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84화 (84/128)

84.

“폐하! 칼트론 영지가 점령당했습니다!”

칼트론 영지라면 코랄 왕국과 가장 인접한 지역이었다.

루이스는 요즘 들어 몰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단 하루일세. 아니,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일세! 그 짧은 시간에 점령을 당했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새벽의 갑작스런 기습으로 칼트론 영지의 다섯 번째 성문까지 모두 뚫리고 영지를 점령당했다.

아무리 완벽하게 전쟁 대비를 하지 못했다고 해도 독보적으로 강한 제국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레베스톤 공작이 코랄 왕국 병사들의 조짐이 이상하다는 정보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레베스톤 공작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다음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제국의 영토를 반 이상 내어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명군? 웃기지도 않는군. 이게 무슨 명군이란 말인가.’

황태자 시절에도, 황제가 되고 난 후에도 뭐든 원하는 건 계획대로 실행해 왔다. 머리가 비상하고 운이 좋은 루이스는 항상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그건 오만이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고독한 자리인지 피부로 느껴졌다.

그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우며 차분히 물었다.

“준비가 완전히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칼트론은 그리 쉽게 무너질 곳이 아니다. 적의 병력이 확인됐나?”

칼트론 영지는 인접한 왕국으로 인해 평소에도 경계가 삼엄한 곳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다섯 번째 관문까지 모두 쉽게 뚫릴 만큼 만만한 곳이 결코 아니었다.

‘거기다 작은 영토도 아니지.’

반나절 만에 모든 영토를 도는 건 무리였다. 그건 적군에 꽤 뛰어난 마법사가 여럿 있다는 뜻이었다.

“선두에 갑옷으로 온몸을 무장한 채 다가오는 부대가 일반 병사일 거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선두의 부대는 전부…… 뛰어난 마법사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한 부대만으로도 성문은 쉽게 뚫렸습니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보고에 잠시 머뭇거리던 병사가 말을 이었다.

“마법사 부대?”

본래 마법사의 수는 많지 않았다. 마력은 타고나는 것이며, 타고나더라도 마력이 작거나 끌어내는 능력이 없다면 평생을 마법 하나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 여건이 갖춰져야 비로소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되는 거였다.

‘그런데 마법사로 부대를 만들었다고? 그것도 무장한 채로?’

마법사가 마법을 쓰려면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몸이 불편하면 집중력이 흐려지기 때문에 대부분 마법사들은 허리가 크고 소매가 길게 늘어진 제복을 입었다. 제국의 황궁 마법사단 제복도 마찬가지였다.

“예. 그 수는 아마 수백을 넘으리라 예상됩니다.”

루이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단단히 무장을 하고도 성벽을 무너뜨릴 만큼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수백이 넘는다면 이건 아주 큰 일이었다.

“그리고 그 부대를…… 제이스 전하께서 이끌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군.”

놀랍지도 않았다. 제이스가 플로라 왕국에 갈 것이라고 이미 예상했으니까.

앞만 볼 줄 아는 아둔한 제이스가 플로라 왕국에 도움을 청한다고 해도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 멍청한 놈이 부대를 제대로 끌 요령이 있을 리가 없어.’

제이스의 형편없는 지휘에도 영토를 점령한 걸 보면, 아마 마법사 부대는 상상 이상으로 더 강하고 단결이 잘되어 있을 것이다.

“폐하, 제가 선두에 서게 해주십시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레베스톤 공작을 응시했다. 여자이다 보니 다른 기사에 비해 키나 체구가 작았지만, 그 어떤 기사보다도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웠다.

기사들 중 여자의 몸으로 고위직에 오른 레베스톤 여공작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천방지축으로 알려진 레베스톤 공자도, 어미이자 기사인 그녀에게 꼼짝을 하지 못했다.

‘만약 레베스톤 공작이 당한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결과에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레베스톤 공작이 당하기라도 한다면,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의 사기가 뚝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다. 물론 그녀가 쉽게 당하지 않을 거란 건 알지만, 상대는 갑옷으로 온몸을 무장한, 실력 면에서도 압도적인 수백의 마법사 부대였다.

‘기사와 마법사는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아.’

레베스톤 공작의 실력은 루이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마법사가 마법을 부리기도 전에 레베스톤 공작의 검에 목이 잘려 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일대일 대련에서나 가능한 말이었다. 수백의 마법사 부대가 쉴 틈도 주지 않고 달려든다면 레베스톤 공작이 제아무리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금방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마법사 부대에 대응할 만한 마법사의 수도 없어.’

상대는 강력하고 압도적인 마법사 부대다. 병력을 아끼고 수를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레베스톤 공작, 리베리아 후작.”

“예, 폐하. 하명하십시오.”

“하명하십시오, 폐하.”

“상대는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 부대다. 기사와 마법사가 합동하지 않는다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겠지.”

아직 영지 하나가 점령된 것에 불과했지만, 이대로라면 시간문제였다. 현 상황을 최악이라 생각하고 사활을 걸어야 했다. 루이스는 결단을 내렸다.

“기사단과 마법사단의 병력을 최대한으로 구성해서 적군에 대항할 부대를 만들어라. 이건 시간 싸움이다. 단번에, 빠른 속도로 허를 찔러야 한다!”

“예, 폐하!”

“황명을 받들겠나이다!”

* * *

“와, 엄청난데? 이게 다 네 힘이라고?”

칼피온이 주변을 둘러보며 칭찬하자, 히나는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녀는 세이나에게 수업을 듣지 않는 대신 칼피온에게 성력 수업을 받기로 하였다. 정확히 뭘 배운다기보다는 성력에 예민한 칼피온이 얼마나 힘을 잘 쓰는지 봐주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안 힘들어?”

“처음엔 힘들었는데,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힘든 걸 모르겠어요.”

칼피온은 고개를 갸웃하며 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어디 하나 지친 기색이 없었다.

“여기서 조금 더 넓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더 넓게?”

생각 이상으로 히나의 성력은 강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끝이 있긴 한 거야?’

과거에 만난 아이가 지녔던, 바로 꺼질 것처럼 희미한 힘과는 전혀 달랐다. 칼피온은 놀라운 마음을 감추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 히나가 주변에 뿌린 성력이 그의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 따뜻한 힘에 식물도 반응을 하는 것인지, 그녀가 연습하는 정원에 핀 꽃들은 유독 향기가 짙고 만개하였다.

“하루에 한 번 이상 못 쓴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는 쓸 수 있는 거야?”

“아직도 한 사람에게 힘을 몰아서 주면 다시 쓰는 건 힘들어요. 하지만 주변에 이렇게 뿌리는 건 몇 번 더 할 수 있어요.”

무언가를 감싸듯, 히나가 허공에서 두 손을 모았다. 그녀를 중심으로 주변에 또다시 힘이 퍼져 나갔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멀리까지 나가고 있었다.

‘이러다 로티우스에게 히나의 성력이 닿는 거 아니야?’

꽤 멀리까지 힘이 흘러가고 있었다. 칼피온은 카신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살짝 몸을 떨었다.

“생각보다 성력의 힘이 강한데? 한 사람에게 쓸 때는 모든 힘을 전부 모으지 말고 반의반? 아니, 그보다 더 적게 성력을 건네봐.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그걸로 되는 거예요?”

“충분하지 않을까?”

“이 정도면 전쟁에도 도움이 되겠죠?”

히나의 말에 칼피온은 미간을 구겼다.

“전쟁에 나가려고?”

“하지만 칼피온이 본 그 아이, 전쟁을 멈췄다고 했잖아요?”

세인트에서 집으로 돌아와 칼피온에게 성력 조절법을 배울 때, 히나는 과거에 성력을 가졌던 아이에 대해 모두 들었다.

덕분에 카신이 왜 성력을 봉인하려고 했는지 이해했다. 그래서 카신이 찾아올 거란 걸 예상하고 그를 설득할 수도 있었다.

‘아니었으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성력을 봉인당했을 거야.’

히나는 성력이 과거에 어떤 사례에 쓰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지 알려준 칼피온이 고마웠다.

“그거야…….”

칼피온은 자못 심각해진 눈으로 히나를 바라보았다.

연달아 성력을 쓰는 건 힘에 부치는지 그녀의 얼굴에 살짝 지친 기색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주변을 기분 좋게 만드는 기운은 여전했다.

“폭주해도 난 몰라.”

“폭주하지 않아요. 애초에 그 사람은 힘이 많이 없었다면서요. 저랑 상황 자체가 다른 거 아니에요?”

히나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주변에는 히나가 방금 전에 뿌린 성력의 기운이 여전히 가득했다.

‘확실히 힘의 차이가 엄청나.’

잠재 능력까지 합하면 아마 더 엄청난 힘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라면 전쟁을 막을 규모의 힘을 낸다고 해도 조금 탈진할 정도로 끝날 수 있으리라.

‘내가 너무 편견을 갖고 본 건가?’

비교할 대상이 한 명밖에 없으니 당연한 거지만, 그걸 카신에게 너무 섣불리 말했다. 칼피온은 왠지 히나에게 미안해졌다.

‘그래도 봉인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 뭐. 다 잘됐으니 상관없는 거야.’

양심은 찔렸지만, 아무튼 모든 상황은 잘 풀렸다. 자신에게 관대한 칼피온은 이 일을 그냥 넘기기로 했다.

“다음번엔 내가 힘을 써볼게. 그 힘을 정화시킬 수 있겠어?”

“아직은. 조금만 더 이따가요.”

히나가 지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귀족 레이디가 그렇게 막 앉아도 돼? 가끔 보면 넌 귀족 같지가 않아.”

아무것도 모르는 칼피온이 뚱하게 말했다. 히나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곧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 후작가의 양녀예요. 원래는 평민이고요. 평소에 노력 많이 하는데, 그렇게 티 났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귀족가 영애처럼 보이게끔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그런지 귀족이 아닌 것 같다는 말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흐음, 그래? 티가 난다기보다는 귀족의 고귀한 레이디는 치마에 풀물이 들까 봐 바닥에 앉지 않지.”

“그럼 다리가 아플 땐 어떻게 하는데요?”

“보통은 사람을 불러 의자를 갖고 오게 한다든가…….”

“에이, 금방 일어날 건데 너무 수고스럽잖아요. 그리고 이건 평상복이라 풀물이 조금 들어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히나가 배시시 웃었다. 순수한 그녀의 미소를 보며 칼피온은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보다 전쟁에 나갈 수 있게 도와줘요. 이 정도면 전쟁에 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순수한 미소? 아니다. 히나는 사람을 방심하게 만드는 미소를 짓는 거였다.

“그건 로티우스랑 얘기해. 난 유희 중도 아닐뿐더러 더더군다나 널 만나는 걸 로티우스한테 들키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정말이었다. 만약 히나에게 성력을 가진 아이와 만났었고, 그 아이의 최후에 대해 얘기한 걸 들키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히나가 전쟁에 나서려고 하는 거니 말이다.

“카신 님이 그렇게 무서워요? 어느 부분이? 딱히 피해를 준 건 아니잖아요?”

“피해를 준 게 아니라고? 이봐, 히나. 로티우스는 과거에…….”

말을 하다 말고 칼피온은 입을 다물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하지 말아야 할 얘기를 억누르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히나! 히나, 어디 있어?”

멀리서 루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피온은 소리가 들린 곳을 한 번 보더니 한 손을 들고 흔들었다.

“당연히 알겠지만 내가 온 건…….”

“비밀로 할게요. 죽을 때까지.”

“그래, 그래. 그럼 안녕.”

칼피온이 사라지자마자 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루터의 목소리가 들렸던 곳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저 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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