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요새 제국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건 알아?”
“심상치 않다니요?”
루터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말했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라.”
“전……!”
히나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오자 루터는 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쉿! 아직 공식 발표가 난 게 아니니까 입 밖으로 말하면 안 돼.”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서야 루터는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그,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루터는 눈살을 찌푸리며 히나를 응시했다.
전쟁이 일어난 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그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세인트 학생, 정확히 상급반은 전쟁에 참전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히나는…….’
성력이 공격성을 띄는 힘은 아니지만, 후방에서 지원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녀가 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은 지극히 적었다.
“아버지가 후작이기도 하고, 황궁 마법사단의 수장이니까, 형이랑 나도 무조건 참전해야겠지.”
아직 전쟁이 공표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세인트, 특히 상급반 학생들은 귀족들이 대부분이니 루터처럼 집에 가면 전쟁 소식을 접할 것이다.
“그럼 카신 님은요?”
히나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물었다.
“교수님은 원래 중립이시잖아.”
“그럼 저는요?”
무어라 답해줄지 몰라 루터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넌…….”
제국법상으로는 세인트의 우수한 상급반은 전쟁에 참전할 의무가 있지만, 귀족 영애가, 그것도 양녀가 전쟁에 참전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성력은 특이하고, 또 하나밖에 없는 힘이니.’
어떻게 말해야 할까. 히나가 여자고, 양녀인 걸 모두 떠나서도 한 가문에서 세 명이나 전쟁에 나갈 필요는 없었다. 후작가에서 명예 참전은 두 명으로도 충분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넌 교수님 옆에 있어, 히나.”
결국 루터는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성력이라면 후방에 배치되겠지만, 그래도 전쟁은 위험해. 그러니까 전쟁은 무섭다고 절대 참전하고 싶지 않다고 교수님한테 말해.”
굳이 히나가 말하지 않아도 카신이 무조건적으로 막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성력이라면 분명 많은 도움이 될 텐데…….”
“히나 넌 검술도, 하다못해 보호 마법 하나도 할 줄 모르잖아. 내 몸 하나 지킬 수 없다면 그건 방해야.”
루터는 일부러 더 단호하게 말했다. 히나가 전쟁에 참여하는 걸 절대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나가 좋았다. 물론 이성적인 마음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렇게 싫었었는데. 이제는 정말 여동생이 되어버린 건가.’
히나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왕 귀족가 영애가 되었으니 다른 아가씨들처럼 평생을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지냈으면 싶었다.
나중에 결혼을 하고 난 후에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에게 달려와 남편을 혼내달라는 투정을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혼내달라는 상대가 너무 무섭지만.’
다른 가족들은 몰라도 루터는 히나를 진짜 동생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가 전쟁에서 가장 떨어진, 안전한 곳에 있었으면 했다.
“알았지, 히나?”
너무나도 진지한 눈으로 묻는 루터를 보고 히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쉬어, 히나.”
“오라버니도 쉬세요.”
방에서 나가는 루터를 보며 히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복잡한 생각들이 가득했다.
* * *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어둠 속. 어둠보다도 더 음산한 형체가 희미하게 생기더니, 점점 뚜렷해졌다.
어둠 속에서 황금처럼 샛노란 눈동자가 번쩍였다. 캄캄한 시야에도 전혀 방해받지 않는 카신은 단번에 히나가 잠들어 있는 침대 옆까지 다가왔다.
잠에 푹 빠진 채 새근새근 숨을 고르게 쉬고 있는 히나의 말간 얼굴이 참 어여뻤다. 잠시 그녀가 잠든 모습 지켜보던 카신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렸다.
‘봉인해야 돼.’
며칠을 계속 연구한 끝에 성력을 봉인할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왕이면 여기서 더 어수선해지기 전에.’
세인트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갑자기 휴교를 한다는 말에 이상했다. 평소라면 제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인트에 다니고 있는 히나가 혹여 무슨 일에 엮이게 되는 건가 싶어 그는 제국에 무슨 일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전쟁? 웃기지도 않아.’
세인트 황궁학교가 당장 무너진다고 해도, 제국에 전쟁이 일어나도, 본래 그가 신경 쓸 건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히나와 연관이 되어 있다.
어차피 히나에겐 위험한 힘이었다. 대가가 있는 힘 따위는 히나에게 필요 없었다. 그녀는 안전한 새장 속에서만 살아야 했다.
“미안하구나, 히나.”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번 부드럽게 쓰다듬은 카신은 손끝에 힘을 모았다.
손안에 모인 힘이 히나의 아주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성력을 찾아내고 있었다. 이미지로 봉인 방법을 터득하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이 상태라면 확실히 그녀의 힘을 봉인할 수 있었다.
덥석.
꽉 잡힌 손목을 보며 그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히나?”
그의 손목을 잡고 있는 히나의 손에 간절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카신은 손끝에 모아두었던 마력을 풀었다.
“안 돼요.”
전혀 잠들다 깬 목소리가 아니었다. 단호한 어조에 카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봉인은 안 돼요, 카신 님.”
카신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지금 내가 무얼 하려는 건지 알았다고? 그녀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러면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히나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의 어깨를 덮고 있던 부드러운 시트가 스르륵 내려갔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히나.”
카신은 히나에게 잡힌 손을 빼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나는 네가 잠든 모습을 잠시 보러 온 것뿐이란다. 보고 싶었거든.”
당황한 기색을 숨긴 채 카신이 말했다.
“카신 님.”
그를 부르는 히나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달리 경계심이 배어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저는 카신 님이 좋아요.”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만약 카신 님과 누굴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 상대가 누가 됐든 제가 선택하는 사람은 무조건 카신 님일 거예요.”
캄캄한 시야에 불안한 건지 히나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무척 차분했다.
카신은 숨을 멈추고 그녀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말에 감격스러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미친 듯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모순되는 감정에 카신은 혼란스러웠다.
“넌…….”
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카신은 한숨을 돌린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카신은 처음으로 히나를 경계했다.
숨긴다고 숨겨질 게 아니다. 이미 그녀는 그가 성력을 봉인하러 왔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가 어물쩍 넘긴다고 넘어갈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히나가 아니야.’
조금 성장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수한 미소만 짓고 있다 생각했던 히나는 이미 모든 걸 알고 모른 척한 거였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히나가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카신은 다소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 히나.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듣고, 뭘 안 거지?”
그따위 기억, 당장 지워주리라.
“카신 님. 전 카신 님이 가장 우선이에요.”
히나는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그거 하나만으로는 안 되나요?”
히나는 허공을 더듬으며 카신의 손을 잡았다. 카신이 크게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주었다.
“이 힘은 제 것이에요. 절 드렸으니, 제 것까진 빼앗지 말아주세요.”
히나는 집에 돌아오고 많은 생각을 했다. 당연히 카신과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수정구를 통해 매일 대화를 나눴다. 그가 뒤로 세이나에게 협박을 하고, 성력을 봉인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해시키자.’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는 카신이 좋았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접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평생 옆에 있겠다는 각오까지 했을 만큼.
그러니 항상 하는 겉핥기식 대화가 아닌 진지하게 얘기해서 이해시키고 싶었다. 그녀가 얼마나 그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성력을 소중히 여기는지.
‘나랑은 살아온 세월이 다르니 모르는 건 당연한 거야.’
전에 루이스가 말했다. 아주 긴 세월을 산 카신의 사고는 평범한 인간과는 아주 다르다고. 원하는 건 뭐든지 이루어온 카신과 잘 조율해야 한다고.
그토록 갖고 싶고, 보고 싶었던 엄마였다. 히나는 세이나가 엄마라는 사실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동경에 마지않던 사람이 부모라는 게 더 좋았다.
하지만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카신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그토록 그립고 괴롭게 했던 세이나를 선택하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겠지만.
“카신 님은 상관이 없다고 하겠지만, 성력은 제가 카신 님 옆에 있을 수 있는 힘을 주어요. 그러니 빼앗지 말아주세요.”
“히나.”
“이걸 빼앗으면…… 전 정말 카신 님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어둑한 시야 속에서도 간절한 히나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카신은 흥분한 마음을 진정하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아는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히나는 인간이야.’
아직까지도 히나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한 가지만 물으마.”
히나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전에 했던 나의 모든 행동은 용서할 수 있는 거니? 그게 무엇이든? 전부 묵인하고 이해해 줄 거니?”
긴장한 히나가 침을 살짝 넘기는 게 보였다. 카신은 살며시 벌어지는 그녀의 입술을 보며 시간이 참 느리다는 생각을 했다.
“네. 카신 님이 절 이해해 주신다면, 저도 노력할게요.”
“내 옆에서 떠나지 않을 거지? 어서 약속해.”
조급함에 다소 강압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어디까지 알지 모르는 히나에게 떠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받아내지 않는다면 미칠 것 같았다.
“약속할게요. 떠나지 않을게요, 카신 님. 그러니 절 이해해 주세요.”
망설임 없이 알겠다고 대답하는 히나를 보니 한시름 덜었다. 카신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손을 덮고 있는 따뜻한 온기에 마음이 빠르게 진정됐다.
“날 두고 떠나지 마, 히나. 넌 내게 그러면 안 돼.”
“네, 그럴게요.”
“함부로 사라지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전 사라지지 않아요. 만약 조금 멀리 가게 된다면 꼭 말할게요.”
아이의 투정을 달래주고 이해해 주는 어미처럼 히나가 이번엔 웃음기가 도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의 그녀는 마치 모든 걸 받아줄 것만 같았다.
“네가 나를 이해해 준다고 해도 난 네게 모든 걸 말하진 않을 게다.”
“괜찮아요. 그래도 나중에 용기가 생기면 말해주세요, 카신 님.”
카신은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자신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 픽 웃었다.
“불안하면 안아드릴까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한껏 긴장했던 몸이 탁 하고 풀리는 게 느껴졌다. 카신은 갑자기 어른스럽게 구는 그녀가 우습게 보이면서도 참 좋았다.
침대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온 히나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니. 안는 것 됐다.”
거절을 들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히나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안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서도 가까이 다가오는 그로 인해 그녀가 몸을 움츠렸다.
“안는 걸로 이 불안이 없어지진 않아.”
카신은 허리를 굽히며 그녀의 턱을 잡고 올렸다. 작고 앙증맞은 입술이 참으로 탐스러웠다.
“그럼…… 뭘 원하세요?”
“어른들이 하는 것을 한다면 이 불안이 조금은 해소될 것도 같은데.”
히나의 시선도 그의 입술로 향했다.
“해도 되겠니?”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입술이 계속 마르자 히나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러자 그의 눈이 더 짙어졌다.
“아직 ‘순수하게’ 자는 건 안 돼요.”
‘순수하게’ 자는 건 안 된다고 강조하는 히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카신은 절로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약속했다.
“그래, 아직 자기엔 이르지. 순수하게라도 말이다.”
카신은 허리를 굽히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긴장을 한 건지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겁을 먹고 살짝 오므리는 입술을 빨아들이며 핥고 달래던 그가 곧 천천히 벌어지는 그녀의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고른 치아를 훑으며 그녀의 입안을 훑은 그가 조금 더 깊이 그녀에게 키스했다.
히나가 착하게도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그 따뜻한 온기에 카신은 불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