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도대체 몇 번째지?”
남자에게, 그것도 카신에게 벽치기를 당하는 기분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오싹오싹 하다못해 소름이 끼친다고 해야 하나.
히나를 만나러 왔던 칼피온은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슬쩍 피했다.
쾅!
시선을 돌린 벽면이 가볍게 부서지는 걸 보며 그는 침을 삼켰다.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벽처럼 언제 자신도 저리될지 모른다.
“히나와 단둘이 몇 번을 만났냐고 물었어.”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처음인데 히나가 사는 집을 혼자 찾아왔다고? 누구한테 듣고? 언제부터 얼굴만 보고 상대의 집을 알아내는 재주가 생긴 거지?”
집요한 카신은 무서웠다. 히나가 어째서 이런 집착 덩어리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히나는 로티우스가 이러는 거 모르지.’
카신은 히나 앞에서 본성을 철저하게 숨기려 들었다. 극히 일부분, 히나가 알아도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드러낼 뿐이었다.
칼피온은 가끔 어두침침한 얼굴로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히나를 떠올렸다. 다람쥐로 변신하고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날 표정도 심히 좋지 않았다. 딱히 무슨 말을 한 건 아니지만, 그날 카신이 숨기고 싶어 하는 무언가를 들은 것이 확실했다.
‘그러고 보니 맹해 보이면서도 은근히 예리하다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숙한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히나는 생각보다 눈치도 빠르고 날쌘 구석이 있었다.
“지금 날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건가?”
카신의 노란 눈동자가 무섭게 번뜩였다.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는 걸 보며 칼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 눈! 눈 돌아갔는데, 원래대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목을 물어뜯을 기세로 다가오던 카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떼고 제 눈을 문질렀다.
“몇 번 만난 건 됐어. 그보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말해.”
“무슨 얘기라고 할 것까지야…….”
눈가를 문지르던 카신의 손이 잠시 멈췄다. 긴 손가락 사이로 아직 세로로 찢어진 황금빛 동공이 그를 향해 있는 것이 보였다.
드래곤보다도 더 흉포한 눈이었다. 칼피온은 그렇게 정의를 내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 눈을 제어하지 못할 만큼 화가 난 카신을 더 건드렸다간 좋지 않은 꼴이 될 것이다.
“대답해. 성력을 가진 아이에 대해 말했지?”
딱 꼬집어 묻는 카신을 잠시 보던 칼피온은 곧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짐작하고서 묻는 말이니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지금 내 앞에서 어떻게 말할지 생각하고 대답하는 건가?”
칼피온의 의중을 읽은 것인지 카신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 멍청한 머리로 생각 따윈 하지 말고 내 질문에 즉각 대답해.”
“네!”
군기가 꽉 잡힌 신병처럼 칼피온이 바짝 얼어붙은 채 대답했다.
“히나에게 어디까지 말했지?”
“성력을 가진 아이의 최후까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카신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짜증이 난 건지 그가 눈 위를 덮고 있던 손으로 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카신의 눈동자가 인간의 것처럼 둥근 동공으로 변해 있었다.
“얼마 전에 히나의 성력을 봉인하러 갔지.”
이미 히나에게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칼피온은 모른 척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히나가 성력을 쓰고 싶다고 허락을 해달라더군.”
“그럼 허락한 거야?”
카신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나.
카신이 호락호락하게 허락할 리 없었다. 유달리 히나를 감싸고도는데, 가장 위협이 될 힘을 가만 내버려 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히나는 성력을 꽤 아끼던데.”
몇 번 보지 않았지만 칼피온은 히나를 두둔했다. 카신을 상대로 나름대로 고집을 피우고 노력하는 그녀를 응원하고 싶었다. 물론 나중에 히나에게 이 일을 생색낼 생각도 있었다.
“네 옆에 당당히 있을 수 있게 해주는 힘이라고 했어. 그만 주눅 들게 하고 허락해 주라고.”
“허락하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어.”
칼피온은 생각에 깊게 잠긴 카신을 바라보았다. 만약 잘된다면 히나의 기억을 모두 지우는 방법도 생각했을 것이다. 카신은 가끔 무지막지하게 무식하니까.
“그런 건 됐고, 그보다 넌 여긴 왜 온 거지?”
“난…….”
카신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칼피온을 관찰했다. 리베리아 후작가까지 알고 찾아올 정도면 히나와 꽤 가까워진 것이리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네 꼬리, 잘라 버릴 줄 알아.”
무시무시한 협박에 칼피온은 다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드래곤의 로드가 꼬리가 없다고 소문나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적어도 카신과 장렬히 맞서 싸워 죽었다고 하면 모두 수긍할 테니까.
“히나의 성력을 봐주러 왔어.”
“히나의 성력?”
“응. 내게 성력을 다루는 법을 알려달라고 해서.”
“성력이라면 신녀에게…….”
카신은 세인트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히나를 떠올렸다.
히나는 세이나를 유달리 좋아했다. 혈연지간이어서인지, 아니면 당당한 여자가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이나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시늉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세이나의 수업을 매일같이 기다렸다. 수정구를 통해 하루 일과를 들을 때, 세이나의 자랑을 끝도 없이 하기도 했다.
물론 계속되는 세이나 칭찬에 못마땅해진 그의 기분을 알아챌 때면, 중간에 말을 돌리기도 했지만.
‘그런데 세이나가 아닌 칼피온에게 굳이 성력을 배운다고? 서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금 이상했다. 아니, 많이 이상했다.
“내 힘과 성력이 부딪히면 조금 더 증폭되더라고. 히나가 조금 더 성력의 힘을 끌어내고 싶다고 내게 가르쳐 달라 부탁했어.”
칼피온의 설명을 들었지만, 카신은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세이나를 피하는 건가? 어째서?’
성력을 더 자유롭게, 크게 다루고 싶다면 세이나와 칼피온에게 모두 배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히나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세이나와의 관계를 굳이 끊어버렸다.
히나의 속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전부 털어놨으니 하는 말인데.”
깊게 생각에 잠긴 카신에게 칼피온이 말했다.
“성력의 폭주, 그건 지금의 히나에게 해당되지 않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지?”
“히나의 성력은 뭐랄까……. 내가 봤던 인간에 비하면 무한에 가까워. 조금 쉬면 성력이 금방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한계가 넘을 것 같으면 본인이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멈추기도 하잖아? 그런 걸 보면 생명에 해를 끼치지도 않아.”
하루가 다르게 히나의 성력은 증폭되고 있었다. 하지만 히나는 지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뿐하게 성력을 다뤘다.
“보통 마력 폭주는 잠재된 마력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미숙한 마법사들이 겪는 일이잖아. 그 아이도 그래서 폭주를 한 게 아닐까? 아니면…….”
칼피온은 당시의 아이를 떠올렸다. 밝은 히나와 달리 아이는 항상 우중충한 얼굴로 바닥을 보며 걸었다.
“어쩌면 그 아이는…… 원해서 폭주를 한 걸 수도.”
“원해서?”
“그렇잖아? 전쟁은 끊이질 않고, 하루를 겨우 견디면 다음 날 더 끔찍한 하루가 찾아오는데, 작은 희망도 하나 없는 세상에서 계속 살고 싶었을까?”
최강의 생물인 드래곤이 무력함을 느끼는 일은 흔치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지.’
칼피온은 카신을 힐끗 쳐다보았다. 카신은 감히 최강 종족 드래곤에게 최악의 상황에서 겪는 좌절과 스스로의 무력감에 대한 환멸을 안겨준 장본인이었다.
“죽는다고 해도 제힘을 폭주시키면 이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잖아? 그럼 어찌 돼도 좋았을 것 같은데.”
카신으로 인해 종족이 멸족을 바라보았을 때, 어찌 돼도 좋다고 생각하는 드래곤은 무척 많았다. 죽음을 불사하고 카신에게 달려들던 드래곤을 떠올리면, 성력을 가진 아이가 선택한 최후는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조금 더 네 연인을 믿지그래? 그거, 히나에게 엄청 큰 실례라고.”
“그건…….”
카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도 그렇군. 이제부터라도 믿도록 노력해 보지.”
칼피온의 충고에 카신은 납득했다. 히나에게 그토록 집착하면서도 그녀를 믿지 못했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아.”
짧은 탄성과 함께 칼피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카신이 그를 쳐다보았다.
“히나가 오고 있어.”
“그걸 알 수 있는 건가?”
“응. 히나가 다가오면 좋은 기운이 느껴지거든.”
카신은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히나의 기운을 알아채는 칼피온이 짜증 났다. 라우너나 칼피온이나 히나 감지기라도 되는 듯, 그녀를 귀신같이 찾아냈다. 그 점이 극도로 싫었다.
“저기서 온다.”
칼피온이 손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려던 카신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발끝으로 칼피온의 다리를 쿡쿡 찔렀다.
“돌아가.”
귀찮다는 얼굴로 카신이 턱짓을 했다. 어서 빨리 사라지라는 뜻이었다.
“나도 있고 싶은데…….”
“돌아가.”
카신이 이번엔 힘주어 말했다. 칼피온은 마지못해 이동 마법으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피온이 가리켰던 방향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카신은 히나가 다가오는 걸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가족들에게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사실을 먼저 알린 다음, 카신에게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과는 달리 히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마주친 카신으로 인해 머리가 아파왔다.
그녀는 가족들을 라우너에게 맡기고, 카신과 응접실에 단둘이 자리를 가졌다. 가족들에겐 미안하지만, 카신을 설득하는 것이 더 먼저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거지, 히나?”
항상 해맑게 웃던 히나가 진지한 얼굴로 마주 앉자 카신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그녀는 생각지도 못할 때, 폭탄을 안겨주었다.
“카신 님은 절 믿어요?”
카신은 방금 전, 칼피온에게 들었던 충고를 히나에게 들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아무리 뻔뻔하고 두꺼운 낯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히나에게 그 말을 직접 들으니 미안해졌다.
“제가…… 못 미더우세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느라 그의 대답이 늦어지자 히나가 한층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서운한 기색이 묻어나자 카신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건 아니란다. 다만…….”
“다만?”
이건 백번을 반성해도 부족했다. 동등한 입장이 되려고 노력하는 히나를 계속 어리게 보고, 믿어주지도 않았다.
‘칼피온의 말이 맞아. 이건 연인인 그녀에게 실례되는 행위지.’
이제는 뭐든 스스로 해내는 히나를 인정해 줘야 했다. 그래야 그녀도 그간의 노력에 대한 보람을 느끼리라.
“네가 날 조금 더 의지해 줬으면 한단다. 그래서 아쉬울 뿐이야.”
“그럼 한 가지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약속?”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절 믿고 응원해 주세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카신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칼피온과 히나 본인에게 들은 말로 생긴 죄책감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그래, 약속하마.”
만약 히나가 하려는 말을 조금이라도 예상했다면 절대 이런 말을 쉽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전쟁에 참전하려고 해요. 그러니 응원해 주세요, 카신 님.”
카신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하는 히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