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적군의 마법사가 인간이 아니라니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보다 베어도 다시 재생이 된다니요?”
“얼마나 검기를 다뤄야 적군을 죽일 수 있는 겁니까?”
아델리아는 잠시 눈을 감고 기사단의 실력을 차분히 떠올렸다. 그녀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현재 적을 완전히 벨 수 있는 아군의 기사는 채 백 명이 되지 않네.”
“그, 그럼…….”
적군의 마법사만 수백이었다. 그런데 상대할 수 있는 병력이 고작 백 명도 되지 못하다니.
“검기로 갑옷까지 두 동강을 낼 수 없는 기사는 마법사의 힘을 받아 죽여야겠지. 우리 쪽 기사가 검을 휘두를 때, 황궁 마법사단에서 힘을 증폭시키는 마법을 걸어주면 적군과 대적할 기사의 수가 조금 더 늘어날 것 같다만.”
“기사의 신호에 맞춰 바로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다 해봤자 오십여 명이 되지 않겠죠.”
지금도 적군은 맹렬한 기세로 성벽을 무너뜨리며 쳐들어오고 있었다. 한데도 그저 기사와 마법사가 협력하여 싸워야 한다는 막연한 방도만이 나올 뿐이었다.
의견이 분분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마법사와 기사가 합을 맞춰 공격하는 것을 서로 피하는 눈치였다.
“서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지금은 그만 해산하지. 알아볼 것도 있으니.”
현 상황을 정리한 아델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여기서 무슨 얘기를 하든 결론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리베리아 후작을 향해 말했다.
“성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세이나 신녀님이라고 했었나.”
“예, 그렇습니다.”
아델리아는 오는 길에 리베리아 후작에게 히나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 하지만 후작이 아는 거라곤 히나에게 성력이란 신기한 힘이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지금 즉시 히나와 신녀님을 불러오거라. 그리고 후작도 남게.”
“예!”
적군의 기사들에게 감정이 있기는 할까? 애초에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인간의 몰골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라면, 이라는 과정을 없애서는 안 된다.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갑옷을 입고 걷는 모양새는 인간과 흡사했다. 심지어 마법을 쓰는 방식까지도 말이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각하를 뵙습니다.”
세이나와 히나가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아델리아는 빈자리를 가리켰다.
“위급사항이니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신녀님.”
“괜찮습니다.”
세이나는 제국 소속이 아닌, 대신전의 대신녀였다. 아델리아는 세이나에게 미리 무례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신력을 마법으로 증폭시킬 수 있습니까?”
“해본 적은 없지만, 신력은 마법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신력으로는 어디까지 정화가 가능합니까?”
다소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었지만, 세이나는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상의 이치에 거스르는 것이라면 대부분 정화가 되지요.”
“적군의 마법사는 인간 모양의 진흙이었습니다. 완전히 두 동강을 내지 않는 이상 베어도 다시 붙어버리고, 황궁 마법사 이상의 마법을 쓰지요.”
아델리아는 적군의 마법사가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베는 감촉은 인간과 거의 흡사했죠. 저는 그들을 인간을 변형시킨 거라 보고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 같군요. 태초에 신께서 인간을 진흙으로 만들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이 그리 바뀐 거라면, 정화가 가능합니까?”
세이나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겨우 입을 뗐다.
“이치를 거슬러 그리된 거라면 정화가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대신전은 무의미한 전쟁을 일으키는 연합군의 일방적인 전쟁에 제국의 편을 잠시 든 것이지, 전방에서 싸울 만큼의 힘을 빌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신전은 어디까지나 중립의 입장입니다.”
중립을 유지하는 대신전에서는 그 어떤 전쟁이든 끼어드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신전이 속해 있는 제국의 전쟁이었다.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을 떠나 강대한 제국의 황제가 직접 부탁하는 것을 거절하는 건 신전에서도 난감한 일이었다.
‘그 일이 아니더라도…….’
히나의 학교 친구들이, 가족이 전부 전쟁에 나간다. 히나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을 최대한 지켜주고 싶었다. 그 때문에 세이나는 대신전에서 전쟁에 참전할 사람들을 모아 이곳에 온 것이었다.
하지만 신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뒤에서 부상자를 치료해 주거나 전쟁이 어서 빨리 끝나고 평화로워지길 기도하는 것이 다였다.
“이치에 어긋나는 힘을 가진 연합국은 제국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수많은 나라를 짓밟을 것입니다.”
아델리아는 완고한 세이나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 대상이 나라가 아닐 수도 있겠지요.”
“지금 연합군이 신을 모시는 대신전까지 건드릴 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연합군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제이스 태제 전하입니다. 대신전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이스가 연합군을 지휘한다는 것을 몰랐던 세이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과거 황자였던 제이스는 신녀 중 한 명을 건드리는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 대신전은 제국에 완고하게 등을 돌렸고, 결국 제국은 몇 번이고 사과를 요청하며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제이스는 황제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루이스에게 황태자의 자리까지 넘겨주고 말았다.
아마 제이스가 이끄는 연합국이 제국을 정복한다면, 대신전에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을 하려 들 것이다.
“인간일 거라는 추측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라 하더라도 정화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때는 어찌하실 거죠?”
“신녀님들께서 다치는 일은 절대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작전은 한 가지 더 확인한 후에 말씀드리지요.”
아델리아는 어째서 여기 불려왔는지도 모른 채, 계속 우물쭈물 지켜만 보고 있던 히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력이 마법으로 증폭이 가능하다면, 성력도 가능할 터.”
히나는 자신에게로 모이는 시선에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나고 긴장이 됐다.
“우리 기사들에게 작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 떨어질 때로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겠지. 리베리아 후작, 증폭 마법으로 성력을 퍼트릴 수 있겠나?”
리베리아 후작의 불안한 시선이 히나에게 닿았다. 이 특별하고 기이한 힘을 전쟁에 쓰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델리아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 대로만 된다면 엄청난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하지만 히나는…….’
리베리아 후작은 히나가 미덥지 못하다기보다는 걱정이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히나가 혹시나 성력을 쓰다가 전처럼 폭주라도 하거나, 처참한 전쟁의 이면을 보고 겁을 먹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까 봐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히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리베리아 후작은 당당하게 말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만, 인원을 꾸려 해보겠습니다.”
“히나는 할 수 있겠나?”
“네.”
생각보다 심각해 보이는 상황에 걱정이 됐다. 하지만 히나는 드디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 * *
“히나라고?”
히나가 전쟁에 나간 것을 알면서도 카신은 코반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신 님, 살려주세요!”
코반드가 히나를 뒤에서 잡은 채 위협했다. 히나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다시피 외쳤다.
히나가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칼피온은 모든 공격을 멈췄다. 그리고 카신을 보며 어떻게 할 것인지 눈으로 물었다.
“히나가 여기 있을 리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신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불에 타들어가는 저택과 코반드의 손에 잡힌 히나를 번갈아 보더니 코반드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머릿속이 멍했다. 히나가 이곳에, 그것도 코반드의 손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이성적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히나를 위협하며 카신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코반드가 히죽 웃었다.
“칼피온, 저택의 불을 꺼.”
당장에라도 코반드에게 날아갈 기세로 카신이 말했다.
“내가? 저걸?”
칼피온은 타닥타닥 나무가 타는 소리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하는 저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건 못 해. 부수는 거라면 모를까.”
저택이 부서지지 않게 막으며, 안에 있는 인간을 한 명도 다치지 않게 보호하면서, 또 불도 꺼야 한다.
저택 안에 있는 인간이 한두 명이면 몰라도, 수십 명이 넘어간다. 그중에는 의식을 잃은 자들도 분명히 있을 터.
“내가 했다가는 불은 꺼도 저택이 전부 부서질 거라고.”
너무 제한이 많았다. 그렇게 여러 마법을 세심하게 부릴 수 있는 생명체는 칼피온이 알고 있는 한 카신 외에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택의 불은 카신만이 끌 수 있는 일이었다.
“카신 님, 살려주세요!”
카신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히나를 관찰했다. 목소리, 당황하여 발버둥 치는 모습, 거기다 기운까지도 히나와 일치했다. 하지만 코반드에게 붙잡힌 히나에게서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히나에 관련된 일이었다. 여기서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 조금만 생각하면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히나는 전쟁에 참전했어. 여기 있을 리가 없지.’
코반드가 리베리아 저택에서 히나를 사로잡은 일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녀가 후발대에 속해서 떠나가는 걸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또한 코반드가 후발대에 있는 히나를 납치해서 여기 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굳이 히나를 인질로 데리고, 리베리아 가에 와서 불을 지른다는 건 이상했다. 그에게 들킬 걸 알면서도 말이다.
‘저 여자는 히나가 아니야.’
결론은 하나였다. 하지만 카신은 코반드에게 공격을 날릴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 있는 히나가 계속 눈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흡사한 게 아니라 너무 똑같았다.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는 칼피온을 보니 그도 성력 특유의 좋은 기운을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히나라는 확률이 1%라도 있다면 절대 위험한 일을 만들어선 안 된다. 그는 히나에 한에서라면 아주 작은 위험 요소도 허락할 수 없었다.
“그 잔학무도한 대마법사가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주춤하다니. 웃기는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코반드가 히나를 데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따라가려던 카신은 칼피온을 향해 빠르게 말했다.
“코랄드를 쫓아가면서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위치를 알려. 곧 따라가지.”
칼피온은 당장에라도 쫓아갈 것 같았던 카신이 의외로 저택으로 발길을 돌리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점점 멀어지는 코반드를 보고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그를 쫓기 시작했다.
“먼저 이것부터 처리해야겠군.”
히나가 좋아하는 인간들이 모두 이 안에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살려야 한다. 그래서 히나에게 최소한의 슬픔만을 줘야 했다.
카신은 활활 타오르는 저택을 보고 그리다 만 마법진을 이어 그렸다. 자꾸만 잡혀간 히나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그는 애써 그 생각을 접으며 불을 끄는 것에 전념하려 애썼다.
‘그 도롱뇽 새끼, 가만두지 않을 테다.’
히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감히 그의 여자를 건드린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할 것이다.
카신은 쓸데없이 큰 저택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