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88화 (88/128)

88.

“지금 뭐라고 했지?”

“전쟁에 참전한다고요.”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카신은 모든 행동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늦게 말하게 되어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전쟁 후방에서 보호를 받을 거고,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히나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카신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가만히,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숨을 쉬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꽤 오랜 정적이 흘렀다. 카신이 급히 숨을 내뱉었다.

“지금 전쟁에 나간다고 했니?”

처음 말을 꺼내는 것처럼 그는 무척 어색하게 말했다.

“네, 카신 님.”

카신이 히나의 손목을 덥석 잡아당겼다.

“카신 님?”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히나는 무의식적으로 발끝에 힘을 주며 끌려가지 않기 위해 버텼다.

“히나, 이리로 와.”

히나가 그의 말에 몸에서 힘을 풀었다. 카신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어 당겼다.

히나의 몸이 그에게로 기울어졌다. 카신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몸을 감싸며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저택 안을 향해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카신 님, 내려주세요!”

저택 안에 있던 하녀와 시종들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도 힐끗힐끗 구경하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라우너가 리베리아 후작을 포함한 베라미, 루터에게 무언가 설명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대마법사님?”

가장 먼저 카신을 발견한 건 리베리아 후작이었다. 그가 눈을 크게 뜨며 히나를 안은 채 다가오는 카신을 응시했다.

뒤를 이어 베라미와 루터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밖에서 간단하게 인사를 했던 라우너도 카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다른 이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카신은 리베리아 후작 앞에 멈춰 섰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라우너에게 얘기를 듣고…….”

“히나는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거라네.”

리베리아 후작의 말을 다짜고짜 자르고 카신이 말했다.

“카신 님!”

뒤늦게 히나가 카신을 불렀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단단한 덫에 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용을 써도,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몸을 제 뜻대로 움직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를 뿌리치려고 할 때마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두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짚고 밀어내려고 했지만 닿기만 할 뿐, 그 이상의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히나는 카신이 마법을 부렸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힘을 쓸 수 없게 기이한 마법을 썼다.

“놓아주세요, 카신 님!”

히나가 외치자 카신이 고개를 쓱 돌려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히나는 무미건조한 그의 샛노란 눈동자를 보자마자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운 눈이었다.

“히나는 전쟁에 참전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저택에서, 그녀의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채 보호받을 겁니다.”

카신이 다시 리베리아 후작을 보며 말했다.

“저는 전쟁에…….”

전쟁에 참전할 거예요!

강력하게 주장하려던 히나는 말을 다 하지도 못한 채 입술만 뻐끔거렸다.

“하지만 방금 라우너에게 들은 얘기로는…….”

“제가 말한 대로 알고 있으면 됩니다.”

카신은 그렇게 말을 끝맺고, 2층에 있는 히나의 방으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벙찐 베라미와 루터를 뒤로하고 라우너가 빠르게 걸어와 카신의 앞을 막았다.

“히나는 전쟁에 참전한다고 했습니다.”

라우너는 어머니인 아델리아가 히나를 전쟁에 참전시킨다고 할 때부터 기분이 나빴다. 히나를 좋아하는 그는 그녀가 전쟁에서 함께 싸우는 것이 싫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전쟁터로부터 가능한 그녀를 멀리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러니 히나를 풀어주십시오.”

하지만 여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히나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강한 의지가 담긴 눈으로 그녀는 전쟁터에 데리고 가달라고 아델리아에게, 그리고 황제에게 간청했다. 그런 그녀의 진심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의외로군. 나와 같은 생각일 줄 알았는데.”

카신이 한쪽 눈썹을 쓱 올렸다.

“히나가 전쟁에 참전하는 건 싫습니다.”

평소와 달리 라우너는 진지했다.

“하지만…….”

라우너가 눈살을 찌푸린 채 카신에게 안겨 있는 히나를 응시했다.

“히나의 진심을 무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카신에게 얌전히 안겨 있는 히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라우너는 찌푸린 미간에 조금 더 힘을 주며 강하게 말했다.

“그만 히나에게 건 마법을 풀어주시지요.”

“싫다면?”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라우너의 곧은 눈빛을 보며 카신은 픽 웃었다.

“황제에게 전해.”

황제에 대한 예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카신의 무례한 태도를 꼬집지 못했다.

“히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절대 밖으로 나오지 못할 거라고.”

히나를 안고 있는 채로 카신이 검지를 허공에 휘두르며 원을 그렸다. 그러자 라우너의 몸이 허공에 뜨며 저 멀리 날아갔다.

“라우너!”

쿵!

베라미가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라우너를 부르며 급하게 달려갔다. 루터가 불안한 눈동자로 날아간 라우너와 카신에게 안겨 있는 히나를 번갈아 보았다.

“자, 잠깐만요!”

몇 번을 망설이고 고민하던 루터는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며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카신의 앞을 막아섰다.

“너도 같은 꼴이 되고 싶나?”

루터는 싸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카신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카신이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라고 해서 봐줄 만큼 자애롭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터는 카신의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저도…….”

떨리는 목소리에 루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도 히나가 함께 가는 건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왜 내 앞을 막는 거지?”

불쾌감이 담긴 어조에 루터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히나를 존중해 주세요!”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루터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차라리 히나와 싸워서 그녀를 막으세요! 그렇게 혼자 화를 내고, 마법으로 히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도록 억누르면…… 히나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겁이 난 건지 루터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충분히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리베리아 후작도, 라우너를 부축해 일으키던 베라미도 경악한 채 루터를 쳐다보았다.

“불쌍?”

카신의 눈이 조금 더 사나워졌다. 하지만 무슨 마법을 부린다든가, 루터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그저 마법으로 품에 얌전히 안긴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히나를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마법으로 그녀의 신체가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힘을 주고 싶어도, 말을 하고 싶어도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을 풀지 않으면 히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도망을 가지도 않을 거고, 위험한 짓도 하지 못한다.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듣든 그가 전부 알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로 인해 불안할 일도 없겠지.’

히나를 자신의 통제하에 둔다. 그는 히나가 제 뜻대로 움직여 주길 원했다. 마치 인형같이. 하지만 가장 원하는 모습으로 있는 히나의 얼굴은…….

말도 하지 못한 히나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허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카신은 빛을 잃은 그녀를 보며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항상 빛이 나야 했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생기가 넘쳐야 했고, 싱그러운 과일처럼 힘이 넘쳐야 했다.

“그렇군. 제대로 얘기해 보도록 하지.”

크게 다칠 것까지 각오했던 루터는 카신이 그를 지나쳐 2층으로 마저 올라가자 몸에서 힘을 툭, 풀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

카신은 작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 누구도 가까이 오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 확고하게 드러났다.

히나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카신은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리고 손가락을 탁, 튕기며 그녀에게 걸었던 마법을 풀어주었다.

“아……!”

히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중심을 잡고 비틀거리는 상체를 지탱했다.

“카신 님!”

마법이 풀렸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히나가 외쳤다.

“어째서 제게 화를 내시는 건지 알아요!”

히나는 언제 다시 마법에 걸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까 싶어 제 속내를 빠르게 설명했다.

“하지만 전 절대 걱정을 끼칠 만한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 위험한 일도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제발 허락해 주세요.”

히나의 간절한 목소리에 카신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히나, 전쟁은 그 자체가 위험한 거야.”

카신은 히나의 옆에 앉았다.

“전쟁 중에 안전한 후방에 있으면 된다고? 아니야, 히나. 후방도 충분히 위험하단다. 어떻게든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부상자가 많고 전력이 약한 후방을 공격하여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는 전법은 아주 흔하단다.”

카신은 차분히 설명했다. 히나를 상대로 흥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는 건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목숨이 달린, 그 엉망진창인 곳에서 야비하고 비열한 짓이 얼마나 숱하게 일어나는지 하나하나 짚고 말해줘야 내 마음을 이해해 줄 거니?”

“성력이 도움이 될 거예요! 저는 성력으로 전쟁을…….”

“어차피 제국이 승리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히나의 말을 끊으며 그가 강하게 말했다.

아무리 주변 연합국이 합세하여 달려들어도 큰 변수가 없는 이상 지금의 제국을 이길 수는 없다. 어차피 제국이 승리한다.

“네 성력이 없어도 충분히 이긴다고, 히나! 아니면 설마 너 하나의 힘으로 전쟁이 좌우될 거라는 자만이라도 하는 거니?”

아무것도 모르는 히나가 답답했다. 저절로 독설이 튀어나왔다.

“제 힘 하나로 뭐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성력은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성력을 제대로 증폭시킨다면 분명 전쟁을 멈출 수도……!”

“성력 타령은 그만둬!”

카신의 언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칼피온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 히나.”

어떻게든 카신을 설득시키려던 히나는 입술을 깨물며 행동을 멈췄다.

카신이 자신과 칼피온이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끝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막상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진이 빠졌다.

“히나, 내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전쟁을 겪었는지 아니?”

카신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귀족의 영애이니, 꽤 대우는 받겠지. 하지만 군대와 떨어지게 된다면? 주변에 전쟁이라는 공포와 불안함에 미친 병사들만 있다면? 포로로 잡힌다면? 네가 어떻게 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은 있니?”

“그렇게 되지 않을게요. 그러니 절 이해해 주세요, 카신 님.”

“여태 전쟁 중에 여자들이 어떤 취급까지 받아왔는지 안다면 절대 그런 말을 못 하겠지.”

성력이 강한 히나가 제대로 능력만 발휘한다면 확실히 전쟁에서 엄청난 공을 세울 수 있으리라. 어쩌면 전쟁을 멈추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 어떤 변수도 생기지 않고, 전장의 모든 것을 내려다볼 만큼의 노련함을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히나가 접한 전쟁은 책 속의 내용이 다였다. 그래서 이렇게 안일하게 말할 수 있는 거였다. 카신은 그 점이 가장 화가 났다.

“그러면…….”

히나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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