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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92화 (92/128)

92.

칼피온은 붉은빛이 감도는 결계를 지나 이제 막 저택 앞에 당도한 차였다.

저택 안으로 몰래 들어가려는 순간, 엄청난 불길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화려한 불길 속에서 코반드가 유유히 걸어 나오는 걸 발견했다.

“이 불, 꺼줬으면 하는데.”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칼피온의 검은 눈동자가 힐끗, 저택보다도 더 크고 웅장하게 피어오르는 불길을 가리켰다.

“미개한 인간 몇 명 죽인다고 안 될 건 없지 않나.”

코반드는 칼피온을 보자마자 속으로 안심했다. 카신이 히나를 특별히 여긴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있었다.

하지만 카신과 꽤 친분이 있는 칼피온이 이곳에 온 걸로 모든 불안은 사라졌다. 물론 이곳에서 그녀를 납치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계획이 크게 어긋나는 건 아니었다.

“우연히도 여긴 내가 잘 아는 집이라서 말이지.”

“그런가? 우연히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집이 자네가 알고 있는 집인 줄은 몰랐군.”

우연이 아니라는 건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둘 사이에 묘한 스파크가 튀었다.

칼피온은 점점 더 불길이 솟구치는 걸 보며, 어쩔 수 없이 먼저 코반드에게 달려들었다.

코반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칼피온에게 브레스를 날렸다.

인간의 작은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불길이 코반드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칼피온이 인상을 구기며 다급히 몸을 굴려 그 불길을 피했다.

‘이런 미친! 인간계를 쑥대밭으로 만들 셈이야?’

딱히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드래곤은 인간계에서 제 본래의 힘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건 암묵적인 룰이었다. 하지만 지금 코반드는 그 룰을 어긴 채 인간의 몸으로 있는 힘껏 불을 내뿜고 있었다.

암묵적인 룰을 전혀 지킬 생각이 없는지, 코반드가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칼피온이 도망간 곳을 향해 불을 뱉어냈다.

“젠장!”

화려하게 타들어가는 저택과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드래곤 브레스를 번갈아 보던 칼피온은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양 볼이 깊이 들어갈 정도로 숨을 들이마신 그가 곧 크게 숨을 내뱉었다.

화르륵―

뭐든지 다 타들어갈 것 같은 검은 불꽃이 칼피온의 입에서 솟구쳐 나왔다. 붉은 브레스와 검은 브레스가 만나 상충하자 주변에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저택 주변을 크게 에워싸던 붉은빛의 투명한 결계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저 불을 꺼! 이건 로드로서 명령이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블랙 드래곤의 브레스는 그 어떤 드래곤의 브레스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하지만 칼피온은 제대로 힘을 낼 수 없었다. 코반드의 브레스와 위력을 맞추어 막는 것이 다였다.

코반드 뒤에는 리베리아 가의 저택이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강하게 브레스를 내뿜는다면 뭐든지 삼켜 버리는 검은 불꽃이 저택까지 삼켜 버리리라.

저택은 그 누구도 도망가지 못하게 거센 불길이 주변을 감싸고 있을 뿐, 속은 아직 멀쩡했다. 한시가 급했다. 어서 불을 끈다면 최악의 경우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히나는 저택에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제집이 자기 때문에 타서 없어진 걸 알면 크게 슬퍼하겠지.’

슬퍼하는 히나를 본 카신이 범인이 드래곤인 걸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유독 드래곤에게 냉혹하게 구는 카신이 그 사실을 알아서 좋을 건 없다.

칼피온은 조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코반드에게 달려들었다.

“흥, 내가 순순히 끌 것 같나?”

“그럼 널 죽이고 내가 직접 끄는 수밖에!”

“뭐든 삼키고 파괴하는 힘만 가진 주제에 저 불을 끄겠다고?”

큰 목소리로 비웃는 코반드를 보며 칼피온은 이를 악물고 날아갔다. 하지만 다시 한번 브레스를 날리는 코반드에 의해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칼피온은 날아오는 브레스의 위력을 확인하곤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같은 위력의 검은 브레스를 내뿜었다.

‘내가 너무 불리해.’

코반드가 계속 거대한 브레스만 뿜어대니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거기다 코반드의 바로 뒤에 있는 저택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브레스의 위력을 조절해야 했다.

그의 본연의 힘인 검은 불꽃은 코반드의 붉은 불꽃과는 완전히 달랐다. 코반드의 브레스를 삼킨 검은 불꽃이 저택까지 영향을 끼친다면, 그때는 어떻게 처리할 방도가 없었다.

“하하! 천하의 드래곤 로드도 별거 아니군그래!”

코반드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그를 비웃었다. 칼피온은 있는 힘껏 브레스를 날려 코반드와 함께 모든 것을 검은 불꽃으로 삼켜 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잠재웠다.

코반드의 결계에 간 금이 점점 더 번지고 있었다. 이러면 힘에 민감한 카신이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와서 열 받으면 어쩌지?’

지금 상황에서 카신이 나타나 불을 꺼줬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그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강했다. 히나를 일부러 노리고 온 코반드를 보고 이성을 잃어 애꿎은 드래곤에게 화풀이를 하면 큰일이었다.

한 번만 더 브레스가 상충하면 결계는 깨지리라.

코반드가 다시금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게 보였다. 칼피온은 깨지기 직전인 결계와 화려하게 타들어가는 저택, 그리고 브레스를 날릴 준비를 단단히 마친 코반드를 보며 제 머리를 헝클였다.

‘에라이, 난 모르겠다.’

결계는 이미 금이 갔다. 어차피 이제는 숨길 수도 없다.

칼피온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코반드의 브레스에 맞춰 검은 불꽃을 내뿜었다.

* * *

한편 카신은 별궁에 틀어박힌 채 히나와 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공을 세우고 돌아올 테니, 그때 꼭 결혼을 해달라.”

아주 당당하게 외치고 떠나는 히나를 말릴 수 없었다. 하지만 역시 히나를 전쟁터에 보낸 건 후회가 되었다.

“하아.”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무서워서 제발 데리고 가달라고 애원을 하기 전에는 절대 데리러 가지 않을 테다.”

사실 제발 데리러 와달라며 무서워나 했으면 싶었다. 겁이 많아 벌벌 떨면서도 절대 도망치지 않을 히나를 알기 때문에 더 걱정이 되었다.

“역시 지금이라도 데리고…….”

카신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건…….”

생각에 깊게 잠겨 있느라고 상충하는 두 개의 힘을 느끼지 못했다. 카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흩어지는 미세한 힘에 집중했다.

다시금 두 힘이 부딪혔다. 확실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꽤 거대한 힘이었다. 그럼에도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아, 강력한 무언가가 그 힘의 충돌이 번지는 걸 막고 있다는 거였다.

‘강한 결계 속에 뭔가가 부딪히고 있어.’

거대한 힘이 점점 더 강하게 느껴졌다. 강력한 결계조차도 막지 못하고 깨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힘이 느껴지는 방향을 확인했다. 또다시 두 힘이 충돌했다. 그리고 결계가 와장창 깨지는 순간, 카신은 그 장소가 어딘지 깨닫고 곧바로 이동했다.

“이게 도대체 뭐지?”

결계가 쳐져 있었다고는 하나, 금이 가고 있는 상태였다. 깊은 생각에 잠겼다고 하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던 충돌도 느끼지 못하다니.

“둘 중, 누가 내게 설명을 해줄 텐가.”

카신은 저택을 휘감은 붉은 불길과 두 드래곤을 보며 화를 억눌렀다.

“이런. 주인공이 납셨군.”

카신은 검은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코반드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껏 빈정거리는 코반드의 얼굴은 무척 낯이 익었다.

레드 드래곤을 상징하는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코랄드, 인가?”

코반드는 몇 년 만에 듣는 자신의 진짜 이름에 픽 웃었다. 드래곤을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고 취급하는 카신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우스웠다.

“대마법사님이 미천한 이름도 기억해 주시고, 황송할 따름이군요.”

“그보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카신의 눈이 불길에 휩싸인 저택에 닿았다.

“로티우스! 히나가 사는 집이라고! 어서 불을 끄는 게 낫지 않겠어?”

칼피온이 다급히 말했다.

인간이 죽어 나가는 것에 일일이 신경 쓸 만큼 그는 오지랖이 넓지 않았다. 히나도 없는 집이 불에 타든 상관없다. 하지만…….

“어머니가 골라주시는 드레스는 다 예뻐요. 제 취향을 저보다 더 잘 아시는 것 같아요.”

저택에 꽤 많은 불이 번졌다. 안에 있는 인간을 다치지 않게 힘을 조절하며 드래곤의 불을 끄는 건 꽤 귀찮은 일이었다.

카신은 사라의 기척을 찾아 그녀만을 구하고 나오려 했다. 하지만 순간 히나의 목소리가 또다시 그의 뇌리에 지나갔다.

“자주 보지 않아도 엄청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아직 시중을 받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절 조금이라도 예쁘게 꾸며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어머니 인복 덕분인지, 저희 집 하녀분들은 참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아요.”

하녀는 돈을 받고 일하는 고용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히나가 기쁜 얼굴로 말하자 카신은 그녀를 친절하게 대해준 하녀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게 무거운 짐도 아닌데, 마차에서 조금만 큰 짐을 내리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들어주신다니까요? 우리 집 시종분들은 다 부지런도 하지. 귀찮을 텐데도 다들 대단해요.”

그만큼 보수를 받으니까 일하는 거였다. 하지만 평민에다가 시녀 출신이었던 히나는 자신의 집에 있는 능숙한 고용인들을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했다.

꼴을 보아하니 질식해서 죽은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빠른 조취를 취한다면 남아 있는 모두를 구할 수 있다.

카신은 저택 안에 있는 인간들의 기척이 꽤 많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말했다.

“칼피온, 내가 올 때까지 그놈, 제대로 잡아둬!”

레드 드래곤의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기로 유명했다. 힘으로 확 눌러 끄면 안에 있는 인간들이 전부 죽는다.

‘뭐, 칼피온의 검은 불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카신은 불길의 정도를 파악하며 저택 앞에 섰다.

저택의 구조물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 마법부터 걸어야 했다. 그것도 마구잡이로 마법을 거는 게 아닌, 마법진을 그려가며 하나씩 섬세하게. 그가 가장 싫어하는 짓이었다.

‘숨을 쉴 수 있도록 산소도 어서 공급해 줘야겠군.’

하나둘, 순서를 정한 그가 빠른 속도로 여러 개의 마법진을 한꺼번에 그려 나갔다.

카신이 다가오자 코반드는 뒷걸음질 치며 알아서 물러났다. 카신과 맞서봤자 좋을 것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들었지? 너, 잡아두라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칼피온이 저택 앞에서 나온 코반드를 따랐다.

“아까는 저택까지 타버릴까 봐 봐줬지만, 이제는 얄짤없다고. 알고 있겠지?”

“흥, 저택이 없어도 난 상관없다고.”

“넌 날 절대 못 이겨.”

칼피온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외쳤다. 저택 따위만 신경 쓰지 않으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그는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었다.

코반드가 손에 잡히는 반투명한 구슬을 꺼내어 깨뜨릴 때만 해도 칼피온의 모든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칼피온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있는 힘껏, 브레스를 내뱉으려 했다. 갑자기 느껴지는 히나 특유의 좋은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히나?”

칼피온의 입에서 브레스 대신 검은 불꽃의 파편과 함께 히나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저택 안에 있는 인간들을 모두 구조하려던 카신도 당황한 칼피온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코반드가 갖고 있던 구슬이 깨지자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점점 커지며 인간의 형체를 이루었다. 놀랍게도 그 인간의 형체는 히나였다.

“카신 님.”

얼굴도, 목소리도 모두 히나였다. 코반드의 옆에 히나가 서 있었다.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모를 만큼 성력의 기운이 무척 희미했지만, 그 어떤 걸로도 대체할 수 없는 좋은 기운은 여전했다.

칼피온은 브레스는 까맣게 잊은 채 히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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