함께 노력해 준 루터를 위해서라도 어서 마음을 정리하고 세인트에 나가야 했다. 히나는 주말 내에 마음을 견고하게 다지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아, 다음 주 내내 세인트는 임시 휴무야.”
“임시 휴무라니요? 수업을 안 한다고요? 시험이 얼마 안 남았는데요?”
“그게…….”
루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히나에게 뭘 어떻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고민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