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히나가 전쟁에 참전한 것을 아직 모르는 칼피온은 리베리아 저택으로 이동 마법을 쓰려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게도 평소에 눈 감고도 하던 이동 마법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계가 걸려 있는 듯했다.
“로티우스가 막아놓은 건가?”
그렇다고 이 즐거움을 포기할 순 없지. 칼피온은 씨익 웃으며 저택 주변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다행히 저택 주변은 되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완벽을 추구하는 카신이라면 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제국 전역에 침입을 막는 마법을 개발하여 차단했을 텐데.
‘하긴, 특정 인물을 차단하는 마법을 제국 전체에 하는 건 아무리 로티우스라도 좀 힘든가?’
그래도 로티우스라면 드래곤만 차단하는 마법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마법에 능통한 드래곤이라도 카신의 마법 수준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워낙 섬세한 마법을 광범위하게 쓸 수 있으니, 될 것도 같은데.’
칼피온은 카신이 연구하면 특정 인물을 차단하는 마법도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저택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리고 붉은빛이 감도는 투명한 결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이건 로티우스의 마법이 아니겠지?”
마법사라고 해도 마법 수준이 낮은 평범한 인간에겐 보이지 않을, 무척 투명한 결계였다. 하지만 시력이 좋기로 소문난, 거기다 마법까지 예민하게 감지하는 드래곤이라면 이런 결계를 못 볼 리 없다.
“로티우스가 이런 걸 쓸 리가 있나.”
적어도 그가 아는 카신이라면 드래곤의 눈까지 속이는 결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칼피온은 붉은빛이 감도는 결계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단순히 마력 차단 결계만 걸어놓은 건가.”
결계 안에서는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결계가 안쪽의 기운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이동 마법이 되지 않는 걸 보아 외부에서 내부의 마력이 통하지 않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귀찮은 일이 될 것 같은데.”
이런 결계를 치는 목표는 간단했다. 잠입이나 납치. 칼피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한번 들어가 볼까?”
카신이 볼 때는 조잡할지도 모르나, 칼피온의 눈에는 꽤 정교한 결계였다. 인간의 마법 수준이라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붉은 결계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또 멸족당할 위기에 처해지면 큰일이니까.”
칼피온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아, 아가씨는 지금 집에 계시지 않습니다.”
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코반드가 한쪽 눈썹을 휘었다.
“그럼 언제 돌아오지?”
엄청난 고통이 몰려오자 시종이 몸을 경련하더니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이 정도 고통에 혼절이라니.”
약해 빠진 인간들.
코반드는 혀를 차며 시종을 던져 버렸다. 그는 붉은빛의 눈동자로 저택 안을 천천히 투시하듯 훑었다. 그리고 한쪽 방에 모여 있는 인간들의 기척을 느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 한 명 나서서 막으려 들지 않았다. 시종과 같은 몰골이 될까 싶어 모두가 두려움이 몸을 떨었다.
“이곳은 안 됩니다!”
집사가 그 앞을 막아섰다. 나이가 지긋한 집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감히 내 앞을 막다니.”
코반드가 집사를 향해 손을 들었다.
끼익.
그때였다. 집사가 막고 있는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코반드는 당연히 꽁꽁 숨겨놓은 히나라고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마님! 숨어 계셔야 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마님!”
하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코반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에 보이는 중년의 귀부인에 실망을 금치 못한 그가 쳇, 하고 짧게 혀를 찼다.
“지금 내 집에서 무얼 하는 겁니까!”
사라는 겨우 침입자 한 명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을 보며 기가 차 외쳤다. 하녀들은 끝까지 그녀에게 숨어 있으라며 말렸지만, 리베리아의 안주인으로서 그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님이라.”
꽤 쓸 만한 인물이 나타나셨군.
코반드가 작게 중얼거리며 입가를 비스듬히 올렸다.
“히나 피안 리베리아는 어디에 있지?”
“내가 딸을 파는 몹쓸 어미가 될 것 같나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해 사라가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더 가소롭다는 듯, 코반드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비웃었다.
“하, 친딸도 아니면서?”
“그 아이가 어떻게 들어왔든 지금은 내 딸입니다.”
사라의 눈에 단호한 의지가 서렸다. 여기서 죽더라도 결코 가문의 일원을 파는 오점을 남기지 않겠다는 각오가 완고했다. 설사 그 대상이 피도 섞이지 않은 수양딸이라도 말이다.
제이스에게 리베리아가 보수적이고 명예를 중시한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귀하게 자란 귀부인이 과연 제 목숨까지 내놓으면서까지 입을 다물 수 있을까?
“목숨보다도 가문의 명예라. 리베리아가 보수적이라고는 들었다만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코반드가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사라의 뒤에 있던 하녀 중, 한 명이 양팔을 벌리며 다급히 튀어나와 외쳤다.
“마님, 도망가셔……!”
툭.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녀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코반드를 제외한 모두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하녀의 목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꺄악!”
뒤늦게 바닥에 엎어지는 몸뚱이를 보며 하녀들이 하나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사라도 그 두려움을 참을 수 없었는지, 드레스 자락을 꽉 쥐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대마법사가 아끼는 이 집의 수양딸, 어디에 있지?”
사라는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오는 코반드를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응시했다. 도망가고 싶어도 몸이 떨려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나, 난 모릅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이것도 겨우 내뱉은 거였다.
“호오라, 아직도 숨길 셈인가?”
코반드가 감탄을 흘리며 사라를 보았다. 이 상황에서도 가문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는 사라의 노력이 가상했지만, 그보다 한시가 급했다. 시간을 오래 끈다면 카신에게 들킬 확률이 높았다.
‘뭐, 그에 따른 비책은 세워두었지만.’
들켜도 상관은 없었다. 카신에게서 도망갈 방법은 충분히 만들어두었으니까.
“아, 아가씨는 전쟁에 참전했어요!”
사라를 오래 보필해 왔던 하녀 한 명이 사라의 앞을 막으며 외쳤다.
“그만!”
사라가 하녀를 다급히 말리려 들었지만, 하녀에게는 오랫동안 모셔온 주인이 더 중요했다.
“아가씨는 이곳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마님은 건드리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하녀의 말을 듣자마자 코반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사라의 앞을 막은 하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하녀의 몸이 붕, 뜨며 코반드의 바로 앞까지 이동했다.
곳곳에 비명 소리가 넘쳤다. 사라가 어서 하녀를 놓아달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코반드는 제 손에 잡힌 하녀에게만 집중했다.
“그 여자가 전쟁에 참전했다고? 그 말이 확실하겠지?”
허공에 몸이 붕 뜬 채로 겁을 집어먹고 있던 하녀가 고개를 다급히 끄덕였다. 그리고 간절히 외쳤다.
“아가씨는 이곳에 없어요. 그러니 마님은 살려주세요!”
“하나같이 전부 가상해서 못 봐주겠군.”
기가 찬 코반드가 마법을 풀었다. 공중에 떠 있던 하녀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제이스는 히나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가져왔다. 무슨 수를 써서 세인트 황궁학교에 들어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히나가 있는 상급반이라면 당연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한 귀족 가문의 자제가 두 명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그것만으로도 귀족으로서 충분히 본보기를 보인 것이다. 세인트의 귀한 인재라고 해도 여자이면서 수양딸인 히나가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방법은 충분히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대마법사가 그렇게 아낀다던 여자가 아닌가!’
카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제국은 그를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다. 그러니 제국이라면 히나를 전쟁에 참가시키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카신이 아끼는 여자를 전쟁에 보냈을 리 없다.
‘설마 그렇게까지는 아끼지 않는 것인가?’
코반드는 카신의 본성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버려도 그만일 물건이라도 카신은 제 것을 남이 건드리는 걸 무척 싫어했다. 실제로 코반드의 눈은 카신이 버리다시피 한 연구 자료를 본 죄로 다치게 된 거였다.
“남이 알아도 딱히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누가 내 것을 건드리는 건 불쾌해서 말이지.”
검은 마법으로 그의 한쪽 눈을 완전히 태워 버린 카신은 눈앞에서 그가 훔쳐보던 자료를 버렸다.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자료를 폐기한 것이 아닌, 누가 주워 가도 상관없다는 투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다음부터 내 자료를 보고 싶다면 완전히 버려진 것을 골라 보는 걸 권장하지.”
태어나서 그렇게까지 굴욕적인 적이 없었다. 당장에 카신을 죽이고 싶었다.
“쓰레기가 쓰레기를 주워 보는 건 당연하지 않나?”
카신은 태연한 얼굴로 그의 속을 긁으며 홀연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당시의 코반드는 타들어가는 눈을 부여잡으며 뒷모습만으로도 위협적인 카신에게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제 물건을 훔치는 시녀를 그저 지켜만 보았다. 아무리 인간에게 관대하다고는 하나, 그대로 놔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직접 나서서 구해주기까지 했지.’
자신의 물건을 훔친 시녀를 직접 나서면서까지 구해줬는데,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그렇게 모든지 귀찮아하면서?
현재 카신은 히나로 인해 교수 행세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분명했다.
제이스는 우연이라며 대충 넘기는 듯했지만, 코반드의 눈까지는 속일 수 없었다. 무슨 변덕이 들어 카신이 히나를 전쟁터에 내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소중한 건 확실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갈 수는 없지.”
코반드가 알 수 없는 언어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저택 주변이 갑자기 강하게 피어오르는 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저택에 있는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크고 화려한 불길이었다.
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도망갈 곳을 찾지 못한 채 허망한 눈으로 저택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불길을 보는 이들도 있는 반면, 불을 끄기 위해 우왕좌왕 물을 기르려는 이들도 있었다.
“고귀한 귀부인께서는 이곳에서 명예롭게 죽으시길.”
강력한 마법으로 일으킨 불길을 이곳에 있는 인간들이 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코반드는 이 상황에서도 꼿꼿하게 허리를 펴려 애쓰는 사라를 향해 예의를 보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뜨거운 불길이 일고 있는 저택의 출입문을 통과했다.
“이게 누구야?”
코반드가 꽤 두꺼운 불길 속을 거의 나올 때였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드물게 귀하디귀한 동족을 마주쳤는데, 이렇게 반갑지 않을 수가.”
반갑다는 듯, 칼피온은 히죽 웃으며 코반드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미소와 달리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는 사납게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