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89화 (89/128)

89.

“그러면 그때는 카신 님이 구해주세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카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도 카신 님께 전쟁에 함께 나가자고 할 생각은 없어요. 카신 님의 힘이라면 아마…….”

잠시 뜸을 들이던 히나는 곧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마 이런 전쟁은 한순간에 처리해 주시겠죠. 하지만 전 카신 님이 그러지 않기를 바라요.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제국이 세워질 때, 카신 님이 했던 말에 저도 동의해요.”

제국이 건국될 무렵, 카신은 초대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류의 역사가 바뀌는 일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힘을 쓰면 제국에 들이닥치는 그 어떤 위험도 막을 수 있을지언정, 그 외의 것들은 전부 무너질 것이야.”

인간으로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카신이 제국의 편에 서게 된다면 다른 나라들과의 공존은 불가능했다. 갈수록 도태된 나라들은 하나씩 없어지고, 결국 제국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것까지 앞서 본 카신은 전쟁처럼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저 하나 구하는 건 상관없잖아요? 되도록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지만, 그래도 제가 위험해지면 그때는 카신 님이 구해주세요. 그래주실 거죠?”

“하.”

카신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위험에 처하면 아주 크게 부를게요. 저, 목소리 하나는 자신 있어요.”

해맑게 웃는 히나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카신은 반짝이는 히나의 눈동자를 피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을 계속 보고 있다가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았다.

“차라리 내게 이 전쟁을 끝내달라고 청해, 히나.”

네 부탁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들어줄 수 있으니까.

카신은 차라리 히나가 무리한 요구를 하길 바랐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비록 그릇된 일이라고 해도 그는 뭐든지 다 들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그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주시면 제가 곧 좋은 소식을 들고 올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주세요.”

“히나.”

히나가 당당하게 남자가 여자에게 할 법한 말을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당돌함에 기가 찬 카신은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더 있는데요.”

히나가 무릎으로 그의 앞까지 기어왔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오면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그대로 몸을 굳히는 카신을 보며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히나가 까르르 웃었다.

* * *

“오라버니, 정말 저와 말하지 않을 건가요?”

히나가 입술을 삐쭉이며 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그만 화를 푸세요.”

히나는 같은 후발대인 루터와 함께 전쟁터로 향하고 있었다.

출정 준비를 하는 기간에도 루터는 히나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부르고 아는 척을 해도 그는 침묵만 지켰다.

“너무 좀생이처럼 굴지 마, 루터.”

아직 말이 익숙하지 않은 히나와 말을 함께 탄 라우너가 옆에서 툭 내뱉었다.

“형은……!”

라우너의 말에 기분이 상한 건지 루터가 발끈하며 외쳤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히나로 인해 바로 입을 다물었다.

루터가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형은 제 기분 몰라요.”

“나도 히나를 위험한 전쟁터에 보내고 싶지 않아.”

라우너가 미간을 찌푸리며 제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히나의 뜻이 이렇다면야. 불안하긴 해도 내가 지켜주면 되니까 괜찮아.”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에요?”

루터는 답답함을 호소하며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애초에 이런 위험한 일을 상의도 없이……. 히나는 리베리아라고요! 그러면 적어도 나하고는 상의를 했어야 하잖아요!”

히나는 루터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그녀를 가족으로, 적어도 여동생으로 봐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루터는 그녀를 정말로 여동생처럼 아끼고 있었다. 그러니 서운한 건 당연했다.

“먼저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오라버니. 저도 갑자기 정한 일이라 의논할 시간이 없었어요.”

풀이 죽은 히나의 목소리에도 루터는 아무런 대답 없이 묵묵히 앞만 보았다. 어깨를 늘어뜨리는 그녀를 보고 오히려 함께 탄 라우너가 눈치를 보았다.

“히나, 루터는 좀생이라 그래. 그러니까 기분 풀어.”

히나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고개를 돌려 라우너를 쳐다보았다.

“루터 오라버니는 좀생이가 아니에요. 이건 제가 잘못한 건데, 왜 루터 오라버니를 안 좋게 말하는 거예요?”

“어…… 미안.”

다소 날이 선 히나의 말투에 라우너가 즉각 사과했다.

히나는 다시 루터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 갑자기 정한 거라니까요? 다른 비밀들은 전부 오라버니하고 다 의논했잖아요. 만약 조금 더 빨리 정했다면 저도 제일 먼저 오라버니께 말했을 거예요!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히나의 말에 절대 반응하지 않았던 루터가 처음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정말 내게 비밀이 없었어? 갑자기 정하지 않았다면, 정말 나와 먼저 의논을 했을 거라는 게 확실해?”

루터가 말을 걸어주는 것이 기뻐 히나가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요! 저는 카신 님보다도 오라버니께 먼저 고민을 의논하잖아요?”

루터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억지로 미소를 참는 티가 역력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오라버니. 다음에 속에 있는 비밀 다 털어놓을게요.’

히나는 속으로 또다시 루터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방긋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카신 님보다도 오라버니가 더 믿음직스러워요.”

루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라우너가 부러운 눈으로 루터를 쳐다보았다.

“흐음, 이번만은 용서해 줄게. 하지만 히나, 다음부터 이런 일은 무조건 나와 먼저 의논해야 돼. 알았지?”

“네, 오라버니.”

“전쟁은 아주 위험하다고. 그러니 위험할 땐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알겠어요.”

짐짓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당부하는 루터를 보며 히나는 겨우 웃음을 참았다.

“나도 같이 의논하면 안 될까?”

“관련도 없는 형에게 괜한 민폐를 끼칠 순 없죠.”

라우너가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루터는 그를 바로 배제시켰다.

“그보다 대마법사님께는 어떻게 허락을 받은 거야?”

그간 입이 근질거렸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루터가 바로 히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쩌면 그동안 대화를 하지 못해 더 아쉽고 힘들었던 사람은 히나가 아닌 루터였을지도 모른다.

“분위기가 엄청 살벌했는데. 난 정말 네가 네 방에 갇힌 채 못 나올 줄 알았어.”

“결혼하자고 했어요.”

“뭐?”

“안 돼!”

당황한 루터와 절망적으로 외치는 라우너를 번갈아 보며 히나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카신 님께 전쟁에서 돌아오면 결혼하자고 하니까 조심히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히나는 살벌했던 말싸움은 빼먹고, 결론만 말했다.

“무슨 결혼이야! 히나, 넌 내게 시집와야지!”

라우너가 히나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제가 왜 라우너 오라버니한테 시집을 가요?”

“너희 가문과 우리 가문은……!”

네 어머니가 날 인정했다고! 라우너는 차마 대놓고 사라가 자신을 인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라우너는 반박하려다 말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를 말릴 이유가 없었다. 가문을 내세우는 취미는 없지만, 그에게는 가문도, 명예도, 실력도 대마법사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에이, 라우너 오라버니는 제게 오라버니 같은 존재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시집을 가요.”

장난스럽게 넘기는 히나를 보며 라우너는 답답함에 제 가슴을 퍽퍽 쳤다.

‘미안, 형. 나, 진작 매수당했어.’

루터는 속으로 라우너에게 사과하며 시선을 피했다.

* * *

“후퇴하라! 전원 후퇴를 명한다!”

아델리아는 바로 앞에 있는 적군의 마법사를 베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퇴각하라!”

검기를 쏟아부은 검으로 아델리아는 다른 마법사를 베었다. 단단한 갑옷이 베이고 그 사이로 진흙과도 같은 형체가 보였다.

‘이것들은 인간이 아니야!’

연합군의 군대 중 가장 골칫덩어리인 마법사 부대를 한곳으로 몰아넣는 것에 성공했다.

일부러 성벽을 내어주었다. 어차피 성벽을 지키기엔 그들이 너무 늦게 도착해서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마법사 부대 뒤에 숨어 있는 일반 병사의 실력은 그녀가 봤을 때 그리 높지 않았다. 수가 워낙 많아 처치하는 건 무리지만, 리베리아 후작이 끄는 절반의 황궁 마법사 부대를 이용하면 그들의 발을 어느 정도 묶어놓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델리아는 리베리아 후작이 이끄는 황궁 마법사단을 매복시켰다. 그리고 적의 마법사 부대가 성벽을 뚫고 들어오자 아예 최정예 마법사들을 이용하여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적군의 병사들이 성벽을 넘지 못하도록 리베리아 후작에게 일시적으로 강력한 마법을 쓰게 했다.

앞뒤 소식이 끊기고 적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그녀는 마법사 부대를 공격했다. 무너진 성벽을 뒤로한 채 최정예 기사들로 마법사 부대를 한곳으로 몰아넣고 둘러싼 그들은 승리를 자신했다.

‘낌새를 차렸을 때, 진작에 도망갔어야 했어.’

처음부터 이상했다. 마법사 부대는 말을 타지 않았음에도 말을 탄 기사들과 눈높이가 비슷할 만큼 모두 큰 키를 갖고 있었다. 거기다 어릴 때부터 신체를 훈련시켜 온 그녀의 정예 부대가 왜소해 보일 만큼 우람한 체격까지 갖췄다.

한두 명도 아니고 마법사 부대가 모두 무장을 한 것도 이질적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마법 연구에 몰두하는 데 보냈을 마법사 부대 모두가 그랬다.

‘저게 마법사 부대라고?’

적군과 마주치자마자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가장 골치인 마법사 부대만 없앤다면 승리를 거머쥔 거나 다름없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녀가 훈련시킨 기사들은 검기를 다룰 수 있었고, 마법사를 죽이는 것에도 특화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최강의 부대였다. 그래서 질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적의 마법사는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선두로 나선 아델리아는 가장 먼저 앞에 있는 마법사를 베었다. 검기가 응집된 검이 단단한 갑옷을 한 번에 벤 순간, 아델리아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인간이 아니었다. 갑옷 안에는 사람 형태를 이룬 진흙 같은 것이 있었다.

갑옷과 함께 반으로 쪼개진 진흙은 부글거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원상태로 돌아갔다. 검기를 끌어내어 머리를 날리거나 몸을 반으로 자르지 않는 이상 그들은 갑옷 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 붙었다.

아델리아는 적의 마법사를 완벽하게 죽이는 방법을 확인하기 위해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고 검을 휘둘러 시험했다. 그리고 갑옷과 함께 완전히 두 동강을 내야지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대 이길 수 없어!’

단단한 갑옷과 함께 마법사를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두 동강 낼 만큼 검기를 가지고 있는 아군의 기사는 많지 않았다.

‘수적으로 너무 불리해!’

실력까지 보장된 정예 기사가 적군의 수에 비하면 몇 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적의 마법사를 죽일 수 있는 기사는 고작 백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수백의 마법사 부대에 비하면 현저히 적은 인원이었다.

‘우리 쪽 마법사들도…….’

적의 마법사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황궁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은 적군의 진격을 잠시 늦추는 것뿐이었다.

‘최정예 부대라고 자부했건만!’

제국에서도 최고의 기사와 마법사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거기다 유리한 진형에서 적군을 에워싸기까지 했다.

하지만 적군을 몰아넣고 공격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아델리아는 후퇴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싸우면 모두가 전멸이다!’

이렇게 굴욕적일 수가 없었다. 대참패를 맞이하고 도망을 가는 건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수치였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부하들의 목숨이었다.

아델리아는 이를 악물며 부하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 위해 검기를 최대한 끌어 올려 적의 마법사를 수차례 베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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